이쾌대(李快大1913-1965? or 80?))
대구가 고향이면서 대구에서 철저하게 잊혀졌던 화가가 이쾌대이다. 칠곡의 부잣집 막내 아들로 태어나서 대구 수창보통하교를 16세인 1928년에 졸업하고, 서울의 휘문고보에 진학하여 1933년에 졸업했다. 휘문고보 시절에 장발에게 서양화를 배웠다. 1933년에는 제 11회 선전에 입선했다.
휘문고보에 다닐 때 같은 마을에 사는 진명고보 여학생에 유갑봉에게 반하여 그림엽서도 보내면서 끈질게 구애하여 1932년에 결혼했다. 1934년에 일본의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도코 유학시절에도 일본에서 함께 신혼생활을 했다. 그의 아내를 모델로 많은 여인 초상을 그렸다. 이후에 여러 미술 공모전에 참여하면서 미술작업을 하였다.
졸업 후에 귀국하여 이중섭을 비롯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화가들과 조선미술가 협회도 결성하면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조선에 새로운 미술을 도입하는 대표적인 화가로 이중섭과 이쾌대로 꼽을 만큼 유명화가였다. 이쾌대는 인물화를 공부했고, 그의 작품도 인물화가 대부분이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조선미술건설 본부의 회원이 되었다. 46년에는 조선미술동맹의 서양화부 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조선미술문화 협의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작품제작은 꾸준히 하여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해방이후에도 인물군상의 그림이 많다. 그의 인물군상 그림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도,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다룬 독자적인 세계도 구축해나갔다. 그러나 6. 25전쟁으로 그의 꿈은 부숴져 버렸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병든 노모와 만삭의 몸인 아내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서울에 남아서 북한군의 활동을 선전하는 그림을 그렸다. 9, 28 수복 후에는 그해 8월에 태어난 막내 아들과 아내를 두고 거제도 포로 수용소로 끌려갔다. 1953년의 포로 교환 때는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한에 둔 체 이북을 선택했다. 왜 일까? 그의 친형 이여성의 영향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는 12세 년상인 형을 아주 많이 따랐다고 한다.
이여성은 진보적인 지식인으로서 미술로서도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군의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년 간의 옥고를 치룬다. 해방 이후에는 대구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1948년에 월북하였다.
그가 월복하기 직전에 아내에게 남긴 편지를 읽어보면 가슴이 아프다.
“오래 간 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9월 20일은 서울을 떠난 후 5, 6일 동안은 줄창 걷가다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부산 100수용소 제 3실에 있습니다. 신병을 앓는 당신은 몇 배나 여위지 않았소. 안타깝기 한량 없소이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 주시오. 전우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ㅏ다. 내 맘은 지금 우리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편지를 보면 가족을 두고 월북을 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의 형 이여성의 월북이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한다. 전쟁 중에 그가 겪었던 현실적인 문제도 남한에서 살아가는데 자신감을 잃었었는지 모른다.
이북에 가서도 그의 미술가로서 생활이 쉽지는 않았는 것 같다. 북한의 미술가 인명서전인 ‘조선력대미술가 편람’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김정일 시대에 김정일이 지시하여 비로소 이름이 올랐다고 하였다.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휩쓸고 있을 때에도 그의 작품세계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기 인물로 지목되었다고 하였다.
1988년에 월북작가를 해금할 때 그도 복권되었다. 그는 해금작가로서 재조명을 받았다. 그때까지는 이름이 거론되어 본 일이 없는 잊혀진 화가였다. 1991년에는 신세계 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 특별전’이 있은 후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을 보관해온 아내 유갑봉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월북 작가 가족들이 겪는 고초는 말할 수 없었다. 집 주위를 사복 경찰들이 돌아다녔고, 부인 유갑봉 여사는 경찰서에 불려다녀야 했다. 그는 작은 포목점을 열고 네 자녀를 힘들게 키웠다. 그러면서도 이쾌대의 작품을 다락방에 숨겨서 보관하였다. 막내 아들인 이한구도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아버지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는 줄 몰랐다고 하였다. 그림을 팔아라는 돈의 유혹도 있었지만 한 점도 팔지 않았다고 하였다. 1988년에 해금이 된 후 막내 아들 이한우가 전문가에게 맡겨 그림을 손 본 후에 전시회를 가졌다. 그러나 유갑봉 여사는 아깝게도 전시회를 보지 못하고 198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쾌대 그림은 민족적 인물화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일제 때는 어두운 현실과 민족의 운명을 되새기게 하는 인물상을 그렸다. 해방 이후에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인물상을 많이 그렸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군상을 그렸다.
그의 그림에는 힘이 넘치는 약동감과 열정이 넘친다. 필사적인 절규가 있고, 몸부림이 있다.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 많다. 삶과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군중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그가 주로 활동하였던 시기는 광복을 전후하여 약 10여 년 간이다. 민족적 인물화에는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때 그린 대형작품 ‘군상’이 대표작이다. 시대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하였다는 평도 듣는다
2012년은 이인성 화가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인성 화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전시회 뿐아니라 문화행사를 벌이느라 대구가 떠들썩 했다. 그러나 이쾌대는 대구에서 철저히 잊혀진 화가였다. 2013년은 이쾌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대구 미술관에서 조촐하게 기념 전시회를 가진 것이 전부였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전시회가 열렸는지도 몰랐다. 아니, 이쾌대라는 이름조차 모른다. 수창초등학교를 방문해보면 이인성을 소개하는 그림들이 요란하게 걸려있다. 그러나 이쾌대는 한 줄의 이름조차 찾을 수 없다. 미술사로 따진다면 이쾌대가 이인성을 앞설 수도 있는 화가인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