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씩 올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 이야기만으로는 계속하여 글을 올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불교 이야기는 주 1회로(월요일)로 하고
수필 관련 글을 1회(금요일)씩 올리겠습니다. 많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문학의 장르에서 수필은 변방으로 취급받는다. 내가 수필공부를 하면서 처음 배운 것이 수필의 주변에 담을 쌓고 넘어가지 말자는 것이었다. 수필모임에 나갔을 때도 비평이라는 것이 내 글이 담을 넘어갔느냐를 단속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한국수필이 채택한 방식은 사실에 입각하여 개인을 드러내기 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을 고백하는 형식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 수필을 독백 문학이라고도 한다. 자신의 경험을 독백하는 형식은 감성적이 되기 쉽다. 경험을 서정으로 포장하여 독자의 감성을 건드리는 글을 잘 쓴 글이라고 평했다. 이것이 수필을 쓰는 방식으로 굳어지면서, 수필비평도 수필 쓰는 방식을 따졌다. 작가들은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고,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기술만 익혔다. 그래서 비평가가 잘 쓴 글이라 평한 글을 읽어보면 감성적 울림이 있었지만 책을 놓으면 울림도 떠나버린다.
신재기가 2015년에 출간한 수필 이론겸 비평서의 제목을 ‘수필의 자폐성을 넘어서’ 이다. 자폐성이란 남과 즉 타자와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성性(자폐성)’으로 말할 때는 속성을 말한다. 수필의 속성을 진단한 여러 이유를 열거하였지만,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수필을 읽는 독자가 없다. 그 이유는 수필의 밖이 아닌 수필 자체에 있다. 내적 문제라는 것이다. 내적 문제란 바로 우리 수필이 갖고 있는 속성을 말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의도와 부합함으로 신교수의 글을 여기에 가져왔다. (신교수가 우리 수필을 서정성 일변도라고 꼬집었다.)
신재기의 글을 좀 더 인용해보자. 우리나라는 집단주의가 중심이었던 전통 사회에서 벗어나서 민주화로 나아가는 과정에 나타난 현상이 개인주의이다. 더군다나 1990년 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 문화는 급격히 개인주의적 성향을 띈다. 이 시기는 우리수필이 빠른 속도로 팽창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 시기에 우리수필이 변화를 꾀하면서 확장해야 할 기회였는데도 개인주의적 사회 분위기에 빠져서 내면의 고백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이 수필의 속성으로 굳어버린 것이 아닐까. 이 때문에 변신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 아닐까.
수필의 주변에 담을 쌓는 것은 수필 외적인 조건이 아니고 수필 스스로 담을 쌓았다. 일반적으로 담을 쌓는 곳은 주변부이고, 변두리 이다.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으려는 것이 목적이지만 수필은 특이하게도 수필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단속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감옥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나는 1990년 대 초에 수필에 입문하여 수필문학 단체에 들어갔다. 수필평에서 수필쓰는 방법을 세세히 따졌고, 수필이론은 지나칠 정도로 교조적이었다. 그 평으로 주눅이 들어서 수필의 속성에서 벗어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속성에 갇힌 수필쓰기를 지속하는 것은 수필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무기수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왜 무기수나 다름없는 글을 쓰고 있는가.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으면 얼마나 답답하게 느낄까. 그러나 갇힌 공간에 적응이 되면 답답함을 모를 뿐더러 바깥 생활을 포기해버린다. 나는 수필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 문학에 수필의 도입기라고 해야 할 1930년 대에 쓰여진 수필이나, 지금의 수필작가가 쓴 글이나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수필작가는 그때의 수필이론을 묵묵히 지키면서 지금까지 써 왔다. 감옥에 갇혀 꿈도 없이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무기수나 수필작가나 다른 점이 무엇이 있는가. 수필작가가 이런 사고에 젖어있다면 앞으로 또 100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선 우리를 둘러 싼 담을 허물거나 뛰어 넘어서 변방을 탈출하자는 주장을 하려한다. 먼저, 신재기가 제시한 수필을 읽지 않는다 것부터 보자. 왜 읽지 않을까. 신재기는 우리 수필의 여러 속성을 말하였지만, 나는 가장 기본에서 찾아보기로 하겠다. ‘재미가 없다’ 는 게 이유이다. 주제가 있느니, 형식이 어떠니 하는 어마어마한 이론도 이유가 되겠지만 다른 곳, 즉 우리의 말초신경을 건드리는데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왜 재미가 없을까.
모든 문학의 기본 구조는 이야기 형식이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재미를 담고 있는 구조이다. 수필도 문학이라면 이야기 구조로 만들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야기는 각색하고, 꾸며서 줄거리에 재미를 담아낸다. 수필이 나의 경험을 소재로 한다면 나의 경험을 각색하고 꾸며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방식이 아닌가. 각색하고 꾸미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허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수필이론에서 허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다루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오늘의 한국수필이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재미를 느끼는 순간은 흥분을 일으키는 일이 벌어질 때라고 한다. 흥분을 일으키는 일들은 많다. 그 중에서도 내가 말하려는 수필의 재미와 연관되는 것으로는, 기존의 관습에 반항적일 때에 일어나는 흥분도 하나다. 관습에 반항적인 글을 쓰려면 내면만 들여다보는 나의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한다. 관습을 벗어나는 실험적인 작품도 재미를 준다. 소설의 기법으로 쓰는 수필도 관습에서 벗어나는 실험작품이다.
예를 들어보자. 신사임당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여인상이다. 그에 비해 나혜석은 여성의 법도를 무시한 문제적 여인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관습적 평가였다. 그러나 최근에 5만권 지폐에 실릴 인물을 선정할 때 신사임당과 나혜석은 치열한 경쟁을 하였다고 한다. 나혜석이 각광받는 인물로 떠오르기 전에 수필에서 나혜석을 편드는 글을 이야기 형식으로 꾸며 풀어내었다면 재미도 있었을테고, 미래를 설계하는 글이 되지 않았을까. 나의 안으로만 들여다 보는 시선을 밖으로 돌려 나혜석이라는 타인을(나혜석 이외에도 많은 타인이 있다.) 글로 꾸미면 실험적이기는 하지만 재미도 주리라 믿는다.
우리가 텔렐비젼 등의 영상매체에서 흔히 만나는 이야기는 다큐 형식의 내용이다. 문학에서는 수필형식이 가장 적합한 형식이 아닐까. (다큐 형식의 글쓰기도 신재기의 주장이다.)
*스베클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2차 대전에 참전한 여군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 한 다큐 작이다. 2015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제 우리 수필도 나를 둘러싸는 벽을 허물고, 변방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문학의 본령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