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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분과 방

연보정

작성자김성문|작성시간25.12.20|조회수295 목록 댓글 0

연보정 / 김성문

 

유신 장군은 어릴 때 연보정蓮寶井의 물을 마시며 자랐다고 전해진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 한쪽에 자리 잡은 연보정을 찾아 나선다. 천 년을 건너온 물이 지금도 솟고 있을까. 그 물이 품은 시간과 기억을 직접 마주하고 싶어진다.

 

연보정은 풍수지리적으로 맑은 물이 솟는 곳이라 한다. 물길이 흐르는 땅은 오래도록 인간의 삶을 이끄는 법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만노군 태수로 부임해 있던 시절, 관아에서 쓰던 우물이 바로 연보정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물맛이 좋다며 오래도록 우물을 아꼈다.

 

생각해 보면, 우물은 인간 삶의 가장 단순하고도 근원적인 상징이다.『삼국유사』「가락국기」에도 기록되어 있듯, 가야 건국 당시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모여 우물을 파고, 들에서 곡식을 거두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정수 시설이나 수도관이 없던 시절, 흐르는 물 혹은 땅속 맑은 물은 그 자체로 생명이었다.

 

우리나라는 화강암 지반이 많아 정수 효과가 뛰어났다고 한다. 덕분에 강물을 마실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은 오염되었고, 우물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수돗물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물을 뜨는 두레박은 없어지고 수도꼭지로 바뀌었다.

 

연보정은 그런 세월 속에서도 자리를 지켰다. 내가 찾아간 그날도 우물은 고요히 물을 머금고 있었다. 구조는 참 독특했다. 일반적인 시골 우물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자연석으로 둥글게 석축을 쌓아 올린 형태였다. 우물의 지름은 약 1.8m이고 뒷부분은 2.6m에 이르렀다. 앞부분은 열려 있고, 안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넘쳐나는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약 4m의 물길을 만든 것이다. 물길 끝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우물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요히 머물고 있었다.

 

정교하게 쌓아놓은 석축의 축조 방식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신라인들은 자연석을 다듬어 우물을 만들었다. 흔적이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감탄을 자아냈다. 연보정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으니, 전해지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우물을 내려다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자란 시골 마을에도 동네 공동 우물이 있었다. 깊이는 5m쯤 되었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물통에 담아 물지게로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독에 고이 담아두고 온 가족이 나눠 마시던 물. 요즘처럼 정수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물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동네 우물은 지면과 높이가 거의 같아 위험하기도 했다. 실제로 내 또래 동네 아이 한 명이 어머니 옆에서 장난치다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넋을 잃고 울부짖었고 동네 어른들이 모여 밧줄을 내려 아이를 끌어올렸다. 우물은 깨끗이 정비되었고, 마을에서는 제사를 지내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기원했다.

 

연보정도 높이가 지면과 같고 뚜껑이 없었다. 얕은 깊이와 계단이 있어 위험은 덜해 보였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집 안에 우물을 파고 지붕과 뚜껑을 갖추어 만든 우물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계급에 따라 물에 대한 인식과 접근 방식도 달랐음을 알게 되었다.

 

우물은 단순한 식수원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심장과 같은 존재였다. 오염되면 마을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우물을 신성하게 여겼다. 예부터 용이 산다는 전설이 따라붙었고 함부로 다루면 재앙이 따른다고 믿었다.

 

다시 연보정 앞에 섰다. 천 년 이상을 지나오며 사람들의 입과 손을 거쳐 간 맑은 물, 김서현 태수도, 김유신도 그 물을 마셨을 것이다. 그들도 이 우물가에 서서 나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을까. 시간은 흘렀지만, 우물은 제 자리를 지켰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흐르되 마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연보정의 물이 그러했고, 물을 아끼고 길러낸 마음 또한 그러했다. 땅을 지키려는 마음,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물 안에 고이 담겨 있다.

 

우물로 내려가서 조심스럽게 허리 굽혀 손을 적셔보았다. 맑고 서늘한 물이 손바닥을 타고 흐를 때, 오래된 시간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물은 갈증을 푸는 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의 시작이었고, 기억의 샘이었으며, 오랜 염원이 담긴 물이었다.

 

연보정의 맑은 물은 이 순간에도 쉼 없이 흐르고 있다. 손에 남은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내 마음도 물처럼 차분히 가라앉는다. 세월을 지나며 수많은 사람의 갈증과 기원을 받아 안았을 이 우물은, 오늘도 말없이 제 자리를 지킨다. 연보정의 물이 그러하듯, 나 역시 잠시 흐르되 마르지 않는 마음을 품고 이 자리를 떠난다.

 

진천 연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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