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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희 수필집 <감전되고 싶은 날들> 사유로 이어지는 기억 /

작성자박용진|작성시간26.04.01|조회수20 목록 댓글 0

사유로 이어지는 기억 / 박용진 

 

 

원탁희의 수필은 ‘회고’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단순한 과거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을 호출하는 동시에 현재를 성찰하는 이중의 시선 위에서 구축된 텍스트이다. 작가에게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복원하는 수단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삶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기능한다. 이때 그의 글쓰기는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감각과 정서의 층위를 따라 재구성된 ‘내면의 서사’에 가깝다.

 

찬밥을 끓여 먹다가 뜨거워서 김치국물을 부어 휘휘 저어 먹어 본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 속에서 배고프던 어린 날의 향기가 뭉게뭉게 살아 난다. 별다른 반찬도 없던 시절 그 한 그릇이 왜 그리 맛있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엄마 생각이 저절로 떠올라 눈시울이 젖는다. 

부엌 한켠에서 들리던 도마 소리 연탄불 위에서 끓던 냄비의 보글거림. “많이 먹어라” 하시며 국물을 더 얹어 주시던 손길까지 혀끝의 온기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인다. 혀는 맛을 잊지 않고 기억을 꺼내어 주는 가장 오래된 일기장 같다. 그 시절 우리는 늘 허기와 함께 자랐다. 

 

ㅡ「김치 국물에 찬밥 한 그릇 부분」

 

이 수필집에서 주목할 점은 기억의 물질성이 아니라 정서적 지속성에 있다. 비록 먹거리가 부족한 시절,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성장기에서, 사진으로 남지 않은 가족의 풍경, 구체적 이름 없이 흘러간 인연들, 사소한 식탁의 장면들은 물리적 기록으로는 부재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결핍 속에서 더욱 또렷한 정서적 실재로 떠오른다. 이는 기록의 유무가 아니라, 기억의 밀도가 삶을 구성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이 지점에서 개인적 체험을 보편적 감각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다.

 

관계에 대한 인식 또한 이 수필집을 관통하는 중요한 축이다. 작가는 인간관계를 본질적으로 ‘균형의 문제’로 파악한다.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감정의 진폭이 아니라 태도의 조율이며, 갈등은 사건이 아니라 사소한 어긋남에서 비롯된다는 통찰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특히 ‘입맛’이라는 일상적 은유를 통해 관계의 긴장과 조화를 설명하는 방식은, 추상적 개념을 생활의 언어로 환원시키는 그의 글쓰기 전략을 잘 보여준다.

 

이때 주목할 것은, 작가가 어떠한 윤리적 당위나 교훈적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글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유보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는 독자를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능동적 해석의 주체로 위치시키는 서술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수필집은 읽히는 텍스트라기보다 ‘사유를 유도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원탁희의 사유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또 하나의 핵심 개념은 ‘균형’이다. 작품「선과 악 사이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서 "인간은 하나의 얼굴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충동이 공존하는 복합적 존재다". 라고 했다. 이는 단순한 중용의 미덕을 넘어, 상반된 가치들이 충돌하고 조정되는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강함과 부드러움, 이성과 감성, 선택과 책임과 같은 이항 대립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지 않고, 끊임없이 상호 침투하며 하나의 삶을 구성한다. 작가는 이 균형을 고정된 상태로 제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재조정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인식은 삶을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진행 중인 과정으로 파악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문체적 측면에서 이 수필집은 절제와 여백의 미학을 따른다. 과도한 수식이나 감정의 과잉 없이, 비교적 단정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내부에는 일정한 긴장과 여운이 남아 있다. 특히 일상적 사물과 장면을 통해 정서를 환기하는 방식은, 서정성과 현실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읽는’ 경험을 넘어 ‘겪는’ 경험으로 확장시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이 수필집은 ‘시간의 윤리’에 대한 사유를 내포하고 있다.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현재의 삶과 어떻게 연결지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존재론적 성찰로 이어진다. 묵혀 두었던 글들을 꺼내어 정리하는 행위는 과거의 정리이자 동시에 현재의 자기 승인이며, 나아가 미래를 향한 태도의 정립으로 읽힌다.

 

결국 원탁희의 수필은 거창한 서사나 극적인 전환 없이도 삶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소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고, 기억의 잔향 속에서 현재를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때 그의 글쓰기는 감정을 소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감정을 통과하여 사유에 이르는 경로를 제시한다.

 

이 수필집은 독자에게 어떤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삶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하나의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독자는 자신의 기억을 호출하고,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다시 질문하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읽을거리를 넘어, 삶을 재인식하게 하는 하나의 사유적 장치로 기능한다. 조용하지만 깊게 스며드는 이 글들은, 결국 독자의 시간 속에서 다시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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