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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와반시>2026년 여름호 소시집/술래의 장미 외 9편 + 산문 1편/지정애

작성자지정애|작성시간26.06.13|조회수74 목록 댓글 2

술래의 장미(9)
 

지정애
 

장미가 나를 끌고 갔다
붉은 밧줄에 휘익 감겼다 
 
웅덩이는 순순히
나의 발목을 내주었다 
 
나는 장미의 새끼손가락에게도 굽실거렸다
장미의 모든 것을 몰래 배웠다
가시를 만들고 붉은 색을 긁어모았다 
 
장미가 담장을 휘감을 때
장미의 그림자인 양 담장에 찰싹 붙었다 나는 
 
자는 척했다 
 
낮의 환한 꼬리가 어슬렁거리는 날
장미라는 붉은 그물에
쉽게 걸려든다
붉은 와인에 빠진 혀처럼 
 
장미의 분수 같은 피가 바닥났다 

나는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았다
누런 잎들이 빗자루에 끌려 사라지자
작은 빛들이 풀의 목구멍으로 흘러들었다 
 
담장을 붙들고 있는 동안
나는 담장을 닮아갔다
장승처럼 유령처럼 
 
아무도 나를 몰라봤다 
 
밤이 밤을 끌고 사라졌다
사람과 유령과 사물이 문을 더듬거렸다 
나는 문을 찢고
밖으로 나왔다  
 

 
 
눈송이 켜는 밤
 
 

눈송이들 떨어질 때
눈송이의 발을 찾는다
 
눈송이는 서로 부딪치며
밖을 더듬는다
 
유리병이 눈송이를 거두어
가장 어두운 방을 두드린다
 
눈송이의 무성한 발바닥
솟아나는 빛들
 
방의 천장과 벽에 스며든다
 
침대 밑에서 어둠이 풀려 나와
유리병 옆에 눕는다
 
스탠드를 켜지 않는다
 

 
 

사라진 계절
 
 
청동 입술을 누른다
창백한 손으로
 
찢긴 전단지
이끼의 젖은 숨결
닳은 가방
부러진 하이힐
금간 자장면 그릇
 
이름이 떠내려가도
스무 살은 꺼지지 않는다
 
분다
터진다
내 안에서 계속 생겨나는 풍선
 
공기주머니는
점점 부풀고
 
꿈꾸는 눈동자 속에서 꿈을 찢으며
터졌다
꽃밭은 이글거리며 벌어진다
 
보도블록은 입을 닫고
하늘은 끝내 닿지 않는다
 
붉은 눈자위
골방의 악몽
 
팽팽해진다
 
꿈과 봄이 섞이고

 
둥근 빗방울
풀들의 귀를 막는다
 
 
 
332
 
 
여기, 희고 식은 손가락이
검은 붕대로
나의 반쯤 열린 눈꺼풀을 감는다
 
봄이 지나간다
어제 놓친 버스 뒤에서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별의 속삭임보다
웅덩이의 하얀 거품이 더 다정하다
 
풀의 시퍼런 손아귀가
골목을 쥐고 있다
 
노란 빛살이
갈매나무 잎사귀를 밀어 올릴 때
 
나는 벽을 파고든다
 
 
 
겨울 숲
 
 
나무와 나무의 품이 더 커져 있다
 
유리벽에서 미끄러지는 구두
사라지듯 지나가는 어깨
 
겨울 숲은 내민다
뜨거운 수액의 머그컵을
 
걸음걸음
천천히 둥글어진다
 
어둠들 나무 아래서 수런거린다
 
나무의 마른 혀 희고 투명한 공기 방울들 나의 부표
 
뒤돌아보지 않는다
 
푸른 밑창
숲 밖으로 미끄러지고
 
 
 

깃털을 싣고 달리는 기차

 
기차가 기차로 출발할 때
비의 밧줄에서 풀려난 커다란 동물은
사바나인 듯
휙휙

기차에서 솟아나는 아침으로
비는
아이들의 입과 눈을 커다랗게 만든다
푸르고 눈부시게 섞이는
비의 허리와 아이들의 다리
실로폰이 되고 뛰는 나무가 된다

기차의 엔진은 지평선을 뚫고
밤의 내장에 갇혀 있던 욕망
차창 밖으로 날아간다
한 아름 드라이플라워로

기차가 기차의 좌석이 되는 동안
구름으로 구름의 입모양을 만든다
고양이의 잠처럼 고요하고
낮은 침묵의 의자

공중의 울대에서 우렁찬 노래 흐를 때
금요일의 맥주 거품은 내일의 태양
어제의 입술이 되고
거리를 배회하는 영혼은
해안선에 젖으며 꿈을 더듬는다

기차가 기차의 끝에 이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은
다른 이름을 갖게 된다

한 계절의 혀끝에서 사라지는
글라디올러스
 
 
 
 
11월의 희망

 
태양의 빛은 에스컬레이터의 기울기로 부서지고 있었다
 
서울역 105, 웨하스가 바삭 구워지고 있었다
 
햇살 알갱이는 가방과 구두에 미끄러지고
 
모두는 모두에게서 노란 믹스 커피 알갱이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기차는 테이크아웃 컵의 기분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두부 같은 희망을 싣고
 
플랫폼의 푸른 공기, 사이프러스나무 향기를 부르고 있었다

 
 
빛의 폐허
 
 
세상의 모든 것은 빵
봄은 어둠을 굴리기 좋은 계절
 
땅에 묶인 그때
나는 빛이 빛인 줄 모르는 지하의 족속
죽음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빵에 빵을, 벽에 벽을 쌓는 밤
날갯죽지는 새벽의 소매 자락에 녹고
 
질문은 돋보기를 들이댈수록 엉키고
벽돌은 무럭무럭
 
버려도 버려지지 않고 부서지는
검은 거울의 꼬리
 
세상의 너울거리는 파도가 뱉어놓은 나는
빛을 꿈꾸는 곰팡이
꿈틀거리는 구멍
웅얼거리는 부스러기
 
어디서도 그림자로 증식되어
끝내 발각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빵
 
책상은 너그럽고 푸른 망토로
마지막 모가지를 건져 올리고
 
나는 빵을 핥는다


 
빛의 껍질 속에서


당신의 온몸은 무늬
당신의 잠과 꿈도 일렁인다
물결무늬로

수평선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왕관과 은빛 사다리의 노래
따라 부른다

당신의 숨, 당신의 감옥
당신의 창문, 당신의 미래

붉은 눈빛 타오르는 너머

어스름 군단이 수평선의 목덜미를 핥을 때

당신의 눈꺼풀에 가만가만 쌓이는 구름
중얼거린다
심장으로 스며들며

빛의 왕관은 쓸쓸한 물방울의 유일한 사치
사다리는 거품을 슬쩍 훔쳐낸 빛
수평선의 열쇠는 첫눈 태어나는 곳에 있다

마침내 당신은 눈을 뜬다
해변의 죽은 물결 껍질 속에서

 
 
 

허공과 샴페인
 
 
겨울과 함께 겨울 호수의 한복판
허공이 힘껏 껴안아 주는 겨울나무 옆에 슬며시 가 선다
 
산길 굽은 가문비나무론 모자라
침묵도 대여가 되는지 알아볼 것
 
커피 사러 가는 길목
흰 돌 빛난다
젖은 속눈썹 몇 개 안고
백설탕은 신이 내려준 최후의 처방
당분간 나의 꽃
 
티끌도 온몸으로 젖어준다
목제 블라인드 사이 은행나무 빈 가지는 따듯하고, 부서진 어금니 메워주는 손
길 오래 붙드는 것을, 어제는
 
수평선까지 갔는데
고래의 울음소리만 듣고 산티아고 노인처럼 돌아왔다
 
샴페인은 고래와 같은 종족,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을 좋아한다
 
산이 높이를 버리니 능선마다 부처다
 
와불의 샴페인은 빈손이라야 한다
 
가을에 돌아간 시인 1, 시인 2는 마지막까지 시 앞에 있었다
시로 짜는 수의가 허공을 닮아가고 있었던 게다

 
 
 
<산문>
 
수리공
 
 
 
 빵집 에어컨이 고장 났다. 천장이 뜯기고 드러난 에어컨의 내부. 매끈한 메탈색 외장이 뜯기자 구불구불한 관들이 혀처럼 뒤엉켜 있다. 상쾌한 바람의 화장이 벗겨진 얼굴. 젊은 수리공이 가게 안팎을 분주히 드나들며 에어컨의 구멍 난 부분을 찾고 있다.
 한 구석에서 커피를 마시며 백지의 미로를 파고들던 나는 허리를 펴고 주위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어 수리공을 더 흘깃 보게 된다. 그는 에어컨 앞에 바짝 붙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에어컨 속으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는 구멍을 빨리 찾고 싶다는 자세이다. 난데없는 구멍이 생기는 바람에 후덥지근한 공기가 매장을 서서히 짓누르고 있다.
 기계 앞에서 땀 흘리고 있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책을 보고 있다는 것이 갑자기 겸연쩍어진다. 내가 보고 있는 책이책이나로 전락한다. 나는 유리창 속에서 지워진다. 쓰고 지우는 반복이 한없이 무용하다. 해부한 내부에서 고장 난 부위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은 듯,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젖은 셔츠가 등판에 딱 붙는다.
 나는 집을 벗어나 보도블록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거운 공기가 내게서 빠져나가는 듯하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기분. 나무와 구름과 자동차, 모르는 사람들을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내가 조금 더 살아난다.
 내 안에서도 어디선가 구멍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난다. 몸 안에서 커져가는 구멍들로 때로는 몸이 터질 듯하다. 가끔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나를 휘감아 바닥을 기어 다니게 한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울의 벼랑에서 마지막으로 잡은 것은 언어.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에 갇혀서 빛 한 오라기 더듬는다.
 나의 내면을 수시로 휘젓고 다니는 잿빛 덩이의 정체를 찾아 적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일. 밥 한 그릇 값도 만들지 못하는 이 무용한 일, 그럼에도 계속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갑자기 문이 사라져, 안개덩어리로 길을 잃기 일쑤이다. 원점으로 수없이 돌아오는 무한반복의 바퀴는 그칠 줄 모른다.
 나는 이제책이나뒤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확인한다. 수리공이 몇 시간 동안 에어컨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끙끙거리는 것이 나 자신의 모습으로 겹쳐 보인다. 수리공의 땀은 언젠가는 그치고 덤덤한 표정으로 트럭을 몰고 떠날 것이다. 에어컨은 회복되고 빵집의 여름은 매미 소리 잦아질 때까지 푸를 것이다.
 나는 몇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쓰고 지우는 것을 반복하고 페이지를 펼치기도 했다. 가끔 입술을 앙다물고 눈썹이 떨리기도 했을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언어 중 몇 개는 나의 동굴로 돌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 또 이 빵집에 나올 것이다. 나는 구멍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미지의 언어를 찾아 나설 것이고, 수리공은 삐걱대는 에어컨의 부름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는 고장 난 기계를 고치고 나는 고장 난 나를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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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전기웅 시인 | 작성시간 26.06.20
    지정애 시인님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참 멋집니다
  • 작성자지정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0 전기웅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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