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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레지오 단원과 그리스도 신비체(84, 1 ~ 95, 20)

작성자박선희루치아|작성시간26.06.12|조회수67 목록 댓글 0

1. 이 교리는 레지오 봉사의 기초이다

 

  맨 처음 레지오 단원들이 가진 회합에서는 그들이 시작하고자 하는 봉사 활동이 단순한 선행의 차원을 넘어서서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레지오 단원이 사람들을 접촉할 때에는 당연히 친절해야 하나, 단지 그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이 활동중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 특히 가장 약하고 미천한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 베풀어 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도록 했다.

  첫 회합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레지오에서는 이 점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모든 단원들이 이 활동의 초자연적 동기를 바르게 이해하고 레지오 봉사의 기초로 삼도록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레지오는 규율을 유지하고 단원들간에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또한 이 원리 안에서 레지오 단원은 간부와 동료 단원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뵙고 존경하게 된다. 이 놀라운 변화의 진리,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행위를 하느님께 드리는 행위로까지 높여 주는 이원리를 단원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두기 위해 레지오는 이를 상훈(常訓)에 넣어 쁘레시디움의 매달 첫 주회합에서 낭독하도록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상훈은 레지오의 또 다른 중요한 활동 원리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단원들이 활동을 할 때는 반드시 성모님과 일치하겠다는 정신으로 나서야 하며, 성모님이 실제로 단원들을 통해 활동하신다는 원리를 말하고 있다.

  레지오 조직의 기초가 되는 이 원리들은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에서 나온 것이며, 신비체 교리는 바오로 성인이 쓴 서간문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교리는 주님께서 바오로 성인에게 직접 가르쳐 주셨으며, 그를  개종까지 시키지 않으셨던가!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 하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오로는 앞이 보이지 않아 땅에 쓰러졌다. 그때 그는 놀라운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대답하셨다.(사도 9, 4-5) 이 말씀은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의 영혼에 불을 놓았고, 그가 이 말씀의 진리에 대해 항상 말하고 글로써 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바오로 성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일치는 마치 한 몸에 붙어 있는 머리와 그 지체(肢體)들이 일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각 부분은 저마다 독특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어떤 부분은 더 귀중하고 어떤 부분은 그보다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체의 모든 부분은 서로 의존하며, 하나의 생명이 신체의 모든 부분을 함께 살린다. 다른 모든 부분이 아무리 훌륭해도 어느 한 부분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 전체가 어려움을 겪에 되고, 반대로 어느 한 부분이 뛰어나면 다른 모든 부분은 그 덕을 본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진다."(에페 1, 23) 즉, 그리스도는 이 몸의 머리요 우두머리이시며 없어서는 안 될 완전무결한 부분으로서, 다른 모든 부분은 이 곳으로부터 힘과 생명을 나누어 받는다. 우리는 세레를 받음으로써 더할 수 없이 밀접한 관계로 그리스도께 결합된다. 그러므로 이  신비체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서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에페 5, 30) 지체와 머리, 그리고 지체와 지체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있다.(1 요한 4, 15-21 참조) 우리 몸에 붙어 있는 모든 부분들이 각기 어떤 일을 맡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지체들이 우리가 이행해야 하는 의무를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되며, 알았다면 이미 절반 정도는 이 의무를 이행한 셈이다.

  이 신비체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교리이다. 신자들의 영성 생활과 그들이 누리는 모든 은총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구원 사업을 통해서 얻어 주신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함께 하나의 신비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행위, 즉 십자가 수난의 무한한 공로가 지체들인 우리 믿는 이들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이 구원 사업의 바탕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인간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당신이 범하지도 않은 죗값을 치르시게 된 이유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인 교회의 구원자로서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에페 5, 23)이다. 그러므로 신비체의 활동은 그리스도 자신의 활동이며, 그 지체인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융합되어 그 안에서 살고 고통받고 죽으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다시 살아난다. 세례성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함이 그 지체들의 영혼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긴밀하게 맺어 준다. 그러므로 영혼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거룩하게 변화된다. 다른 성사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세례성사는 신비체의 지체와 머리이신 그리스도 사이의 일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일을 한다. 그 밖에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더욱 깊게 해주는 요소로서 믿음, 사랑의 실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봉사와 일치, 올바르게 바쳐진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리스도 신자다운 생활 속의 모든 행위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성모님과 한마음이 되어 행한다면 그 효과는 더  확대될 것이다.

  성모님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동시에 그지체들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일치를 이루도록 만들어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에페 5, 30)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실질적이며 완전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자녀들이다. 성모님이 존재하시는 유일한 목적은 '전체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탄생시키는 것이다. '전체 그리스도'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각 지체가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가 서로 연결되고 얽혀 있는 신비체(에페 4, 15-16 참조)를 가리킨다. 성모님은 이 신비체의 생명이시며 영혼이신 성령의 협조와 권능으로 이 일을 성취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품 안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된다."(에페 4, 13)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성모님은 다른 어떤 존재와도 구별되는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신다. 성모님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들 가운데서 당신만의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머리인신 그리스도 다음의 자리이다. 하느님의 섭지하심으로 이루어진 '전체 그리스도' 안에서 성모님은 그 몸 전체의 생명과 밀접히 관계되는 기능을 수행하신다. 즉, 성모님은 신비체의 심장이시다. 그런데 베르나르도 성인의 말에 의하면, 성모님은 신비체 안의 머리와 몸을 연결시켜 주는 목과도 같은 역할을 하신다. 이러한 비유는 신비체의 머리와 그 지체들 사이에서 중재하시는 성모님의 보편적인 역할을 매우 적절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이라는 말은 성모님이 지니신 막중한 영향력이나 우리 안에 초자연적 생명이 움직이도록 하는 데 있어서 하느님 다음 가는 능력을 지니신 성모님의 역할을 적절히 표현하기에는 심장보다는 못하다. 목은 다만 연결시켜 주는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생명을 주도하거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이와는 달리 심장은 먼저 생명을 풍부히 받아들인 다음 온몸에 고루 분배하는 생명의 저장소이다."(뮈라 / Mura : 그리스도 신비체)

 

2. 성모 마리아와 그리스도 신비체

 

  성모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을 실제로 기르고 보살피고 사랑하는 일을 직접 맡아 하셨다. 지금도 성모님은 가장 미소한 형제로부터 신분이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신비체의 모든 지체들을 일일이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1 고린 12, 25) 일치를 이룰 때, 우리가 혹 무지하거나 소홀하여 성모님의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할 경우가 있더라도 결코 성모님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신비체를 위해 온 힘을 쏟으시는 성모님의 일에 지체로서 자신의 노력을 합치는 것이다. 성모님은 이미 신비체의 지체들을 보살펴 오셨다. 예수님을 잉태하신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모님은 이 일을 하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레지오 단원들이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모님이 당신의 일을 도와 달라고 단원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영혼을 보살피는 일은 성모님의 특별하고 고유한 일이므로, 성모님이 은혜로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실상 아무도 그 일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려는 이들 가운데 아직도 성모님의 지위와 특권을 좁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이 신비체 교리에 나타난 논리적인 결론에 주목하기 바란다. 더욱이 이 그리스도 신비체 교리는 성서를 받아들인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느님의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사랑하셨고 어머니께 순종하셨으므로(루카 2, 51), 우리 또한 신비체의 한 지체로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 부모를 공경하여라."(출애 20, 12)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이 분부를 받들어 우리 모두는 성모님께 자녀로서의 효성을 드려야 하며, 성모님을 복되다고 일컬어야 한다.(루가 1, 48 참조)

  성모님과 함께 하지 않고서 어느 누구도 이웃을 위해 올바로 봉사할 수 없듯이, 성모님이 의도하시는 바를 어느 정도라도 따르지 않고서는 이 봉사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성모님과 가까워질수록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라(1 요한 4, 19-21 참조)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더욱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레지오 단원들이 특별히 담당해야 하는 역할은 이웃을 인도하고 위로하며 깨우쳐 주는 일이다. 그러데 이러한 역할은 신비체로서의 교회의 위치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다. 교회의 입장과 특권, 일치, 권위, 성장, 고통, 기적, 승리, 은총과 죄의 용서 등, 이 모든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은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살아 계시며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삶과 그 삶 안에 펼쳐졌던 모든 것을 그대로 다시 보여 준다.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신비체 안에서 각자 주어진 역할을 다하라고 부르신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도적 권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들부터 불러 모으신 형제 자매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써 신비로이 당신 몸을 형성하셨다. 이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자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 사람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든 지체가 한 몸을 이루듯이, 신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다.(1 고린 12, 12 참조) 즉, 그리스도께서 신비체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모든 지체들은 서로 다르고 그 기능 역시 각기 다른 것이다. …… 이와 같이 주님의 영은 서로 다른 지체들에게 극히 다양한 은사(恩赦)들을 주시어, 신비체 안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봉사와 직무를 맡도록 우리들을 초대하신다."(평신도 그리스도인 20)고 밝히고 있다.

  레지오 단원들이 이 신비체의 생명 안에서 어떤 특별한 기능을 맡아 해야 하는가를 알아보려면 성모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모님을 그리스도 신비체의 심장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몸안에서 심장이 맡아 하는 역할처럼 성모님은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정맥과 동맥을 통하여 신비체의 모든 부분에 고루 보내시고, 이로써 신비체가 생명을 얻고 자라게 하신다. 성모님은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이 일을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레지오가 성모님과 일치하여 사도직을 수행할 때, 단원들은 그리스도 신비체의 심장으로서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성모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1 고린 12, 21) 이 말씀을 통하여 레지오 단원들은 사도직 안에서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한다. 단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의지하는 것처럼,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참으로 레지오 단원들에게 의지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이신 그분이 단원들에게 "내가 영혼을 구하고 성화시키는 일에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실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다."(골로 1, 24)는 바오로 성인의 말은 바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몸인 우리들에게 의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놀라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어떤 면으로든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신비체의 각 지체는 자신의 구원과 다른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각자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필립 2, 12 참조)는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 원리로부터 단원 각자가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서 담당하고 있는 숭고한 소명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 소명이란 주님께서 당신 사명을 수행하시는 데 필요로 하시는 것을 우리가 채워 드리는 일이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과 희망을, 괴로워하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죄로 죽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레지오 단원들을 쓰시려 하시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두말할 나위없이 우리 레지오 단원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어머니께 바쳤던 그 숭고한 사랑과 순종을 정성껏 본받아야 하며, 또한 이를 신비체 안에서 그대로 실천하도록 힘써야 한다.

 

  "바오로 성인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의 몸으로 채우고 있다고 확언하였으니, 우리도 다음과 같이 진실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그리스도와 은총으로 일치하고 있는 참된 크리스천은 모든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평온히 지내시는 동안에 몸소 하셨던 행동을 지속시키며 완성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기도를 바치는 행위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바치셨던 기도를 이어 바치는 것이며, 신자들의 활동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삶과 말씀을 통하여 미처 다 하시지 못한 일들을 보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가 현세의 우리 안에 생활하고 활동하며,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정신을 실천하며 수난을 겪어야 한다."(성 요한 유드 / St. John Eudes : 예수님의 왕국)

 

3. 신비체 안에서 겪는 고통

 

  레지오 단원은 활동 중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고통받는 이들과 긴밀히 접촉하게 된다. 그러므로 단원들은 세상이 '고통'이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어야 한다. 평생 동안 고통의 짐을 지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모두가 고통을 거부하며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다가 혹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될 때, 영혼은 때때로 고통에 짓눌리고 급기야는 좌절하게 되며, 구원 계획도 차질을 빚게 된다. 옷감을 짤 때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며 서로 보완하듯이, 모든 성공적인 삶에도 고통의 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현실의 고통이 인간의 삶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이 고통을 통해서 완성에 이른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으며"(필립 1, 29)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2 디모 2, 11-12)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순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신비체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구원 사업을 마치셨다. 십자가 아래에는 너무도 상심하여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도 힘들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서 계신다. 이 여인이 바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요 동시에 구원받는 이들의 어머니이시다. 십자가의 피는 오늘날 온 세상에 아낌없이 뿌려져 있으며 결국 이 피로써 세상은 구원받았다. 그런데 이 피는 당초 이 여인의 혈관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이제 이 고귀한 성혈은 신비체를 통하여 흐르며 신비체의 모든 빈자리를 생명으로 채워 넣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은총을 누리려면 성혈의 흐름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가를 올바로 이해해야만 한다. 고귀한 성혈이 영혼 안에 흘러 들어오면 영혼은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그리스도이시다. 즉, 베들레헴이나 타보르에서 드러나신 환희와 영광의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 가신 고통과 희생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면을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의 취향대로 그리스도 안의 어느 한쪽 면만을 골라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모님은 환희속에서 주님을 잉태하시던 순간에 이미 이 사실을 온전히 깨닫고 계셨다. 성모님은 당신이 오직 기쁨의 어머니로서만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슬픔의 여인이 되리라는 것도 아셨다. 그러나 성모님은 언제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 왔으므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렇듯 성모님은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충분히 알고 계셨으므로, 당신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이 드러내는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아드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은 물론 고통도 기꺼이 함께 하셨다. 그 순간 두 분의 성심은 하나가 될 만큼 온전히 일치하여 신비체 안에서 신비체를 위하여 두 분의 맥박은 함께 고동치고 있다. 성모님은 모든 은총의 중재자, 곧 우리 주님의 지극히 고귀한 성혈을 받아 담으시고 나누어 주시는 영신적 그릇이 된 것이다. 우리는 성모님의 자녀로서 성모님이 보여 주신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어느 정도 쓸모있는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면 그가 예수 성심께 얼마나 가까이 일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성혈의 원천은 예수 성심이며, 예수 성심과 일치함으로써 예수 성심으로부터 성혈을 퍼 올려 다른 영혼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생애의 두 요소(고통과 영광) 중 어느 한쪽 면만을 받아들여서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일치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성심 성혈과의 일치는 오직 당신 생애의 모든 요소를 동시에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왕의 모습은 환영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외면한다면, 이는 헛되고 가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이 두 다른 모습이 합하여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고통의 인간 예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구원 사업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질 영광도 차지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므로, 고통은 언제나 하나의 은총이다. 고통은 (신체적으로) 병을 고쳐 주거나, (정신적으로) 힘을 북돋아 준다. 고통은 결코 죄에 대한 벌이 아니다. "고통은 병을 고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은 말했다. 한편, 우리 주님이 겪으신 고통은 죄 없는 사람과 성스러운 사람들의 몸 안으로 흘러 넘쳐 들어가 그들이 더욱 완전히 그리스도를 닮도록 측량할 수 없는 특전을 베풀어 준다. 이처럼 고통을 함께 섞고 나누는 일은 모든 고행과 보속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사람 몸 안에서 피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왜 고통이 필요하며 그 역할이 무엇인지 더욱 뚜럿이 알 수 있다. 손목에서 뛰고 있는 맥박은 바로 심장의 고동이다. 심장으로부터 흐르는 더운 피가 손안에 흐르는 것이다. 즉, 손은 몸의 일부로서 몸과 하나를 이루고 있다. 손이 차가워지면 혈관이 수축되어 피의 흐름이 지장을 받게 되며, 손이 더욱 차가워지면 동상에 걸리게 되고 세표가 죽기 시작하여 손은 생기를 잃고 쓸 수 없게 된다. 그런 손은 죽은 것과 같아서 그대로 두면 결국 썩어서 잘라 내야 한다. 이와 같이 동상에 이르는 여러 단계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신앙 상태를 잘 보여 준다. 신비체의 지체가 거기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성혈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지면, 썩어서 잘라내야 하는 팔다리처럼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동상에 걸린 손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물론 다시 생기를 찾게 하기 위하여 피를 순환시켜 주어야 한다. 수축된 혈관에 피를 밀어 넣는 일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것은 바로 희망과 기쁨의 징조이다. 신앙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실상 동상을 입지 않은 팔다리와 같다. 설사 다소 차가운 상태에 있는 신자의 경우라도 대부분 자만심 때문에 자신들이 동상을 입었다고 여기는 일이 거의 없다. 이들은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만큼 주님의 성혈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억지로라도 밀어 넣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의 성혈이 흘러 들어가면서 이들의 오므라진 혈관을 억지로 넓히게 되므로 고통이 따른다. 이것이 바로 삶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가지는 이러한 의미를 알게 된다면 그 고통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내 가까이 현존하심을 느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겪어야 할 고통을 모두 겪으셨다. 당신이 받아야 할 고통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다 받으셨다. 그렇다면 주님의 고통이 다 끝났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머리로서의 고통은 끝났다. 그러나 몸의 고통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몸의 고통을 아직도 겪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한 당신의 속죄 행위에 우리도 함께 참여하기를 바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함께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이므로, 머리가 겪는 고통을 지체들도 당연히 참고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성 아우구스티노 / St.Augu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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