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미정에 부는 바람

작성자석염|작성시간26.06.19|조회수46 목록 댓글 2

채미정에 부는 바람

                                                                                             김 선 구

 성삼문이 읊었다는 시 한 구절을 되뇌어본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주려 죽을망정 채미(採薇)도 하는 건가... . 이제란 백이와 숙제를, 채미란 고사리를 캐먹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의 고대왕조 상나라가 주나라 무왕에 의하여 멸망하자 상나라 고죽국의 왕자였던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으로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굶어죽었다는 고사를 남기고 있다. 백이와 숙제를 충절의 표상으로 삼는 이유이다.

 금오산인(金烏山人)으로 알려졌던 야은 길재의 처세에서도 백이숙제에 비견할만한 행적을 남겼다. 고려왕실에서 성균관의 문하주서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명분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고려가 망하자 고향 땅 금오산 기슭에서 은둔생활로 일관했다. 새 왕조 조선이 건국 된 후 태상박사라는 벼슬을 내려 출사할 것을 요구했고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세워 거절하고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새 왕조를 거부한다는 명분으로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에도 초연하게 대처했다. 그러한 그의 충절과 학문을 우러러 조선 영조 때에 이르러 후학들이 금오산 아래에 스승을 추모하는 기념관을 건립했다. 채미정(採薇亭)은 기념관을 대표하는 건물로 마당 가운데에 세우어진 정자이다. 정자이름에 백이숙제의 행적을 새기고 있다.

 얼마 전 우리는 구미의 금오산 일원으로 기행을 다녀왔다. 금오산은 구미가 자랑하는 명산이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 내리다가 도중에 동쪽으로 금오지맥을 형성하고, 낙동강 변에 거대한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산을 만들었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 크게 근본이 되는 산이란 뜻이었다. 후에 아도화상이 황금빛 까마귀가 저녁노을을 안고 산 속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고 고쳐 불렀다한다. 사람들은 이 산의 모습을 누워있는 부처의 모습에 비유하기도 하고, 산봉우리는 귀봉(貴峰), 필봉(筆峰), 적봉(積峰) 등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신령스런 이름들이다. 이러한 산세가 주변 고을의 번영과 인재들을 낳게 하는 모체가 될 것을 기대했을 것 같다.

 우리일행은 먼저 금오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서 이룬 금오지(金烏池) 주변을 산책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신록의 아름다운 숲을 배경으로 산진도 찍고 대화도 나누고, 수면 속에 잠긴 금오산의 위용을 감상하기도 하였다. 멀리 보이는 금오산의 수려한 모습이 무언의 메시지를주는 것도 같고, 청명한 날씨가 봄의 향연이라도 베푸는 듯 했다.

 이어서 우리는 길재 기념관과 성리학 역사관을 둘러보았다. 성리학 역사관은 길재의 공적과 조선 성리학의 역사와 의미를 재조명하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자료에서 이색과 정몽주를 위시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이퇴계, 이율곡 등 우리들 귀에 익은 성리학자들의 이름과 성리학의 맥을 이은 도학의 계보를 읽을 수 있었다.

 야은 길재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은의 한사람으로 알려졌다. 모두가 성리학에 뛰어난 학자들이었다. 이색과 정몽주의 맥을 이은 길재가 선산(구미의 옛 지명)에서 후학들을 길러 냄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게 된다. 이러한 시류에 힘입어 낙동강의 중류지역에 뿌리를 내린 성리학은 상류와 하류로 퍼져나가 영남지역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 “조선선비의 절반이 영남에 있고, 영남선비의 절반이 선산에 있다.”고 했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성리학은 조선선비들의 정신적 지주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었다. 또한 조선 오백년의 역사 속에 서원과 선비라는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 최근 소수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 이러한 토대위에 이룩된 것이 아닐까한다. 이 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이가 안향이다. 그 업적을 기려 그의 고향인 순흥 땅에 최초로 서원이 세워졌다. 그 여파가 확산되어 전국에 많은 서원들이 세워졌고, 서원을 중심으로 선비문화가 꽃을 피웠다. 

 채미정은 바로 금오산 정상과 마주하는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뒤편에는 길재의 초상을 모신 경모각과 유허비각이 있고, 좌측에는 구인재라는 휴식공간을 거느리고 있었다.  채미정 기둥에 기대어 서니 서늘한 바람이 나그네의 심신을 위로하듯 주위를 감돌았다.  길재가 심은 도학의 뿌리가 팔도로 뻗어나가 꽃을 피웠고, 그 열매가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올랐음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구인재의 난간에 앉아 금오산 상봉을 올려 다 보았다. 달이 걸려 있다는 뜻의 현월봉이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수려한 풍광을 자아냈다. 서늘한 바람이 주위를 감돌았다. 담장 너머 개울에는 맑은 물이 흘러내렸고, 이 물이 금오지에 모였다가 다시 금오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금오산의 정기를 머금고 흐르는 물길, 선비들의 지조를 싣고 흐르는 물길이란 생각에 나의 관심도 물길 따라 낙동강으로 이어졌다. 강을 거슬러 상주, 문경을 거쳐 안동으로, 다시 강릉으로 이어졌다. 도산서원에서 퇴계를 만나고, 오죽헌에 가서 율곡도 만났다. 이 두 사람은 조선 성리학에 양대산맥을 이룬 분들이다. 이들이 편 성리학의 이론인 주리론과 주기론이 아직도 후학의 입에 오르내리며 학문적인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채미정에 부는 바람 속에 성리학의 역사와 그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늘도 채미정에는 맑은 바람이 불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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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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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푸른숲 | 작성시간 26.06.19 금오산과 채미정에 다녀온 기억이 생생해집니다.
  • 작성자석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9 금오산은 꿈의 고향. 도선굴과 대해폭포를 지나 정상에 도전해 볼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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