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매월 글 쓰는 코너

손 원 수필(고갯길)

작성자sunbee(손 원)|작성시간26.06.18|조회수42 목록 댓글 0

                           고갯길
※ 상록수필 제13호 특집기고 예정
                                                  손 원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먹을 것이 떨어져 가장 힘겨운 시기를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고개는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어려움과 시련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몇 번의 고비를 넘는다. 힘든 시절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길이 열리듯, 고개는 늘 넘어야 할 대상이면서도 희망을 품게 하는 존재였다.

길에는 수많은 고갯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마다 사연이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에는 전설이 남고, 눈물이 흐른 자리에는 노래가 태어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서 고갯길은 삶의 애환을 가장 진하게 담고 있는 풍경 가운데 하나다.

어린 시절 우리 집 툇마루에 앉으면 멀리 봉우재 고개가 보였다. 산등성이를 타고 이어지는 산길은 중간쯤에서 숲에 가려졌다가 다시 고갯마루로 이어졌다. 그 길은 어머니의 친정길이었다.

어머니는 스무 리가 넘는 산길을 걸어 시집오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먼 길이다. 자동차도 흔치 않던 시절,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 낯선 집으로 들어온 젊은 새댁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머니는 종종 고개 너머 이야기를 하셨다. 친정마을의 재실, 정자나무 놀이터와 어린 시절 이웃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는 그 산길로 친정을 찾은 적이 거의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생겼고, 버스를 갈아타면 갈 수는 있었지만 오히려 길은 더 멀어졌다. 편리해졌다고는 해도 오십 리를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종종 툇마루에 앉아 봉우재를 바라보셨다. 말없이 먼 산을 응시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시선 속에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고갯길은 단지 산을 넘는 길이 아니었다. 고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부모 형제를 향한 마음이 흐르는 길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의 노래에는 유난히 고개가 많다. 수많은 대중가요 속에 등장하는 고갯길은 하나같이 이별과 기다림, 사랑과 그리움을 품고 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전쟁이 남긴 비극을 노래한다. 사랑하는 이를 강제로 떠나보내야 했던 시대의 눈물이 그 고개에 서려 있다. ‘비 내리는 고모령’에는 고향을 떠난 이의 망향이 배어 있고, ‘추풍령’에는 세월의 풍상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문경새재’는 너무 높아 넘지 못하는 기다림의 상징이 되고, ‘도라지 고갯길’에는 첫사랑의 추억이 피어 있다.

노랫말 속의 고개들은 모두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은 수많은 고개를 넘는 여정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역사도 그러했다. 영남과 기호를 잇던 추풍령, 조선시대 선비들이 한양으로 오르내리던 문경새재, 백두대간의 수많은 재와 령들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었다. 장사꾼도 넘고 과거 보러 가는 선비도 넘었다. 전쟁터로 향하는 군사도, 가족을 만나러 가는 백성도 그 길을 걸었다. 웃음도 울음도 모두 그 고갯마루를 지나갔다.

고개에 오르면 늘 숨이 찬다. 오르막은 힘들고 다리는 무겁다. 그러나 정상에 서면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보이고, 앞을 바라보면 또 다른 길이 보인다. 그래서 고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젊은 날에는 가난이라는 고개를 넘고, 중년에는 생업이라는 고개를 넘는다. 자식을 키우며 부모 노릇의 고개를 넘고, 노년에는 건강과 외로움이라는 고개를 만난다.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나타난다. 어쩌면 인생이란 평탄한 길보다 고갯길이 더 많은 여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를 성장시킨 것은 평지가 아니라 고갯길이었다. 힘겨웠던 시절,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눈물로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오르막이 없었다면 정상의 풍경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나도 인생의 후반부에 서 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크고 작은 고개들이 아련한 능선처럼 이어져 있다. 어떤 고개에서는 웃었고, 어떤 고개에서는 울었다. 하지만 그 모든 길이 모여 오늘의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다.

문득 툇마루에 앉아 봉우재를 바라보시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 시선 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생 넘어온 수많은 인생 고개에 대한 회한과 감사도 함께 담겨 있었으리라.

고개는 넘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리 높고 험한 고개라도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마루턱에 이른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과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고갯길을 오른다. 숨이 차고 발걸음이 무거워도 멈추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고갯길은 시련인 동시에 희망이며, 끝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