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산
김대희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산을 찾든 찾지 않든, 산은 늘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삶이 순탄하던 시절에는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산은 그저 가까이에 있는 풍경이었고, 주말이면 가끔 오르는 나들이 장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삶이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붙였을 때, 비로소 산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오래전 큰 병을 얻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병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병원 복도와 병실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전부인 날들이 이어졌다. 항암치료가 시작되자 몸은 급격히 쇠약해졌고 마음마저 무너져 내렸다. 거울 속에는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빠져버린 머리카락, 핏기 없는 얼굴, 생기를 잃은 눈빛. 수없이 하늘을 원망했다.
“왜 하필 나일까?”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사랑했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이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두려움은 더욱 깊어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 둔 채 떠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다.
어느 날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무작정 동네 산을 찾았다. 두건으로 머리를 감싼 채 천천히 산길에 들어섰다. 발밑의 흙길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밤새 내린 이슬이 풀잎 끝에 맺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은 금빛 물결처럼 숲속을 채우고 있었다. 이름 모를 새들은 맑은 소리로 노래했고,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며 조용한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오랜만에 맡는 숲의 향기가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흙냄새와 나무 향이 뒤섞인 공기는 병원 소독약 냄새에 지쳐 있던 마음을 조금씩 어루만져 주었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며 숨이 찼고 몇 번이나 쉬어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걷던 중 산길 옆에 핀 작은 고구마 꽃을 발견했다.
작고 여린 연보랏빛 꽃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척박한 흙길 가장자리에서 꿋꿋하게 피어난 모습이 마치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그 순간 잊고 지냈던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조금 더 오르자 가족과 함께 산을 찾았던 기억들이 떠 올랐다. 아이들과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하는지 경쟁하며 웃던 일,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행복해 하던 순간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힘들고 외로운 시간 속에서도 내 곁에는 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산길은 점점 가팔라졌지만 숲은 더욱 깊어졌다. 울창한 나무들이 만든 초록터널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시원한 숨결을 불어 넣었다. 바위 틈에핀 들꽃들은 저마다의 색으로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었다.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푸른 나무들이 겹겹이 이어져 물결처럼 출렁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높았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자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병이 내 삶의 끝은 아니라는 것을
아직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있고, 감사해야할 날들이 남아 있으며, 다시 꿈꾸어야 할 내일이 있다는 것을 .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희망이 정상에서는 선명하게 보였다.
그날 이후 자주 산을 찾았다. 치료가 힘들 때도, 마음이 무너질 때도 산은 늘 같은 모습으로 맞아 주었다. 봄이면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했고 ,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뜨거운 삶의 열정을 보여 주었다. 가을에는 붉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운 이별을 가르쳐 주었고, 겨울에는 하얀 눈꽃이 시련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을 보여 주었다.
산은 삶을 가르쳐 주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 걸음씩 걸어야 한다는 것,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긴 겨울이 찾아와도 봄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산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 산은 가장 높은 산도 아니고 가장 유명한 산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나를 품어 주었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건네주었던 산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해 준 곳,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해준곳.
오늘도 그 산을 치유의 산이라고 부른다.
2026. 0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