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인상
(김 규 율)
1.이웃이 생겼다. 자주 가는 산책길에서 만난 돌로 만든 사람이다. 박물관 뒤 언덕에 망주석인지 돌장승인지 알 수 없는 석인 무리가 자리를 잡았다.
2.백 개도 훌쩍 넘을 듯하다. 어느 기업가로부터 기증받은 석인상을 박물관에서 모아 전시 공원을 만들었다. 나는 이사 들어온 이웃이 궁금한 마음에 자주 기웃거린다. 여기 석인상은 이목구비나 생김새, 표정이 제각각이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낯이 익다. 묵묵부답 표정이 없는 석인상을 보면 왠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빠져든다.
3.언덕을 따라 작은 성을 여러 개 쌓듯 돌축을 낮게 둘러쳤다. 석인상은 무리를 여남은 개로 나누어 각각의 성채라도 된 듯 축대 위에 들어섰다. 덩치가 사람 키만 한 것부터 작은 원숭이만 한 것까지 가지가지이다. 큰 석인상은 두 개가 하나의 무리가 되는가 하면, 큰 것과 작은 것이 어울리기도 하고, 어떤 곳은 석인상 열 개 정도가 뭉쳤다. 크기, 쓰임새, 돌의 재질, 오래된 정도 등을 두루 반영해서 자리 잡은 듯하다.
4.유유상종이라 했던가. 나는 살면서 생각이나 사는 정도가 비슷하다고, 취미나 하는 일이 같다는 이유로 사람을 구분 짓지는 않았는가. 얼마나 자주 무리를 이루었고, 알게 모르게 다른 쪽을 배제하지는 않았는가. 때로 내가 그 모임에 끼지 못할까 싶어 마음 졸이기도 했다. 어디에도 들지 못한 사람의 입장까지는 생각 못 했다.
5.어디서 무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다. 석인상들은 하나같이 입이 무겁다. 지체 높은 이의 무덤 앞을 지키던 문인석·무인석이었는가. 마을을 수호하고 이정표 역할을 하던 돌장승일까. 풍수 액막이로 세운 것일 수도 있겠다. 소용을 다 하고서도 여기에 모여 그다음 쓰임을 생각하는 모습이다. 그 앞에서 나는 백수의 쓸모를 가늠해본다.
6.석인상은 대체로 남녀 한 쌍을 이루었다. 둘은 왠지 닮았다. 다른 것끼리는 의복이나 얼굴, 표정 하나까지 똑같은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기 석인상 모두는 결국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하나의 석인상이 다양한 옷을 입고 각기 다른 표정으로 우리 앞에 선 건 아닐까. 날마다 옷을 바꿔입어도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듯이, 몇 개의 돌로 갈라지고 표정을 바꾼다 해도 모두가 석인상이라는 이름 앞에 공평하지 않은가.
7.오래전 눈 밝고 사려 깊은 장인이 있어 돌 속에 잠든 석인상을 꺼낸 것이리라. 석인상을 만든 장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석인상은 장인을 닮았을 것이다. 최대한 겁을 주려는 표정 뒤에는 인심 좋은 이웃집 아저씨 얼굴이 비친다. 입꼬리를 올리거나 내리기도 한 얼굴도 있다. 익살과 근엄을 오가는 얼굴까지 갖추었다. 석인상은 지켜내야 할 그 무언가를 위해 타고난 단 하나의 표정으로 불려 나왔을 것이다. 지방에서 나랏밥을 먹을 때 나는 몇 번이나 얼굴을 바꾸었나. 가면 뒤에 숨은 일은 없었는가. 약하거나 강한 자를 가려가며 표정을 달리하지나 않았을까. 생계형 감정노동이었노라고 항변하고 싶은 건 아닌가.
8.수백 년, 천 년이 되었을까. 석인상은 어느 봉분이나 사찰, 마을 입구에서 오직 한 곳만 바라보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을 것 같다. 온갖 비바람, 거친 눈보라를 오직 몸으로 받아냈다. 온몸을 덮은 푸른 이끼가 검은 무늬로 살에 박일 때까지 삶의 무게를 떠받치고 예까지 왔을 것이다. 석인상 앞에서 나의 인생은 얼마나 치열했는가 되짚어 본다.
9.오랜 세월 만나는 사람들 얼굴이 수없이 바뀌어도 석인상의 일은 흐려질 수는 있어도 끝나지는 않았다. 어떤 때는 까치가, 또 어떤 날은 까마귀가 어깨에 앉기도 했다. 철없는 사람들이 코나 머리를 만져도, 기대거나 걸터앉아도, 그보다 더한 수모를 줘도 내치거나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나마 고단한 석인상 가까이 멧비둘기가 찾아와 구구절절 살아온 얘기를 해 줄 때는 외롭지 않았으리라. 해마다 뻐꾸기가 울어서 꽃을 피우니 온 세상이 환해졌다.
10.내 뜻대로 나지 않은 이상 마음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누군가는 나를 지켜보고 내게 기대어 힘을 얻으리라는 생각에 발밑에 남은 힘까지 끌어올려 버티었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산천이 바뀌고 변화의 위기가 닥쳐 마침내 지킬 대상도 사라졌으리라. 길을 잃고 황망하던 날 밤 낯선 사람의 손에 멋대로 들어내어지고 옮겨졌을 수도 있다. 그렇게 백 개의 돌 사람 하나하나의 사연은 끊어지고 희미한 풍문으로만 남았다. 밀려난 석인상은 백날 밤낮으로 풀어내어도 남을 이야기를 속으로 삭이는 듯 초점 없는 시선으로 먼 산을 바라본다.
11.이곳 석인상은 지금 새로운 삶을 맞이하고 있다. 이 자리를 석인상의 은퇴자 마을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시작하는 자리가 아닐까 믿어본다. 할 일이 없어서 일을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혹시 아는가. 집에서는 목석이라는 소리를 줄기차게 들어온 사람이 석인상을 보고 위안 삼을지. 그 사람이 친구 하자고 할지.
12.석인상과 눈을 마주친다. 백 년, 천 년의 눈동자가 고작 한 갑자를 살아낸 사내에게 말을 건다. 알아들었다고, 그렇게 살겠노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목울대가 뻑뻑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