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토론 작품입니다.

작성자임두호|작성시간26.06.13|조회수43 목록 댓글 0

위리안치 나무

 

 

임두호

 

1, 주말 텃밭 가는 길섶, 험상궂은 가시로 무장한 울타리가 있다. 철옹성을 방불케 하여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 보인다. 그 울타리는 복숭아나무를 보호하는 탱자나무이다. 날카로운 가시는 맹금류도 범접할 수 없어 참새들의 안전한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울타리를 마음대로 들락거리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2, 탱자나무가 옛 유명 인사 유배지 울타리로 심어졌다 하여 그곳을 한번 답사해 보고 싶었다.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가 고희를 맞았으니 제주도 여행을 한번 다녀오자 하여 비행기에 올랐다. 꼭 한번 가 보고 싶었던 곳, 조선 후기 대학자 추사 김정희 선생 유배지가 있어 기대가 컸다.

 

3, 서귀포 대장읍, '추사 김정희 선생 유배지 가는 길' 표지판이 반갑게 맞이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는데 상상으로 그려 본 곳이 아니어서 의아했다. 녹음방초 우거진 외진 곳에 허름한 초가집 한 채뿐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빗나갔다. 주변이 잘 정리된 환경에 현대식 추사관 건물 한 채와 검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나지막한 초가집 몇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4, 그곳은 선생이 8여 년이나 머물며 세한도를 그렸던 곳이 아니던가. 공자의 논어에서 '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 날씨가 추워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라는 글을 인용하여 그린 '문인화'이다. 그림에 허름한 집 한 채와 고목 4그루만 그려져 있다. 고목 이름이 소나무와 잣나무라고 하는데, 추사관 주변에 자라고 있는 나무는 바닷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곰솔이었다. 이왕이면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어 놓았으면 세한도 이미지와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 전시된 그림에 '우선시상藕船是賞'이란 글과 선생의 호 '완당' 아래 낙관이 찍혀 있다. 억울하게 감금된 스승을 잊지 않고 귀중한 서적을 보내 준 제자 우선 이상적에 크게 감동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으면, 풀 한 포기 없는 땅 위에 봉창이 하나뿐인 초가집 한 채와 고목 4그루로 표현했을까. 선생의 모습이 그림 속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전시된 선생의 다른 작품은 해독에 한계를 느껴 해설사를 찾았으나 근무하지 않아 아쉬웠다. 유적지에는 그 역사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는 해설사가 근무하는데, 코로나 질병이 막바지로 끝나가는 시기였으나 조심하는가 싶었다.

 

6, 고샅길 안쪽에, 추사 선생이 거처했던 나지막한 초가집 몇 채가 마당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다. 방 안에는 선생이 학동들을 가르치는 조형물을 배치하여 놓았다. 나지막한 초가집에서 어렵게 지냈을 선생 모습이 떠올라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거처가 열악한 환경임에도 학동들을 가르치는 선비의 모습에 저런 분이 무슨 큰 죄를 지었을까 싶었다.

 

7, 거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둘러쳐진 울타리는 어떤 나무일까. 초가집 둘레에 쌓아 놓은 검은 돌담 안쪽에 날카로운 가시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졌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직감이 왔다. 역시 주말 텃밭 길섶 복숭아나무 지킴이 탱자나무였다. 험상궂은 가시가 얼마나 엉켰는지 그것을 헤치고 담 넘어 도망가기란 어림도 없어 보였다. 심지어 먼지 하나도 담장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8, 고을 수령이 감시자를 배치하여 독수리 눈으로 지키도록 하였을 터인데, 무엇이 부족하여 가시투성이 탱자나무 울타리까지 쳐 놓았을까. 추사 선생에게는 그 가시가 심장을 찌를 만큼 참담하였으리라. 더욱이 아버지 김노경 아들이라는 이유로 연좌제로 유배되었다 하니···. 옛 조선시대는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그 아들까지 죗값을 치르도록 한 제도가 이해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9, 추사 선생에 비하면, 주말 텃밭 길섶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재잘거리는 참새가 훨씬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숭아나무에 앉아 놀다가 언제나 가시울타리를 벗어나 창공을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으니까. 긴 세월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혀 외로움과 고통의 마음을 담은 그림을 그렸을 유배지를 둘러보며, 내 일생에 그런 경우가 하루라도 있었는지 회상해 보았다.

 

10, 나의 의지대로 일정한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던 곳은 딱 한 곳이 있었다. 무슨 죄를 지었거나 아버지와 관련하여 연좌제로 갇혀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청년 시절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국방의무를 할 때였다. 일정 기간, 정해진 병영 범위를 마음대로 이탈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경계 둘레에 철조망이 설치된 담장은 있었으나 탱자나무 울타리는 없었다. 그 담장은 부대 영역 보호를 위해 설치한 경계용 지킴이였다. 담장 옆 초소에서 파수꾼 역할을 하였을 뿐 두려움을 느끼며 감금된 곳은 아니었다.

 

11,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의 말을 되새김해 보았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 후세인이 둘러보는 추사 유적지에 심어진 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라의 간섭과 신체 구속 없이 산자 수려한 곳에서, 백성들의 추앙을 받으며 후학을 양성한 선비가 있었다. 조선 성리학의 핵심 인물인 퇴계 이황 선생이 거처했던 곳에 제자들이 도산서원을 짓고 경내에 회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학자수로 알려진 나무를 심어 선비의 표상으로 늘 우러러보았으리라.

 

13, 학동들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한 선생의 고고함을 상징하는 나무 한 그루 정도 심어 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당시는 어림도 없었겠지만, 후세인이 바라보는 현세에 선생의 선비 정신을 기렸으면 하는 바람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회화나무는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자유분방한 모습이 아니던가. 수년을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면서 회화나무를 얼마나 그리워하였을까. 그 애절한 마음을 지금이라도 헤아려주는 배려가 있었으면···.

 

14, 대구행 비행기에 올라 작은 유리창으로 선생의 유배지를 가늠해 본다. 주말 텃밭 길섶에 참새들이 자유롭게 들락거리는 탱자나무와 추사 선생 유배지 탱자나무가 겹쳐 어른거린다. 같은 나무이지만 위리안치 나무 모습이 왜 이렇게 마음을 무겁게 할까.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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