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나라, 조선.. 조선시대는 한 남자가 여러명의 여인을 처첩으로 거느릴수 있는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아니.. 뭐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일부다처제라기보다는 '일부처첩제'라는 표현이 더 적당한것 같다. 본처는 한명만 거느릴수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첩으로 불리었으니. 이 '처첩'간의 차별은 아주 확실했는데, 아마도 남성중심적인 조선사회에서 본처의 지위만은 확실하게 보장해주면서.. 어느정도의 합리화를 한것 같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여러명의 여자들을 거느리는 대신에 본처 한명의 지위는 확실하게 보장해준다.. 이런식으로 여자들과 나름의 합의를 했달까; 정확한 어휘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어쨋든 뭐.. ㅎ 평소에 '조선왕실','내명부','후궁' 이런것에 관심이 많아서 조선시대 왕의 '첩','소실' 에 해당하는 후궁에 대해서 글을쓸까한다^^
당시 조선시대 왕궁내에는 '내명부'라는것이 존재했는데, 이 내명부의 수장은 왕의 정실부인인 중전이었다. 품계를 초월하는 무품으로, 모든 내명부를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중전아래로 정1품,종1품,이런식으로 아래로 나아가 종9품까지의 품계가 있는데, 정1품에서 종4품까지는 왕의 후궁들이 품계를 받았고, 그아래로 정5품은 상궁,상의, 그리고 종9품까지는 일반궁녀인 '나인'들이 품계를 받았다. 후궁의 품계에 해당하는 정1품~종4품까지의 품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1품 빈 (흔히들 많이 알고있는 희빈,숙빈하는 명칭들도 모두 정1품 빈에 해당한다.)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
후궁중 가장 높은 정1품 '빈'은 중전다음으로 내명부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으며, 왕이 총애하는 후궁이라고 해도 정1품 빈의 첩지를 받기는 힘들었다. 조선 왕조 초기, 성종때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전에는 후궁첩지가 남발해 많은'빈'들이 있었으나, 경국대전 완성 이후부터는 '빈'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것을 알수있다..
여기서, 승은후궁과 간택후궁,그리고 그 차이에 따른 품계상승속도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승은후궁이란, 말그대로 왕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된경우로 (승은을 입다라는것은 왕과 동침을 한것을 말한다) 보통 왕의 침소인 대전의 지밀나인들이 승은을 입어 후궁반열에 오르는경우가 많았다. 간택후궁이란, 왕실에서 대비나 대왕대비가 명문가의 여식을 직접 간택하여 후궁으로 들이는것을 말하며, 이 승은후궁과 간택후궁은 대우나 품계가 진봉되는 속도에 있어서 차별이많았다.
보통 궁녀에서 후궁이된 승은후궁같은경우에는, (보통의 경우에)승은을 입고 정5품 승은상궁(특별상궁)이 되고, 승은상궁인 상태에서 회임을 하거나 왕실에 특별한 행사가 있는등 어떠한 '명분'이 생기면 종4품 숙원의 첩지를 받고 정식후궁반열에 오를수있었다. (일반적으로 승은상궁에서 회임하면 숙원이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 만약 승은을 입었는데, 아이를 못가지거나 특별히 다른명분이없을경우에는 왕의 엄청나게 특별한 총애가 없는이상, 후궁은 되지못하고 계속해서 승은상궁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엄청난 행운으로 승은을 입어 승은상궁이되고, 또 행운으로 회임까지 하여 숙원이 된다고해도, 거기서 계속 품계가 올라가는 속도가 매우 더디고 힘들다. 당시 신하들은 특별한 명분없이 왕이 후궁의 품계를 쑥쑥올려주면, 그것에 대해서 반발했기때문에 왕 입장에서도 후궁들의 품계를 올려주고 싶다고 막 올려준게아니라, 특별한 명분, (보통 이 명분이 회임이다)이 있는경우에만 품계를 올려주었다.
그러니까 겨우겨우 숙원이 되었는데도, 더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하거나 갑자기 왕의 총애가 식게되면 더이상 품계가 올라가지못하고 숙원에서 멈춰버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숙원이 되어서도 계속 왕의 총애를 흠뻑받거나, 또다시 회임을 할경우에는 품계가 단계를 밟아 올라가게되는데, 그렇다한들 간택후궁에 비해서는 그 속도가 더딜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간택후궁같은경우에는 아주 좋은 집안의 여식일경우 '종2품 숙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종3품 숙용'의 첩지를 내려 입궁시키기때문이다. 종4품 숙원부터 시작하는 승은후궁들과는 달리 간택후궁들은 아예 첫 스타트 시점부터 승은후궁들보다 더 높은 품계인 종3품숙용또는 종2품숙의에서 시작하니 .. 후궁의 품계가 올라가는과정도 실제로 간택후궁들이 더 유리했다. 숙의로 들어가서 왕자녀 한둘만 생산해도 빈이 되는것은 금방이었다.
승은후궁의 진급과정이 아주 더디고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중종의 후궁 창빈안씨'이다. 창빈안씨는 승은후궁으로, 빈 칭호를 받았다고는 하나 그것은 나중에 자신의 후손인 '선조'에 의해서 품계가 상승된것일뿐,(선조는 창빈안씨의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아들이다) 중종후궁당시에는 2남1녀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종3품 숙용의 첩지만을 받은 상태였다. 나중에 왕이 된 선조가 자신은 왕인데 창빈안씨는 숙용에 불과한것에 불만을품고, 빈으로 올렸다고 실록에는 기록되어있다.
아무튼 후궁 진급이라는것은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에 따라 차별도 있었고, 사람들이 생각하는것만큼 '쑥쑥' 올라가는것도 아니었다. 아주 더디고 힘든 과정이었다.
(물론 숙종때 장희빈같은경우에는 숙원에서 소의로 바로 고속승진한 아주 특별한 경우이다. 그리고 아주금방 빈이되니..)
갑자기 문뜩 포스팅을 하다가 이런생각이든다. 많은 궁녀들이 모두 왕의 승은을 입기를 소망했으나, 막상 정말 승은을 입어 운좋게 후궁까지된다고해도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궁녀들의 시중을받으며, 자신의 독립된 처소에서 화려한 옷과 장식을 하고 왕의 여인으로써 호화롭게 살았다고는하나 정말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은 아니었을까. 왕 하나를 차지하기위해서 수많은 후궁들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했을텐데.... 정말 살벌했을것이다. 실제로 실록에는 후궁들의 질투,후궁들간의 암투와 관련된 여러가지 사건이많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그런 일에 연류된 후궁들을 '질투심많고 부덕한여인'으로 취급하고 칠거지악을 내세우며 질투심을억누를것을 강요했으나 솔직히 질투심이 안생겨난다면 그건 인간이아니질 않은가...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여자에게 희생만 강요했던게 바로 조선시대였던것같다. 왕의 후궁들도.. 총애를 받아 행복하게 산 후궁보다는 역사의 뒤편에서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산 후궁들이 더 많은것같다.,, 그리고 총애했던 후궁이라고 할지라도 왕이 죽고나면 수절하며 절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홀로 외롭게 늙어가야만 했으니... 후궁의 삶도 참 불쌍한것같다.
역사속에 숨겨진 여러 후궁들의 비화도 함께 적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는관계로 이상 포스팅을 마무리하겠다^^
출처: 희망 (augustbridge)님의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