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칭기스칸에 대하여(1162년 ~ 1227년 8월25일) 그도 기독교이었고, 그의 며느리중에 기독교인 많았다

작성자오흥복목사|작성시간11.04.21|조회수771 목록 댓글 0

 

천년동안 가장 위대했던 영웅 칭키스칸

 

2000년 밀레니엄 시대에 돌입하면서 워싱턴 포스트지는 서기 1000년부터 2000년대 까지 1000년동안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키스칸을 선정했다.

역사가와 비평가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키스칸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동서양을 자기집처럼 누볐던 마르코 폴로도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도 아닌 아시아의 최고별 칭키스 칸을 선정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우리는 1천년 전 지구를 지배하는 두 문명은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이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문명의 유럽은 고여있는 물과 같았다. 봉건 장원, 주교령, 귀족 영지 등이 모여 있는 곳일 뿐이었다. 1천년 전에는 아무도 유럽의 기독교들이 이 지구를 식민지화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모든 것을 뒤흔든 것이 완전히 새로운 제국의 출현이였다. 그것은 몽골제곡, 즉 칭키스 칸의 제국이었다'라며 선정의 이유를 밝혔다.

 

칭키스 칸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키스 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

그는 왕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태어난 신앙에 따라

스스로 맹세한 법을 지켰다.

게다가 강인하고, 지혜롭고, 부유했으며,

누가보아도 정이 많고 의로웠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자비롭고, 명예로웠으며,

그의 감정은 중심이 잡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집의 어떤 젊은 남자 못지않게

젊고, 생기있고, 강하며, 전투에서 앞서고자 했다.

그는 잘생긴 사람이고 운도 좋았으며,

늘 왕의 지위를 잘 유지하여

그런 사람은 달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고귀한 왕, 이 타타르의 칭키스 칸.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이야기에서....)

칭키스 칸 릉에 다녀오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영웅성과 호전성과 박력, 패기에 이끌려서 막연히 좋아했다.

그리고 몽골이라는 나라 보다는 내몽고를 선택해(접근성이 훨씬 좋았기에) 미시적으로는 초원과 사막을 보고왔다.

그리고 여행 중간에 중국인들이 '징키스 칸의 릉'이라고 하는 곳에 다녀왔다.

릉은 그져 상징일 뿐이다.

나는 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세계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다녀온 후 나는 한참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내게 몽골은?

내게 칭키스 칸은?

 

유목민을 따라 공부했다.

영화를 두편보았고, 책을 세권 읽었고, 다큐멘타리를 두세편 보았다.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알면 알수록 더욱 깊이 파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분이 해놓은 일이 너무 많아 그걸 다 정리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앎의 폭이 너무 좁아 과연 칭키스 칸에 대한 포스팅을  이상태로 할 수 있을까? 꽤나 고심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재밌는 옛날 이야기 해주듯이 그렇게 칭키스 칸을 다뤄보자"

 

이야기 할머니 옛날 이야기 시작합니다.

 

초원의 아들 테무친

 

시베리아와 몽골 초원의 접경지대에 오논 강변에 몽골의 작은 타이치 우드 부족장 예수게이가 살고 있었다.

예수게이는 메리키트 부족의 칠레두라는 사람의 아내 후엘룬을 납치해 자기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는 오른손에 검은 핏덩이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해가 1162년 말의해였다.

(오논 강변은 우리가 생각하는 넓은 초원지대가 아니라 시베리아와 가까운 삼림과 초원이 공존하는 스텝지역으로 몽골과 시베리아의 접경지대이다.)

 

 예수게이는 후엘룬을 납치한 후 타타르와 싸우러 나갔다가 '테무진 우게'라는 이름의 전사를 죽였다. 집에 돌아아 보니 아들이 태어나 있어 예수게이는 그 아들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후로 테무진이 잘 자랐으면 좋으련만........

테무진의 나이 9살때 후엘룬의 부족으로 테무진의 신부를 찾아 나섰다. 테무진이 처음으로 오논강변을 떠나는 여행이였다.

예수게이와 테무진은 어머니 후엘룬의 부족으로 가기전에 어느 부족에서 지냈는데 그 부족장에겐 딸 부르테가 있었다.

테무진과 부르테는 서로 좋아하여 두 아버지는 결혼시키기로 약조를 했다. 부르테는 테무진보다 몇살 위의 연상이였다.

테무진을 놓고 돌아가는 길 예수게이는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 당했다.

 

테무진이 오논강변으로 돌아갔을때 두어머니와 10살 미만의 형제들이 6명이 있었다.

그 후로 테무진은 타이치 우드의 부족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이 모두 테무진을 등지고 떠나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나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노예로 팔려가면서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지혜로운 어머니 후엘룬 덕분이였다.

그녀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가족 모두를 부양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을 하며 식물뿌리나, 자식들과 함께 사냥등으로 그들을 먹여 살렸다.

 

테무진 16세때 7년전 언약한 신부 부르테를 데려왔다.  그때 신부테는 선물로 검은담비 외투를 가져왔다.

이 검은 담비는 테무진에게는 아주 귀한 선물로 그에게 대단한 힘을 주게 되었다.

부르테와의 달콤한 신혼생활, 아마 이때 테무진은 처음으로 가정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맛보며, 이 생활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주변 정세는 그를 안락함속에 빠져있게 놓아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 후엘룬를 납치해온 원수를 갚으로 18년이 지난 다음 메르키트 족은 테무진의 아내 부르테를 납치해 갔다.

어쩜좋아...아버지의 과업?을 테무진이 갚게 되었으니.....

그래도 테무진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위대한 칸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영원한 안다 자무카

 

테무진이 부족에서 쫏겨나 가족끼리만 생활하면서 '자무카'라는 몇살 연상의 소년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자무카는 오논 강변 테무진의 가족 근처에 여러번 야영을 했으며, 그의 씨족 '자다란'은 테무진의 씨족과는 먼 친척이였다.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건 씨족이다. 가까운 씨족일 수록 유대관계가 깊고 서로 도우며 살아야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더 가까운 가족이 되고 싶었다. 형제처럼 되고 싶었던 것이다.

두사람은 두번이나 형제 관계를 맺는 의식을 거행했다. 의형제(안다)가 된것이다.

테무진과 자무카는 사냥과 목축, 낚시를 하면서 깊이 우정을 느꼈다. 


두 아이는 테무진이11살때 장난감을 서로 교환하면서 안다의 맹세를 하였다.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노루 수컷의 복사뼈를 주었고, 테무진은 자무카에게 복사뼈에 작은 쇳조각을 작아 넣은 것을 주었다.  다음해에는 어른들과 같이 화살촉을 교환했다. 자무카는 송아지뿔 두조각에 구멍을 뚫어 호각으로도 쓸 수 있는 화살촉이였으며, 테무진은 삼나무로 만든 화살촉이였다. 두사람은 호각 화살촉으로 다른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도록 비밀 교신을 하였다.  두번째 맹세의식에서는 영혼을 교환하기 위해 서로의 피를 삼키기도 했다. 테무진 평생의 유일한 안다가 바로 자무카 이고 테무진 최고의 라이벌이 바로 자무카였다.

훗날 부인 부르테를 찾아 오는데 도와준 사람도 자무카였고, 테무진이 칸의 자리에 오를때 그를 죽이려는 사람도 자무카였다. 하지만 역사는 한사람에게 손을 들어준다. 하늘은 위대한 영웅 테무진의 손을 들어 주었다. 자무카는 결국 테무진의 속에 죽게된다. 이때도 테무진은 자무카를 안다의 예를 다해 장례를 치뤄주었다.

 

배다른 형을 죽인 테무진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가는 부인이 둘 있었다. 테무진의 어머니 후엘룬과 소치겔

소치겔이 정식 부인이였는지에 대해선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소치겔은 아들 셋을 후엘룬은 아이 넷을 낳았다. 예수게이가 죽고 가족들은 부족이 떠난 상태에서 무척이나 힘겹고 빈곤하게 지냈다.

그런데 소치겔의 아들 벡테르는 테무진의 형이다. 그러니까 그 집안의 장남이였다. 

몽고에서의 장남은 가정에서 우리네와 같이 대단한 권위와 힘이 있었다. 아버지 다음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게이가 죽었기에 벡테르는 바로 가장이였다.

장남 벡테르는 먹는 욕심이 대단했다. 어머니들은 자식을 먹이기 위해 고기는 못먹고 풀뿌리로 생활하는데 벡테르는 툭하면 어머니들의 음식이나 다른 형제들의 음식을 뺏어 먹도 못해 훔쳐 먹기에 이르렀다. 벡테르와 지내면 그의 욕심과 탐욕으로 가족이 모두 굶어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에 테무진은 어머니 후엘룬에게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참아야한다였다.

그리고 그녀는 미녀 '알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알란은 몽골의 여자 조상으로 남편이 죽고 나서 양자로 들인 아들과 함께 살면서 아들을 몇명 더 낳았다. 이는 부양가족이 너무 많아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후엘룬이 나중에 장남 벡테르와 살아야 한다는걸 암시이기도 했다.

 

어느날 아들들은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테무진은 활솜씨가 좋은 카사르와 함께 벡테르를 사냥했다. 형을 죽인 것이다.

백테르는 죽으면서 "나는 너희 눈에 빠진 속눈썹, 너의 입안의 가시가 아니라, 내가 없으면 너희의 벗은 너의 그림자 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친동생 벨구테이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후엘룬은 즉시 알아차렸다. 그리고 분노로 인해 두 아들에게 크게 화를했다.

"살이자야. 살인자. 너는 내 뜨거운 자궁에서 나올 때 손에 피시덩이를 쥐고 나왔다. 너희들은 자기 태를 뜯어 먹는 들개와 같구나"

이일로 테무진은 형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반대로 가난하지만 죄인은 아니였던 테무진은 형제를 죽인 크나큰 죄인이 되어 쫏기는 신세가 되었다.

타이치우드족은 테무진을 벌하기 위해 잡아다 칼을 쒸우고 죽이려 했지만 테무진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그곳을 탈출 할 수 있었다.

 

칭키스 칸의 충실한 조언자 어머니 후엘룬과 아내 부르테

 

징키스 칸, 아니 몽골에서의 여성은 유교를 받아들인 중국이나 우리 나라와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물론 유럽도 여성의 지위가 높지 았았다.

유럽이나 중국인들이 몽골의 축제나 잔치를 보면서 놀라운 사실은 여성들도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면서 남자들고 함께 즐긴다는 것이다.

징키스 칸 또한 어머니 후엘룬과 부인 부르테의 조언을 꽤나 깊이 받아들였다.

 

부르테를 납치 당하고 찾아오는 과정에서 테무진은 안다 자무카의 도움을 받았다. 부르테를 되 찾아온 테무진은 자무카의 진영에서 지내고 있었다. 과연 이곳에서 자무카 밑에서 그와 함께 안락?한 생활을 하느냐? 아니면 독자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느냐에 대한 고민을 어머니 후엘룬에게 상의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부르테는 성난 목소리로 하늘에는 두개의 태양이 없듯이 자무카와 헤어져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우리의 세력을 갖자고 조언했다.  그날 밤 테무진과 그의 추종자들은  자무카에게서 몰래 달아났다. 이렇게 분열된 안다는 몽골 초원에서 20년간 대립했다.

 

테무진이 칭키스 칸에 오르고  텝 텡그리는 칭키스 칸에게 '영원한 푸른하늘'이 칭키스 칸을 사랑하며, 그를 세계적인 지도자도 만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칭키스 칸은 그를 믿었고 텝 텡그리는 그의 지위를 높이는데 단단히 몫을 했다. 칭키스 칸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텝 텡그리 또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칭키스 칸 다음가는 권력과 부를 가지게 되었다.

어느날 텝 텡그리의 일곱형제는 칭키스 칸의 형제 카사르를 때렸다. 카사르는 형 칭키스 칸에게 텝 텡그리를 벌줄 것을 요구했으나 혈육을 별로 신회하지 않는 칭키스 칸은 텝 텡그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오히려 텝 텡그리의 조언대로 카사르를 잡아 묶고 자신의 게르에 가두었다. 이일을 계기로 텝 텡그리는 더욱 오만해져 형제들 사이를 이간질했다. 칭키스 칸의 궁정에서 하루 떨어진 곳에서 막내아들과 함께 살고 있던 후엘룬은 이 소식을 듣고 검은 수레에 하얀 낙타를 묶고 달려 징키스 칸의 야영지에 도착했다. 칭키스 칸에게 몹시 화가난 후엘룬은 아이들을 키운 축 늘어진 젖을 꺼내 보이며 "이것을 보았느냐? 이것이 네가 빨던 젖이다.  너는 나의 탯줄을 갉아 먹고 나의 태를 씹는 짐승처럼 행동했다"고 비난했다. 칭키스 칸은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카사르를 풀어주었다

 

'칭키스 칸'이 되다

 

칭키스 칸이 자무카와의 세력 다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자신의 부하들에게 잡혀온 자무카를 보고 칭키스 칸은 자신의 장군을 배반은 부하들에게 사형을 내렸다. 그만큼 그는 의리를 중요시했다. 자무카에게는 다시 안다의 맹세를 되세기며, 함께 협력할 것을 제안했다. 자무카는 살아서는 칭키스 칸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역쉬 뛰어난 리더 답게 죽여달라고 말하며 "나를 죽여 그 죽은 뼈를 높은 곳에 놓아라. 그러면 내가 영원히 그대 씨를 보호해 줄것이고 복되게 해주겠다"고 마지막 유언을 했다.

이렇게 막강한 세력을 제거한 테무진은 더욱 강한 부족이 되어 몽골의  부족 하나 하나를 점령해 나갔다.

몽골은 아무리 유능해도 '쿠릴타이'라는 회의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칸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 드디어 1206년 부르칸 칸둔 서안 근처 오논 강변에서 쿠릴타이가 열렸다. 지금까지 초원에서 열린 쿠릴타이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쿠릴타이였다.

 

초원에는 풀을 뜯는 수만마리의 가축들은 축제(쿠릴타이)에 온 사람들에게 음식으로 제공되었으며, 손님들의 게르가 테무진의 야영지로 부터 몇 킬로미터 이상 늘어져있었다. 한가운데는 말총으로 만들 술데(영기)가 서 있었다. 낯에는 텝텡그리와 여러 샤먼들이 북을 치고 노래했으며, 사람들은 노래 부르며 씨름, 말경주, 궁술등으로 이루어진 나담축제를 벌였다.

이당시 테무진은 지금의 서유럽 정도 크기의 방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테무진은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사람들만의 칸이 아니라 초원 전체를 아우르는 '모전벽의 사람들'의 통치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새로운 제국의 이름을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로 지었으며, 혈통, 씨족, 부족에서 내려오는 세습적인 칭호를 없앴다. 한마디로 혈연, 지연, 학연를 배타한 공정한 정치가였다.(너무 부럽다눈..이느무 나라는 패거리 나라라...ㅠㅠ학연,지연,혈연없으면 출세고 나발이구,,,이대목에서 못가진자의 설움이 확 올라와 올컥 치미네...)

테무진은 구르 칸이나 타양 칸 같은 예전 부족의 칭호를 거부하고 '칭키스 칸(Chinggis Khan)'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몽골에서 친(Chin)은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다의 의미이며, 늑대를 가리키는 몽골어 치노(Chino)와 가깝기도 했다. 실제로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푸른늑대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칭기스 칸은 또 말하지만 학연, 지연, 혈연에 억매이지 않았다. 개인의 능력과 충성심이 최고의 잣대였다. 모칼리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는 고려인이라고 알려져있다. 고려의 천민 모칼리는 3대에 걸쳐 칭키스 칸을 위해 충성하다 과로사했다고 전해진다.

징키스 칸은 훗날 모칼리에게 금나라를 준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몽골에 의해 패망했다. 징키스칸은 모칼리에게 권황제로 내세우며 금나라를 지키도록했다. 너무 멋지잖아.....칭키스 칸

 

칭키스 칸과 위구르(중국 신장 자치구)

 

칭키스 칸은 시베이라 부족과 위구르인들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능력에 의해 선수를 발탁하는 공정한 사람으로 어느 집단에 대한 편견은 없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위구르에서 초원에서 볼 수 없었던 금속, 직물, 다양한 제조품, 진기한 물건 등을 보았다. 섬세하고 화려한 물건들은 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북방의 정벌은 수확할 물품이 모피와 킷털 밖에 없었기에  매우 대조적으로 이곳에 매력을 느겼다.

 

위구르족은 오아시스 지역에서 살고 있는 뛰어난 언어와 문화를 지닌 정착민이였다. 또한 칭키스 칸에게 스스로 복종은 맹세한 첫 민족이기도 했다.

위구르 칸은 몽골 왕궁으로 결혼식을 위해 오면서 금은보화 뿐만 아니라. 진주, 비단, 수단, 공단 등의 화려한 직물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 제국을 호령하는 몽골족은 지만 제조업이 없는 그들은 검소하고 가난했다.  친족은 바로 시민권을 의미했다.   결국 친족 관계로 확대되었다.

징키스 칸의 문자가 없는 몽골에 위구르족의 문자를 들여와  사용했으며, 정치에 중대사를 다루는 요직에도  많은 위구르인들을 배치했다.

 

실크로드(비단길)

 

비단길이라고 하니 중앙아시아 사막과 초원에 길이 있는, 아니 아스팔트의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무언가 길이 쭈욱 나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비단길은 길이 아니다. 다만 동양과 서양의 문물을 교역하기 위해 캬라반들이 다니던 루트를 실크로드라고 부르는데 이는 중국의 실크가 서양의 많은 곳으로 전해졌기에 명명된 이름이다.

넓은 의미의 비단길은 하나의 루트가 아니라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을 통과하는 서역북도와, 남쪽을 경유하는 서역남도, 이란이나 지중해 연안까지 연장하는 길, 북아시아 유목민들이 다니던 스텝지대, 남방의 남해제국의 해상루트 등이 있다. 중국의 황허강에서 둔황으로 부터 파미르 고원을 넘어 투르키스탄의 시장까지 이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낙타를 탄 캬라반들은 이 루트를 따라 중국에서는 비단과 종이를 , 서역에서는 보석, 옥, 직물, 철기, 유리공예품등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캬라반들은 늘 약탈을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실크로드를 다녔다. 징키스칸은 실크로드가 동서 교역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고 이곳의 안전을 보장해주었다. 캬라반이 사막 중간 중간에 쉴 수 있도록 숙소를 마련하고 낙타를 쉴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세금을 감면해 주었기에 당연히 교역은 증가했고 동서양은 활발히 서로가 서로를 알게되었으며, 상인을 보호해 주어 상인의 지위를 격상시켜 주었다. 

또한 무거운 동전 화폐에서 지폐로 바뀌며, 화폐 단위로 하나로 통일해 유통 시켰다.  경제를 부흥시켜, 국고의 안정도 꾀하며, 국민을 잘살게 해주는 금융, 통화 정책의 귀재였다.

 

언론을 장악한 정치인 징키스 칸

 

몽골에는 문자가 없다. 그들은 법령이나 전해야 할 일들을 구전으로 전하는 풍습에 의존했다. 그들이 문자가 없었던 이유는 이동민 그러니까 유목민이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문자가 있으면 기록해야 하고 기록은 책이란 유산을 낳는다. 늘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민족이 계속 기록을 해 책을 만들어 가지고 다닐 수 없는일. 그래서 그들은 일정한 음율을 만들어 전해야 하는 말들을 그속에 넣어서 노래처럼 부르면 전달했다.

 

징키스 칸은 요새 말로 입소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징키스 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일단 언론을 먼저 이용했다.  막강한 나라를 치기 위해 그는 주변 위성 국을 이용했다. 주변 나라를 잔인하게 짓밟음으로써 피난민들이 피난을 가면서 몽골군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지에 대해 떠들도록 만들었다. 기선을 제압하는 방법이다. 그는 싸우기 전에 미리 항복을 얻어내기 위해 일부러 더욱 무서운 존재로 소문이 날 수 있도록 행동했다. 더크게 소문이 나도록 더욱 희안하고 괴기 스럽게 몽골인이 입방아에 오르도록 조장했다.

하지만 징키스 칸은 제국을 통일해 나가면서 대단히 방대한 정보가 흘러나왔다. 또한 정주민을 보고 문자와 기록, 인쇄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했기에 중국에서 방대한 종이를 들여와 책을 편찬하고 그 책을 제국 전체에 배포 했다. 또한 위구르의 문자를 받아 들여 문맹을 퇴치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종교를 아우른 위대한 지도자 칭키스 칸

 

징키스 칸은 몽골인들 처럼  샤머니즘을 믿었다. 불교를 비롯해 힌두교와  제국을 통일해 나가면서 무슬림도 기독교도 받아 들였다.

그의 며느리 중에는 기독교인이 많았고, 측근들 중에는 무슬림들도 아주 많았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유일하게 내가 믿는 신을 모두가 믿어야 한다는 좁은 소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각자 믿는 신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도록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그는 제국의 지배자가 아니였다. 통치 안에서 자치를 강조한 영웅이였다.

특이한 점은  중국인의 사상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유교 사상과 도교의 사상은 칭키스 칸과 맞지 않았나 보다.

공자님과 징키스 칸은 친구가 될 수 없었나 보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비슈누와 시바신님도, 무함마드 알리님과도 친구가 되었는데....희안타...

아시아의 별이 지다. 징키스 칸의 죽음

 

1219년 토끼해에 출발한 칭키스 칸은 1220년 용의 해 봄에 호라즘 샤에 도착했다. 몽골족은 술탄을 물리치고 중앙 아시아를 샅샅히 정복해나갔다.

4년간 칭키스 칸은 중앙 아시아를 누비며, 인도와 송나라 영토까지 점령하고 싶었으나 지리와 기후 덕분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하고 초원으로 돌아온 징키스 칸은 쉬고 싶었지만 마음이 급했다. 벌써 그의 나이가 60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늦기 전에 탕구트를 치기로 결정했다.

탕구트와의 전쟁을 위해 고비 사막을 가로지르던 겨울 칭키스 칸은 좋아하는 야생마 사냥을 했다. 그가 탄 회식 말은 야생말들이 달려오자 놀래서 뒷걸음질쳤다.  말에서 떨어진 칭키스 칸은 그날 이후로 심한 열로 고생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밀어붙여 탕구트를 정벌했다. 탕쿠트 왕의 이름은 킹키스 칸에게 아버지 같았던 성산 '부르칸 칼둔'의 부르칸이였다. 칭키스 칸은 탕구트 왕에게 처형하기전에 이름을 바꾸라고 명령한 후 처형했다.

 

탕구트 원정의 최종 승리를 며칠 남겨놓고 죽었다.(1162년 ~ 1227년 8월25일)

평범한 수레에 탄 대칸은 주검의 행렬은 몽골로 출발했다.

칭키스 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아 너무도 말이 많다.

 

말에서 떨어진 부상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설....

타타르 족의 부인 예수이가 질속에 날카로운 장치를 해넣어 성교시 입은 상처로 죽었다는 설....등이다.

몽골비사도 이 부분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을 보면

'칸의 시신을 운구하던 자들이 도중에 마주친 모든 사람들,

다른 세계로 가거라. 그리고 그곳에서 너희들이 돌아가신 군주를 모셔라'라고 말하며 죽이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그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내세에서 그의 하인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칸이 타던 말들도 비슷하게 처리되었다.

 

칭키스칸은 청년시절 시련으로 단련된 곳 오논 강 근처에 안치되었다. 그후 다시 운구는 보르칸 칼돈 산으로 옮겨져 그곳에 무덤이 만들어 졌다.

칭키스 칸은 "이곳은 내가 묻히기에 좋은 장소구나 잘 표시해 두거라"라고 말했던 곳이다.

오늘날 칭키스 칸의 릉을 찾기 위해 오논강과 케룰렌강 사이의 여러 봉우리드를 찾고 있지만 실제로 어떤 봉우리가 성스러운 보르칸 칼돈인지 아무도 모른다. 칭키스 칸의 무덤도, 그의 영산인 보르칸 칼돈도 그져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진시황도 영생을 위해  불노초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수많은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영원불멸을 원했지만 아무도 이룩하지 못했다. 꽃이 피면 지기 마련....

칭키스 칸도 역시 똑같은 사람이였다. 하지만 그와 다른 통치자가 다른 점은 그는 자신이 사람이란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칭키스 칸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최전방에서 지휘했으며, 말위에서 태어나고 말위에서 죽는다는 유목민의 삶 그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칭키스 칸 그 이후

 

예수게이로 부터 태어난 징키스 칸

그는 아들을 넷을 낳았다.

장남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톨루이

장남 주치의 후손은  러시아의 깁차칸 왕국이 되었고, 차남 차카타이의 후손은 인도의 무굴제국이 되었다.

또한 막내 톨루이의 네 아들 중 홀레구는 일칸국(페르시아와 이라크), 쿠빌라이는 중국의 원왕조를 다스렸다.

칭키스 칸을 다루면서 전쟁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꽤나 고심했다.

전술과 전략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샤로테 전쟁 반대...평화주의자로니까 패스~~~

 

 

 

내몽고의 상징적인 칭키스 칸 릉을 방문하고 포스팅을 준비하면서 꽤나 많은 책과 영화와 다큐멘타리를 보았다.

내가 몽골에 가야하는 이유만 수백만 가지가 넘었다. 강한 어떤 힘이 나를 유목민과 칭키스 칸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몽골에 가자'

빠르면 내후년쯤 칭키스 칸의 발자취를 따라 몽골에 갈것 같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