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현 강제 철거로 본 한일 '기억 전쟁'과 도마 안중근의 유산
일본 우익의 '기억 청소'에 맞서는 신앙의 양심과 시민 연대 촉구
제막 6일 만의 강제 철거, 고치현에서 벌어진 참담한 '기억 청소'
단 엿새였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양국의 오랜 역사적 갈등을 넘어 미래지향적인 화해와 공존을 도모하고자 양국 민간 친선파와 지식인들이 눈물겨운 노력 속에서 기획하고 설립한 일본 고치현 구로시오 호텔 부지의 '일한우호 동양평화(日韓友好 東洋平和)' 기념비가 전격 철거되었다. 본래 이 비석은 한일 양국의 전·현직 고위 정부 인사들과 일본의 히로타 하지메 참의원 의원, 고치현 의회의 전·현직 의원 등 양국의 평화와 화해를 염원하는 정·관계 인사 80여 명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당당히 제막되었던 뜻깊은 화해의 이정표였다.
복음적 양심과 동양평화의 염원을 새겼던 고치현 안중근 기념비
독실한 가톨릭 신자(세례명 도마)로서 인류 평등과 보편적 형제애에 기반해 "동양평화론"을 남긴 안중근 의사의 사상을 기리기 위해 일본 땅에 세워졌던 기념비. 적국이었던 일본인들마저 감화시켰던 그의 평화주의 정신을 계승하려 한 한일 정·관계 및 종교계 인사들의 뜻이 모여 제막되었으나, 배타적 내셔널리즘의 동조 압력 앞에 단 6일 만에 무력하게 철거당했다. 신앙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는 '행동하는 기도'가 왜 시급한지 보여주는 참담한 역사의 증거물이다. (사진 출처 = 안중근의사기념관)
그러나 제막식 행사가 언론과 인터넷 등을 통해 알려지자마자, 부지를 제공한 구로시오 호텔을 향해 우익 세력의 빗발치는 항의 전화와 이메일이 잇따랐고 급기야 예약 취소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일부 사실과 다른 내용까지 악의적으로 확산되며 호텔 직원들의 정신적 부담이 극에 달하자, 민간 기업으로서는 비난의 집중 대상이 되는 상황을 버텨내지 못하고 결국 제막 엿새 만에 전격 철거라는 비극적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파란색 천막과 가설재로 기념비를 철저히 가린 채 중장비를 동원하여 기단부와 비석을 강제 철거하는 현장은, 원인인 침략을 지운 채 저항의 기록만을 단죄하려는 일본 역사 부정주의의 폭력성과 이에 포획된 민간 영역의 무력한 굴복을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이 참담한 사태는 결코 돌발적인 악재가 아니다. 지난 수년간 일본 전역과 국제 사회에서 전방위적으로 전개되어 온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비 무력화 시도, 2024년 초 행정대집행으로 강제 파괴된 군마현 강제연행 희생자 추도비 사태, 그리고 국내외에서 극에 달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 철거 압박과 정확히 궤를 같이하는 구조적 현상이다. 공공 공간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가해 역사의 물리적 표상들을 통째로 도려내려는 이른바 '기억 청소'가 한일 간의 타합 없는 '기억 전쟁'으로 진화하여 격렬하게 부딪히고 있음을 고치현의 전초전이 극명하게 폭로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니시모리 시오조 전 고치현 의회 의장의 지적처럼, 인터넷상에서 동양평화나 안중근이라는 이름 자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우익의 광기는 자유주의 사회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처사나 다름없다.
천막 속에 갇힌 복음적 평화주의와 성찰의 장소
독실한 가톨릭 신자(세례명 도마)로서 보편적 형제애와 평화주의에 기반해 "동양평화론"을 남긴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던 고치현 기념비의 철거 현장이다. 우익 세력의 배타적 내셔널리즘 압박과 이에 굴복한 민간 영역의 무력한 투항 속에 기념비가 해체되고 있다. 가해의 역사를 공적 공간에서 지우려는 난폭한 흐름 앞에, 신앙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는 ‘행동하는 연대’가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참담한 역사의 증거이다. (사진 출처 = 누리소통망 X, kaze)
안중근 이름조차 숨겨야 했던 비석, 그 속에 숨겨진 고치현과의 인연
이 기념비가 세워지기까지의 배경에는 한일 양국 민간 지식인들의 9년에 걸친 눈물겨운 대화와 노력이 있었다. 건립을 추진한 주역인 니시모리 시오조 전 의장은 과거 한국의 고아 3,000명을 돌본 일본인 윤학자(다우치 지즈코) 여사의 숭고한 삶에 감동하여 교류를 시작했고, 이후 안중근 의사와 고치현 사이의 깊은 역사적 인연을 발굴해 냈다.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 그의 공판에 관여했던 재판관, 검찰관, 변호인, 형무소 간부, 기자 등 핵심 인물 7명이 고치현 출신이었으며, 안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미완성 유고 "동양평화론"을 필사하여 일본 국회도서관에 기증되도록 힘쓴 인물 역시 고치현 출신이었다. 심지어 2000년대 초에는 재판 관여자의 후손이 창고에서 발견한 안 의사의 친필 유묵인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 말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제대로 행할 수 있다)’을 “원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물건”이라며 한국에 기증하기도 했다.
신앙의 양심과 동양평화의 약속,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 유묵
차디찬 뤼순 감옥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 도마 안중근이 붓을 들어 써 내려간 영적 고백이자 유산이다. 야만의 시대와 침략의 폭력 앞에서도 신의와 공경이라는 인류 보편의 도덕률을 잃지 않았던 그의 평화주의 서사가 묵직한 필치로 담겨 있다. 비록 고치현 땅에 세워졌던 동양평화 기념비는 우익의 동조 압력 앞에 천막으로 가려진 채 파괴되었을지라도, 양국 지식인들의 9년여에 걸친 화해 노력과 이 유묵이 이어준 ‘눈높이를 맞춘 진정한 연대’의 역사는 결코 소거될 수 없음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안중근의사기념관)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민간 차원의 화해 거점을 만들고자 비석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역사적 민감성을 고려해 비문에는 처음부터 ‘안중근’이라는 이름 석 자조차 새기지 못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추후 부착할 동판 내용도 논의할 예정이었으나, 이조차도 우익 서사의 조직적인 압박 앞에서는 단 엿새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철저한 가톨릭 신앙인 ‘도마 안중근’, 복음의 양심으로 불의에 맞서다
우리가 이 기념비의 축출 앞에서 더욱 깊이 성찰해야 할 대목은, 안중근 의사의 삶과 저항이 철저하게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897년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에게 신앙은 삶의 단순한 일부가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악의 구조에 맞설 수 있게 한 영적 지탱점이었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이라는 차디찬 절망의 공간 속에서도 매일 기도를 거르지 않았으며,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듯 신앙의 양심에 따라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다.
복음적 양심과 순교자적 기개로 걸어간 신앙인 ‘도마 안중근’
1897년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은 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안중근 의사의 뤼순 감옥 수감 시절 모습. 그에게 "동양평화론"은 침략 전쟁에 반대하고 상호 존중과 인류 평등, 보편적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했던 거룩한 신앙 고백이었다. 적국이었던 일본의 간수와 재판관마저 깊이 감화시켰던 그의 숭고한 평화 정신은, 배타적 내셔널리즘의 동조 압력으로 기념비가 소거당하는 작금의 한일 '기억 전쟁' 속에서 양국 시민사회가 어떤 눈높이로 연대하고 성찰해야 하는지 일깨워주는 복음적 양심의 이정표다. (사진 출처 = 독립기념관)
그가 순국 직전 집필한 "동양평화론" 역시 가톨릭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침략과 약탈이 횡행하던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에, 그가 주창한 한·중·일 3국의 대등한 협력과 상호 주권 존중의 비전은 가톨릭 신앙을 통해 내재화된 인류 평등과 보편적 형제애, 평화주의라는 복음적 가치관의 발현이었다. 한·중·일 공동 재판소 설치나 공동 화폐 발행 등 현대 유럽연합(EU)의 모태와도 같은 선구적인 평화 공동체 구상은, 신앙인 안중근이 불의한 침략 전쟁에 반대하고 신의가 지배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동아시아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공간 위에 실현하고자 했던 거룩한 기도이자 실천이었다. 고치현 출신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가 대립하던 번들을 화해시켜 새로운 시대를 열었듯, 안중근 역시 신앙의 힘으로 제국주의의 폭력을 넘어 초국가적 평화 공동체를 꿈꾼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는 안중근 의사를 식민지 저항권이나 평화주의의 맥락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단지 '일본 총리를 살해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데 급급하다. 당시 조선이 처했던 식민지화의 고통과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적 맥락이라는 원인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니, 안중근의 숭고한 저항은 한낱 맹목적인 폭력으로 격하된다. 이러한 '인식의 단선화' 구조는 자국의 영웅 서사를 결점 없는 상태로 수호하려는 강박적 내셔널리즘에서 비롯된다. 메이지 근대 국가의 기틀을 닦은 위인으로 절대화되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제국 군대의 도덕성과 명예를 실추시키는 오점으로 인식되는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 철거 압박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공격성을 공유한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단순히 "음식이 맛있다"는 감상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과거 식민지 시절에 자신들이 무엇을 행했는지, 왜 한국인들이 비판적인 역사 인식을 갖게 되었는지를 처절하게 성찰해야 한다는 현지의 목소리는 우경화된 일본 사회가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일본 시민사회와 가톨릭 공동체에 띄우는 호소, 평화의 기도를 행동으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사회와 가톨릭 공동체의 행동하는 연대를 간곡히 요청한다. 안중근 의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에 품었던 가톨릭의 형제애와 평화주의 사상은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는 인류 보편의 자산이다. 불의한 폭력이라는 우익 서사의 압박에 밀려 평화의 상징물이 공적 공간에서 축출당하는 작금의 현실은, 일본 사회가 스스로 쌓아 올린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마저 훼손하는 일이다.
공동체의 성찰을 촉구하는 음성을 지우고 가해의 역사마저 소거하려는 우경화의 파도에 맞서 일본의 종교계와 풀뿌리 시민 단체들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 신앙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를 내어주어야 한다. 사람이 서로 같은 눈높이에서 만나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고 올려다보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우정이 싹트듯, 역사 갈등 역시 인류 보편의 소수자 혐오 범죄, 전시 반인도적 범죄와 여성 인권의 문제로 담론을 확장해야 승산이 있다. 물리적인 비석은 무너졌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형제애로 동등한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평화의 기도를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상처받은 과거를 치유하고 진정한 선린우호의 미래를 열어젖힐 수 있다. 우익의 압박이 미치기 어려운 양심적 종교계와 사적 영역의 연대를 통해, 기억의 거점을 일본 땅 곳곳에 촘촘하게 다변화해 나가는 구체적인 발걸음에 함께해 주기를 호소한다.
116년의 기다림, 동아시아의 구성원들이 함께 열어야 할 평화의 새 아침
비석은 비록 철거되어 창고로 옮겨졌을지라도, 안중근 의사가 남긴 평화와 인권의 외침은 여전히 우리 모두의 양심을 두드리고 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며 동아시아의 상생을 꿈꿨던 그는 순국 직전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하라"는 애끓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제국주의 폭력의 사형 집행으로 그 청사진은 미완으로 남았고, 이름 모를 사형수들과 함께 차디찬 이국땅 지하 2.1m의 어두운 흙 속에 방치된 그의 유해는 11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가 아직 과거사의 상흔을 온전히 치유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증거이다.
다행히 당시의 생생한 르포 기사가 발굴되면서 안 의사가 묻힌 구체적인 좌표를 마주하게 된 지금, 유해 발굴은 더 이상 막연한 기원이 아닌 현실의 과제가 되었다. 유해 봉환은 한 국가의 문제를 넘어 제국주의 폭력에 희생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자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일본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매장 기록을 제공하고, 중국은 발굴을 허가하며, 남북한은 이념을 넘어 손을 맞잡아야 한다. 이 협력의 과정 자체가 동아시아에 상호 존중과 연대라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위대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용서하며 마침내 그를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그날, 배타적 민족주의와 패권 경쟁으로 멍든 동아시아는 비로소 과거의 앙금을 털어내고 국경을 초월한 진정한 화해의 장을 맞이할 수 있다.
116년의 침묵을 깨는 진실의 좌표, 뤼순 마잉푸 추정 매장지
1910년 안중근 의사 순국 직후 그의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강력히 추정되는 중국 다롄 뤼순 감옥 인근 지역의 모습이다. 이 사진은 해당 지역의 최신 위성 이미지와 등고선이 표기된 고지도를 지리 정합(Georeferencing)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디지털 사료의 한 장면이다. 최근 새롭게 발굴된 1910년 당시의 생생한 르포 기사와 관련 역사 문헌들을 토대로, 안 의사의 구체적인 매장 후보지 좌표들을 현대 과학기술을 통해 정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메타메모리 김경식)
부서진 돌덩이 뒤에 남은 진실, '지치지 않는 연대'가 필요한 이유
비석은 부술 수 있고 소녀상은 이전시킬 수 있어도, 그 돌과 청동에 새겨졌던 역사적 사실과 기억의 연대까지 무너뜨릴 수는 없다. 고치현의 기념비는 비록 지금 어두운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을지언정, 목숨을 걸고 일한 우호와 동양평화의 뜻을 지켜나가겠다는 86세 고령의 일본인 주역과 양국 시민사회의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일본 사회의 가해 역사 지우기가 거세질수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시적인 감정적 분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공간에서 쫓겨난 기억들을 3D 스캔과 디지털 매핑 기술로 철저히 아카이브화하여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온라인상의 기억의 장소를 구축하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나아가 유해 봉환을 기점으로 남과 북, 동아시아인들이 함께 뜻을 기리고 미래 세대들이 평화와 인권을 배우는 '동아시아 평화기념관'을 건립하는 일로 서사를 확대해야 한다. 철거되어 텅 빈 자리에 더 단단한 서사의 기록을 채워 넣고 지치지 않는 연대의 숲을 가꾸는 것, 안중근 의사의 귀환을 통해 동양 평화의 새 아침을 맞이하는 것만이 지금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가 마주한 가장 시급하고 숭고한 역사적 책무다.
이규수
강덕상사료연구원 원장. 한국근현대사 전공. 역사문헌을 바탕으로 근현대 일본인의 한국인식과 상호인식 규명에 관한 글쓰기에 주력하고 있다. 강덕상 소장자료의 정리와 분류, 목록화 작업 등의 기초작업을 통해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