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조국에 바친다는 결심 평생 이어져
목숨은 보전해야 하지만 쓸 때는 쓰는 것
이봉창·윤봉길 희생 끝까지 품고 살아가
김구의 목표는 분단극복이지 집권이 아니었다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은가
백범 김구라는 이름의 울림은 날이 갈수록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36년간의 일제 식민지에 이어 해방되면서 나라가 분단돼 80년이 넘게 남북이 적처럼 살아가는 민족사에 비극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시절에 자주 독립과 분단 극복에 평생을 바친 김구(1876~1949)의 거친 삶은 태산처럼 분명하게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말해줍니다. 2026년 '유네스코 기념 백범의 해'를 맞아 그간 잘 몰랐던 김구의 이야기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백범 김구’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연재합니다.(필자 주)
백범 김구(1876~1949)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우리는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장편소설 『백범 강산에 눕다』를 냈을 때 뜻밖에도 많은 사람이 “우리가 백범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3쪽에 지나지 않고,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가르칠 교사도 없습니다. 해방 후 들어선 정부는 독립운동사를 가르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 한국광복군 출신 중 일부가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나 초기 국군에 입대하면서 광복군 경력을 숨기거나 지워야 했던 사례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범은 속내를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산부동(泰山不動)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백범은 ‘목숨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독립운동을 시작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결심 끝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단 한 번 세상을 사는 유한한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 각지의 청년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회원들은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상소문은 개신교계를 대표해 개화 지식인 이준이 작성했습니다.
“강화도조약 때 일본은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고, 러일전쟁 때는 ‘한국의 독립과 토지주권의 보호가 전쟁의 목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끝내 한국의 주권을 강탈했다. 또 황제의 서명도 없이 박제순 등 역신이 조약에 날인한 것은 만국공법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고종은 이들 역신을 처단하고 이 조약이 무효임을 세계 열방에 알려 한국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
당시 상소자들은 일제와 그에 동조하는 대신들이 자신들을 반역이나 소요죄로 몰아 처형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상소자는 최재학(崔在學)이 대표자의 머리인 소수(疏首)를 맡았고 신상민(申相珉), 김인집(金仁楫), 신석준(申錫峻), 이시영 (李始榮,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영과는 동명이인) 등 5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미리 유서를 써두고 대한문 앞으로 갔습니다. 상소 방식은 도끼를 들고 궐문 앞에 엎드리는 ‘지부상소(持斧上疏)’였습니다. “내 말이 틀렸다면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라”는 항거입니다.
김구는 황해도 진남포 엡윗청년회 총무 자격으로 전국대회에 참석한 상태였습니다. 아직 이름난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1차 상소문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1차 5인이 잡혀가면 계속 상소를 이어가며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했습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정순만의 인도로 우리 일동은 상동교회(남대문 근처)에 모여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하자고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다.”
김구는 이때 이미 “목숨은 지키고 보전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할 때 쓰는 것이다”라는 인식으로 무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구국 운동에 나섰더라도 실제로 목숨을 완전히 바치겠다고 각오하는 일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김구는 각오했으면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특징은 평생에 걸쳐 나타납니다. 1차 상소 조가 체포된 뒤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고 대한문 앞은 봉쇄됐습니다. 결국 상소만으로는 일제를 몰아낼 수 없다는 절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동료들이 끌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무장투쟁과 교육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민족 앞에 내놓는 김구의 각오는 확실했습니다. 그 각오는 자기 자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945년 장남 인이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김구는 아들을 어머니 곽낙원 여사 묘 곁에 묻었습니다. 이미 딸 셋과 어머니와 아내를 잃은 뒤였습니다.
1935년 11월 열여덟의 김인은 백범이 이동녕·이시영과 함께 항주(杭州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했습니다. 4년 후 김인은 중경(重慶 충칭)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김붕준의 큰딸 효숙을 만나 그녀의 부탁을 받고 “우리는 혁명자! 정의를 우리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짤막한 글을 써주었을 정도로 독립운동에 사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인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장녀 안미생과 연애 끝에 결혼했습니다. 북경에서 나서 상해에서 자랐고 홍콩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뒤 곤명(昆明 쿤밍)의 서남연합대학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영어, 러시아어 등에도 능통해 충칭의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김인을 만났습니다.
결혼한 김인은 중경에서 폐병을 앓았습니다. 중경의 나쁜 공기로 많은 한인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김인은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첩보 활동을 했던 긴장감으로 병을 키운 것 같습니다. 안미생은 남편이 위독해지자 시아버지 백범을 찾아가 당시 유일한 치료약이었던 페니실린을 맞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백범은 폐병으로 죽어가는 동지들은 그렇게 해주지 못했는데, 내 아들이라고 특별히 페니실린 주사를 맞게 할 수 없다며 며느리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형이 세상을 뜨자 중국 공군사관학교에서 비행 훈련을 받던 둘째 아들 신이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부모가 자식을 앞세우는 비참한 슬픔을 ‘참척’(慘慽)이라고 합니다. 둘째의 편지를 받은 김구는 비통함을 누르며 이렇게 답장합니다. “신아, 편지 잘 받았다. 네가 지금은 우리 김씨 집안의 유일한 자손이니 아버지는 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나 혁명하는 것은 생명을 민족에 바친 것이고, 군인은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해야 한다. 생사는 마땅히 그다음의 문제이니 너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김구의 진정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구는 자신을 바친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나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대한민국 13년(1931년) 12월 13일, 선서인 의사 이봉창.
이보다 앞선 일이지만, 상해에서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했을 때 김구는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상해에서의 김구는 단순한 투사로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타인의 죽음까지 책임지는 자리에 섭니다. 1931년 겨울, 김구는 이봉창을 처음 만납니다. 이봉창은 번듯한 엘리트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노동 현장을 떠돌며 밑바닥 인생을 살던 청년이었습니다. 김구는 그에게서 바닥까지 밀려난 사람 특유 야생의 생명력을 봅니다.
김구는 그에게 수류탄을 맡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김구도 알고 있었습니다. 실패 가능성이 크다는 것,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단순히 작전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남은 생애 전체를 자기 품 안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저의 목숨을 드립니다.” 의거를 위해 홍구공원으로 가기 직전 윤봉길이 말했다. 김구는 잠시 침묵했다, 습관처럼. 그러나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대의 목숨을 받겠소. 조국의 이름으로!” 둘은 서로 시계를 바꿨다. 앞으로의 한 시간과 그 이후의 시간이 영원으로 바뀌었다.
윤봉길 의거에서는 그 관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윤봉길은 젊었고, 아내와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구는 도시락 폭탄을 맡깁니다. 의거 직전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설명도, 거창한 구호도 없었습니다. 이미 서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조국을 위해 죽으러 간다.” “나는 그런 그대를 보내고 여기 남는다.” 둘은 조국의 이름으로 서로의 목숨을 서로에게 의탁하는 관계가 됩니다.
여기서 김구의 절대적인 비극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목숨을 바치는 쪽을 비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살아남아 그 죽음을 받드는 사람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비극이 있습니다. 젊은이를 죽음의 현장으로 보내고, 실패와 죽음을 견디고, 그 이후의 모든 책임까지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사람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의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동지들입니다. 목숨 바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아서 젊은이들이 몸 바친 그 이후를 감당해야 하는 김구는 죽은 사람에 못지않은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김구는 젊은이를 죽음의 현장으로 보냈고, 실패와 도피의 세월을 견뎠고, 그 이후의 모든 책임까지 짊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김구가 얼마나 강력한 사나이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은 십자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영화에는 “Hoc est enim Corpus Meum.”이라는 라틴어 문장이 나옵니다. “이는 내 몸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내 몸을 내어준다는 것은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영화 속 대부분 사람은 이 말을 배반합니다. 신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살육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주인공 발리앙은 다릅니다. 그는 무의미한 학살을 거부하고 시민 생명을 먼저 생각합니다. 끝까지 싸우면 예루살렘은 폐허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결국 항복 협상을 선택합니다. 자기 명예보다 사람 목숨을 먼저 본 것입니다. 이 영화가 십자군 전쟁을 다룬 서양의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꼽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주제 의식을 탁월하게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임순만의 장편소설 '백범 강산에 눕다'의 표지.
을사늑약 상소 때의 김구도 “내 몸을 내어놓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해에 이르면 그의 투쟁은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갑니다. 상해의 김구는 자기 목숨만 내놓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동지들의 목숨까지 함께 떠안는 자리로 걸어 들어갑니다. 김구가 이봉창과 윤봉길에게 폭탄을 맡기는 순간, 그 뜻은 결국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목숨과 그대의 목숨은 이제 같은 운명이다.”
그러나 태산부동의 김구는 그것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동지를 죽음의 현장으로 보내고 그 책임을 자기 품 안에 안았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김구는 더욱 장렬하고 높아 보입니다. 자기 죽음은 혼자 감당할 수 있지만, 타인의 죽음은 평생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는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문제는 그 죽음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였습니다. 김구는 평생 그 책임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자기를 던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김구가 해방 후 집권하지 못했기에 성공하지 못한 정치인이라고 말합니다. 김구의 목표는 집권이 아니었습니다. 분단 극복을 목표로 한 사람에게서 집권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전혀 다른 관점의 이야기입니다.
범접하기 어려운 인상이지만 알고 보면 '따뜻'
임정 존속 위해 얻어먹는 것 부끄러워하지 않아
아이들이 경교장 담 넘어와서 놀자 정문 열어줘
걸인 구걸 장소까지 다 기억…피격 뒤 조문 행렬
정의는 고지식한 사람이 사용하는 최고의 수단
김구가 강직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흔히 엄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180cm가 넘는 큰 키에 얼굴은 조금 얽었고, 광대뼈가 발달한 구릿빛 얼굴에 엄청난 고집불통이었으니까요. 어렸을 때 마마로 인해 하얀 종이에 먹물 한두 방울이 튄 듯 살짝 얽은 얼굴은 타인이 보는 인상에 실금을 그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임정 초기 경무국장 시절 그는 카이저수염을 길렀습니다. 당시 카이저수염은 근대 남성의 위엄과 강인함을 드러내는 유행 수염이었습니다. 상냥하기보다는 엄한 인상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김구는 단지 유행에 따라 카이저수염을 기른 것이 아닙니다. 임정의 치안 책임자였던 김구는 엄격하고 단단한 인상이 필요했습니다. 상해 일본 영사관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수괴’라며 제거 1호로 꼽았던 김구는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존재여야만 했습니다. 밀정을 가려내야 했고, 임정의 질서를 세우고, 죽은 사람의 염습까지 궂은일을 도맡아야 했던 그로서는 호락호락한 인상을 줘서는 안 될 위치에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눈빛이 강했던 그는 카이저 수염까지 길러 강력한 권위를 구축했습니다. 당시 임정 젊은이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 “말을 함부로 못 걸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임정의 기강을 잡아야 했던 김구는 엄하게 보이기 위해 카이저수염을 기르고 말을 아꼈다. 그러나 아이들은 먼저 알았다. 아이들이 백범을 ‘곰보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는 사실은 그 어떤 훈장보다 정확한 그의 초상이다.
김구는 이렇게 ‘범접하기 어려운 남자’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재미있는 반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위압감을 느꼈던 사람들이 밥을 챙겨주거나 집안 사정을 물어보는 김구를 보고는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알고 보니 따뜻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런 반응은 특히 어린이들이 자주 보여줬습니다.
1924년 아내 최준례가 세상을 뜬 후 그의 노모가 손자들이라도 먹여 살리겠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황해도로 돌아가 버린 이후 국무령인 김구는 혼자 살면서 굶주리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쫄딱 굶은 김구가 오후에 동포들의 집을 방문하면 부인들이 반가워하며 밥을 차려줬습니다. 그가 얻어먹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면 임정은 문을 닫았을 것입니다. 김구가 김의한·정정화 부부의 집에 찾아가면 정정화가 “잘 오셨다”며 음식을 만들기 위해 후동(훗날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이를 맡기고 시장을 보러 갔습니다. 후동이는 낯을 가려 다른 사람에게는 잘 가지 않았는데, 백범이 봐주면 그렇게 잘 놀았다고 정정화는 회고록 『장강일기』에 썼습니다.
아이들에게 김구는 ‘곰보 할아버지’이거나 ‘호랑이 할아버지’로 통했습니다. 김구가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면 아이들이 그런 별명을 붙이지 못했을 겁니다. 김구가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해를 탈출하기 전 미국인 피치(George A. Fitch) 목사의 저택에서 숨어 살 때는 피치의 아들 로버트가 매일 2층에 올라와 김구와 놀았습니다. 김구가 상해를 빠져나와 가흥(嘉興 자싱)에서 숨어 살 때도 소학교 1년생이던 진국침이 매일 김구 곁에 머물며 심부름을 해주거나 시내에 나가 신문을 사다 주었습니다.
일제의 공습을 피해 임정 대가족을 이끌고 남경(南京 난징)에서 중경(重慶 충칭)까지 옮겨가는 약 3년간의 대장정 기간에 김구가 보인 어린이들에 대한 정성은 진합니다. 공책에 대가족의 이름과 건강 상태를 낱낱이 기록했으며, 대가족의 어린이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여성 광복군 김효숙은 “김구는 아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만지고, 이름을 물으며 ‘요놈, 요놈’하며 귀여워했는데, 호랑이 할아버지의 손아귀 힘이 너무 세서 아이들이 “어휴, 또 오신다!”하며 달아나곤 했다는 것입니다.
해방 후 임정 요인들이 환국한 이후에는 날마다 주변의 아이들이 경교장에 와서 놀았습니다. 아이들이 담을 넘어와 들어오니까 관리인들이 아이들을 내쫓곤 했습니다. 그 사실을 안 김구는 어느 날 아이들을 집무실로 불러들였습니다.
“다음부터는 담을 넘지 말고 정문으로 들어와 놀아라.”
김구는 아이들에게 붓글씨로 ‘幸福(행복)’이라고 써 주며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컸을 때는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김구는 1948년 겨울 금호동 600여 호 이재민 자녀들을 위해 백범학원을, 염리동 천막촌에는 돈이 없어 학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창암공민학교를 세웠다. 그가 세상을 떴을 때 가진 돈은 무일푼이었다. 백범학원 개원 기념식 사진.
경교장 바로 옆집에 살던 오경자씨는 “백범 선생이 아이들과 잘 어울렸고, 간식도 나누어 주고, 동네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냈다”고 회고했습니다. 오씨는 “백범이 주민들과 함께 동양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다”고 기억했습니다. 백범은 어머니·아내의 묘를 이장할 때 들어온 돈과 아들 결혼식 축의금을 모아 1948년 말 이재민 자녀들을 위해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염리동 천막촌에는 창암공민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다음 해 6월 백범학원에서는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운동회를 마치고 4학년 아이 한우삼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 4학년 운동 종목은 사람 찾기인데, 나는 이성오 선생님과 뛰어 1등을 했습니다. 우리 반 정순미는 김구 할아버지를 모시고 뛰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숨이 차 못 뛰겠다고 하셔서 순미는 그 자리에서 울었습니다.”
백범이 저격당해 10일장 치르던 1949년 6월 26일~7월 5일까지 경교장에는 눈물로 눈동자가 빨갛게 된 소학생들이 몇 명씩 짝을 이루어 연일 찾아왔습니다. 김구는 귀한 과일이나 케이크, 과자 등의 선물이 들어오면 아껴두었다가 동네 아이들을 불러 직접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상가에 찾아온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백범의 너그러운 모습이 깊이 들어 있었습니다. 서거 다음날 언론들은 “양정중학, 여자상업 등 남녀 중등학생들과 함께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동들이 단체로 빈소를 찾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아이들은 순서가 되면 통곡 소리로 가득 찬 경교장 2층 영안실로 줄지어 올라가 고인의 영정 앞에 엎드려 조문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눈물바다가 된 서대문, 남녀노소와 유무식을 막론하고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다. 어린 국민학생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서 목을 놓아 울어 현장에 있던 어른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기록했습니다.(『서울신문』 1948년 6월 28일)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저격당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조문을 드리기 위해 경교장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40만이었는데, 조문온 사람은 124만 명이었다.
몰려오는 조문객 중에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걸인들이었습니다. 조문 첫날엔 신당동 해방촌에서 걸인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집도 먹을 것도 없이 해진 옷을 입은 그들은 구멍 난 옷을 두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경교장 안뜰로 들어섰습니다. 그들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간 후 걸인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 밀려들었습니다. 1898년 인천감리서를 탈옥한 청년 김창수(김구의 본명)는 삼남 지방을 유랑할 때, 실제로 패랭이를 쓰고 거지들과 어울려 걸식하며 밑바닥 삶을 체험했습니다. 빈소에 걸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보는 정객들은 처음에는 기이하게 여겼으나, 마침내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론인 엄도해 씨는 “백범이 헐벗은 동족을 위하여 고문을 당하고, 투옥도 당하였고 저격도 받고, 굶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걸인까지도 사랑하고 구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걸인들이나 아는 사실”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엄씨는 러시아 시인 투르게네프의 시 「걸인」을 인용했습니다. (『자유신문』 6월 29일)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있는 주머니를 다 뒤졌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주저주저하다가 그의 떨리는 손을 꼭 쥐고 ‘용서하시오 형제여!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걸인은 그 부은 손으로 나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이는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선생님, 이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이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라고 하였다. 나는 그 형제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백범은 이 시처럼 같은 동족이요, 형제인 걸인들에게 단 한 푼이라도 쥐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모퉁이에서 어떤 거지가 구걸하는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 정객들은 연단에 서거나 좌담회 자리에 앉으면 누구나 “삼천만 동포여!”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범 빈소에 찾아오는 걸인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부르짖는 ‘삼천만 동포’ 가운데 걸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피해왔던 걸인들의 마음속에는 백범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정의는 진정한 마음에서 오가는 수단이지만, 여러 수단 중에서도 최상급의 솔직한 수단입니다. 정의는 아무렇게나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정의는 우직하며 고지식합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백범은 고지식한 사람입니다. 남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거나 저렇게 부르거나 일관되게 충직하였습니다. 동료에 대한 신의는 결백하였고, 자주독립과 통일에 대한 신념은 목숨을 다하도록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신성모 국방장관을 비롯해 행동대원 안두희 일당에게 저격당해 세상을 뜨는 원인이 되었지만, ‘쓰는 사람이거든 의심치 말라’는 신의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백범의 서거 소식을 듣고 여학생을 데리고 문상 온 한 중년 여인은 “분해서 못 견디겠다” “분해서 못 견디겠다”고 연거푸 소리치며 흐느껴 울었다는 기사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왜 이런 지도자를 죽이나요? 참 분하지 않은가요?
김구에게 담배는 망명지 ‘고통의 진통제’
안공근을 바로잡기 위한 리더의 금연 솔선수범
안공근 행방불명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
김구-안중근 가문의 의리 오랜 세의(世誼) 이어져
변절 흔한 시절에 김구 배신한 이는 단 한 명뿐
백범 김구의 별명은 ‘호랑이’였습니다. 해방 후 들어선 미군정은 한 수 더해 ‘블랙타이거’(Black Tiger)라고 불렀습니다. 광대뼈가 발달한 고집스러운 인상,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맹수 같은 성격, 그리고 반민족적인 것에는 굴하지 않은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그가 타계한 며칠 후 1949년 7월 4일 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KOREA: Death of a Tiger”(한국: 호랑이의 죽음)라는 강렬한 헤드라인과 함께,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둔 백범의 비극적인 서거 직후의 모습을 실어 충격을 주었습니다.
김구 서거 직후의 사진. 1949년 7월 초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KOREA: Death of a Tiger’라는 제목으로 김구의 죽음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백범은 50대까지 담배를 즐겼습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초기 임정의 기강을 확립했던 그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양철통에 50개비가 들어있는 값싼 백금룡(百金龍 바이진롱)을 한 대씩 뽑아주며 함께 담배를 즐겼습니다. 그에게 담배는 망국의 고독과 어려움을 버티게 해준 ‘망명의 진통제’였습니다. 주변에서 “담배를 줄이라”고 만류하면 김구는 “이미 담배 인이 박였는데, 이걸 어찌 끊겠는가? 옛다, 같이 한 대 더 먹자!”고 궐련을 던져주었습니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할 만하지요.
그랬던 호랑이 할아버지가, 1937년의 어느 날 밤, 담배를 끊었습니다. 중일전쟁의 포화 속에 상해가 일본군에 함락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김구는 남경에서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오른팔이자 참모인 안공근을 불렀습니다. “상해에 남겨진 안중근 의사의 부인(김아려 여사)과 식솔을 무사히 구출해 오게.”
1935년 11월 7일 중국 항주(杭州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창립하고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앞줄 왼쪽부터 송병조 이시영 김구 이동녕(앞의 어린이는 엄항섭의 딸 기순) 조완구, 뒷줄 왼쪽부터 엄항섭 양무조 김봉준 안공근 차리석 조성환.
김구에게 안중근 의사 가문과의 관계는 특별했습니다. 청년 시절 동학운동이 실패하자 관군에게 쫓기던 김창수(김구의 본명)를 거두어준 이가 바로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였습니다. 안 진사는 동학군을 토벌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젊은 김구의 소문을 듣고 보호해준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김구가 안 의사의 유족을 지키는 것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의리이자, 평생의 은혜를 갚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해로 들어간 안공근은 김구의 노모인 곽낙원 여사만을 모시고 나왔습니다. 김구는 안공근을 크게 나무랐습니다.
“양반의 집에 불이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는 법이거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손에 포기하고 오다니! 이것이 가문의 도덕이며, 혁명가의 도덕이란 말이냐?” 상황이 급박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안공근에게 김구는 말했습니다. “나도 오늘부터 담배를 끊겠다. 너도 참된 혁명가가 되어라.”
그 후 김구는 서거하는 순간까지 단 한 개의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김구는 부하를 야단치는 자리에서 왜 ‘금연’을 선언했을까요? 그 이유는 조금 복잡합니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김구보다 13세 어린 안공근은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입니다. 큰형은 중근, 둘째 형은 정근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일제에 쫓긴 공근은 보통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습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수색과 추적이 계속되자 안창호의 주선으로 흑룡강(黑龍江 헤이룽장)성으로 갔고, 다음해 모스크바로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931년 11월에는 김구와 함께 일제 주요 요인을 암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단장 김구를 도우며 참모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유창한 러시아어를 배경으로 프랑스 공무국 정보담당관인 러시아인을 통해 일본영사관의 많은 정보를 수집해 임정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정부와의 교섭과 연락업무를 담당하면서 김구의 핵심 측근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했습니다.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할 무렵, 안중근의 부인을 모시고 나오지 못하자 김구가 안공근을 야단쳤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안공근은 다시 상하이로 들어갔지만, 자신의 가족만 데리고 빠져나왔고, 안중근의 부인은 끝내 모시고 오지 못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안공근은 김구의 신망을 잃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사정이 혼재해 있습니다. 당시 임정의 재정과 특무 조직을 관리하던 안공근이 독립운동 성금 중 일부를 사사로이 챙기거나 불투명하게 사용했다는 물의가 임정 내부에서 계속 불거졌습니다. 사람들이 안공근에 대한 불만을 말하면 김구는 자금 관리는 어려운 업무라며 여전히 안공근을 신뢰했습니다. 특무부대의 중견단원 김동우, 오관식 등 7~8명이 “김구의 독재적 행동과 안공근의 전횡불륜(專橫不倫) 행위에 분개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특무부대를 이탈하여 상하이에서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김구는 자금 관리 업무에서 안공근을 배제했고, 신뢰를 잃은 안공근은 한동안 독자적인 정보 활동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후 안공근은 홍콩으로 갔습니다. 상해에 침투하여 안중근의 부인을 모셔오려고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감시가 삼엄해 다시 상해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공근은 홍콩에서 중경으로 온 직후인 1939년 5월 30일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 이유나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정정화는 자신의 일대기인 『장강일기』에서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안공근이 형 안중근의 일로 말썽을 일으키고 공금을 챙겨 홍콩으로 잠시 몸을 피한 일이 있었다. 재주가 많고 말을 잘하는 이라서 여기저기에 허튼소리를 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임정 어른들께 야단을 맞게 생겼으니까 홍콩으로 도망갔던 것이다. 백범은 나중에 돌아온 그에게 ‘이제 사람이 돼라. 지금 이 자리에서 결심을 해라. 그 대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이 담배를 끊겠다. 네가 사람이 될 때까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1920년대부터 안공근과 친밀하게 교류했던 정화암은 자서전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에서 안공근은 자금 사용 문제로 김구와 사이가 벌어지자 김구를 축출하고 자신의 형(안정근)을 추대하려고 했다가 발각당하는 바람에 김구로부터 모든 행동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썼습니다.
이와 관련해 안중근 가문의 여러 인사와 어린 시절부터 친했고,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낸 김자동은 생전에 유진동의 부인 강영파가 자신의 모친 정정화에게 “한인 청년들이 안공근의 시신을 유진동의 병원으로 들고 왔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김구 세력의 청년들이 안공근을 손본 후 김구의 주치의인 유진동의 병원으로 싣고 왔지만 살리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1946년 경교장 앞에서의 백범 김구와 며느리 안미생(뒤쪽). 안미생은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 1차 환국 당시 김구의 비서로 귀국했다.
일각에서는 김구의 측근들이 안공근을 암살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보냅니다. 이에 대해 김자동 회장(2022년 작고)은 이렇게 잘라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 백범 선생은 알지 못했고, 살해를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은 중경 시절부터 1949년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백범의 비서로 일했다. 백범이 자기 아버지 살해 지시를 내린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랬을 리가 없다. 더구나 안공근의 조카딸(안정근의 장녀) 안미생은 훗날 백범의 며느리가 되었다.”
1940년 아들 신과 안미생의 결혼에 대해 김구는 “훌륭한 집안의 자제이니 물어볼 것도 없다”며 매우 반갑게 며느리로 맞이했다고 합니다. 김신이 죽고, 안미생은 김구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김구는 안공근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경 시장 양삼화(楊森和 양선허)와 경비사령 유치(劉峙 류즈)를 비롯해 다양한 루트를 통해 안공근 실종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공근의 행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중국의 역사학자 왕병의(王炳毅 왕빙이)는 중국 정기 간행물인 『문사춘추』(文史春秋) 2003년 제11호에 논문 「한국 항일 의사 안공근 중경 실종 사건 내막」을 실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안공근의 실종은 임시정부 내부 파벌 싸움이 아닌, 중국인 이중간첩 라검북(羅劍北 뤄젠베이)이 자신의 일제 밀정 행각을 알고 있는 안공근을 살해해 중경의 폐광 갱도에 유기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 비밀 정보기관의 수사 아카이브와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했다는 이 논문은 발표된 지 한참 지나 국내에 알려졌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라검북은 북경대를 졸업하고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1929년에는 군벌 장학량 휘하에서 정보처장을 지내기도 한 인물입니다. 상하이에서 항일 잡지를 발행하다가 자금난에 처하자 일제 밀정으로 돌아선 국제 이중간첩이라고 합니다. 중국 국민정부 공안당국의 수사 기록에도 이런 내용이 있는데, 라검북이 영국 국적(홍콩 시민권)을 갖고 있어 중국 사법당국이 기소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김구는 담배를 끊은 이유와 안공근의 그 이후에 관해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연구자들은 김구의 선언 속에는 몇 가지 뜻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철저한 ‘자기 징벌’입니다. 김구는 안공근을 탓하기 전에, ‘내 부하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고, 조국의 영웅인 안중근의 유족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는 지도자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벌을 주기 전에 자신의 욕구를 끊어내는 육체적 고통을 자신에게 부과한 것입니다.
다음은 솔선수범입니다. 말로만 훈계하는 리더는 힘이 없습니다. 김구는 자신의 사적 즐거움을 절단해 버림으로써 말의 무게를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의 금연 선언은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세우는 무언의 압박이라고 봅니다. 한국 독립운동사는 늘 고질적인 혈연, 지연, 파벌 싸움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안공근의 실책 역시 많았고, 둘의 사이는 틀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김구는 계파와 연고를 배격하고 공화 정신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심한 시대였지만, 김구는 끝까지 직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동지를 배신하지 않는 것,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의 가족을 책임지는 것, 남에게 말하기 전에 자신부터 실천하는 것. 김구는 그 원칙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김구가 활동한 시대는 앞을 보기 어렵고, 변절도 극심한 때였습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한 연구자는 김구의 평생에 걸쳐 그를 배신한 사람은 한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