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이민자가 불멸의 악성(樂聖) 되기까지
이발사 겸 의사 아버지는 법률가가 되길 강요
부친 사후 법학 공부하는 척하다 음악의 길로
로마 등 귀족 위해 작곡, 이탈리아 오페라 흡수
하노버 선제후에게 통보도 않고 영국에 왔는데
국왕으로 다시 만나 만든 대표작이 '수상 음악'
오페라 실패로 빚더미에 뇌졸중 후유증 벼랑에
24일 만에 완성한 대성악곡 '메시아'로 부활
시력 잃기 시작, '메시아' 관람 여드레 뒤 운명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deric Händel, 1685~1759).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갈고닦고 영국식으로 꽃피운 사람. 그는 요즘 말로 하면 '다국적 이민자 음악가'다. 국적을 갈아 타고 언어를 바꾸고 이름 철자까지 영국식으로 바꿔가며 살아남은 사람이다. 어떤 이는 기회주의라 부를지 모르지만, 헨델 자신은 그저 음악이 있는 곳으로 흘러갔을 뿐이라 답했을 것이다.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듯.
발타자르 데너가 그린 조지 프리데릭 헨델 초상화(위키피디아)
이발사 아들, 몰래 건반을 두드리다
1685년 2월 23일, 독일 할레(Halle)에서 태어난 헨델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Georg Händel, 1622~1697)은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는데, 아들에게 법률가가 되기를 강요했다. "음악으로는 밥도 못 먹는다"는 논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통용되는 부모들의 언어인 모양이다. 아버지는 심지어 집에 악기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어린 헨델은 달랐다. 식구들이 잠든 틈을 타 다락방에 몰래 숨겨둔 작은 건반악기를 밤마다 손가락으로 눌렀다. 결국 그 재능이 들통 났고, 어느 귀족의 중재 덕분에 당시 유명한 음악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호우(Friedrich Wilhelm Zachow, 1663~1712)에게 정식 교육을 받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697년 이후, 헨델은 할레 대학에서 잠깐 법학을 공부하는 척하다가 이내 음악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헨델의 생가, 헨델 하우스.(위키피디아)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1703년 열여덟 살의 헨델은 함부르크 오페라 악단에 바이올린 주자로 취직한다. 이 시절 그는 동료음악가 요한 마테존(Johann Mattheson, 1681~1764)과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오페라 반주를 놓고 다투다 진짜 칼을 빼든 것이다. 다행히 헨델의 가슴팍에는 커다란 금속단추가 달려 있었고, 마테존의 칼날이 그 단추에 튕겨 나가면서 두 사람 모두 목숨을 건졌다. 역사상 가장 운 좋은 단추라 할 만하다.
1706년부터 1710년까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며 헨델은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지의 귀족들을 위해 음악을 작곡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음악의 메카였고,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정수를 흡수했다.
1710년, 그는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Georg Ludwig, 1660~1727)의 악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얼마 뒤 런던으로 건너가 오페라를 공연하고는 하노버로 돌아오지 않았다. 상사를 버리고 잠적한 셈이다. 그런데 인생은 알 수 없는 법, 1714년 영국 여왕 앤(Queen Anne, 1665~1714)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계승한 사람이 바로 그 하노버 선제후였다. 영국 왕 조지 1세가 된 것이다. 잠수를 탔던 직원이 갑자기 사장이 된 상황이라니, 헨델 입장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을 것이다.
헨델이 세례를 받았고 프리드리히 자호프와 함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던 할레의 마르크트교회.(위키피디아)
뱃놀이 음악으로 사장님 달래기
1717년 7월 17일, 런던 템스강에서 화려한 뱃놀이가 열렸다. 조지 1세가 왕실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람을 즐기는 자리였다. 헨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50여 명의 연주자를 따로 배에 태우고 왕의 배 옆에서 연주하게 했다. 나중에 '수상음악(Water Music)'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곡이 흘러나오자 조지 1세는 너무나 마음에 들어 같은 곡을 그날 밤 세 번이나 다시 연주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템스강을 오가는 내내, 밥 먹고 나서도. 연주자들은 녹초가 됐겠지만 조지 1세는 황홀했다. 그렇게 헨델은 옛 상사의 노여움을 음악으로 녹여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사과편지가 음악으로 쓰인 것이다.
1727년 영국에 귀화한 헨델은 조지 2세(1683~1760)의 왕실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거의 모든 왕실 의식에 음악을 제공했다. 그의 음악은 이제 영국의 소리가 됐다.
헨델이 음악가로 활동했던 1726년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위키피디아)
메시아(Messiah), 실패한 오페라 작곡가의 기적 같은 부활
1740년대 초, 헨델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탈리아 오페라 사업이 번번이 흥행에 실패했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으며 뇌졸중 후유증까지 겪었다. 오늘날이라면 아마 언론에서 "한때 잘나갔던 음악가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왔을 법한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1741년, 단 24일 만에 최후의 승부수를 완성했다. 바로 성악대곡 '메시아'다. 성서 구절로 엮은 이 거대한 합창음악은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초연됐다. 당시 공연은 자선행사로 기획됐다. 수익금은 죄수들의 구제, 머서 병원(Mercer's Hospital), 자선 진료소(Charitable Infirmary) 등 세 곳에 나누어 기부됐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여성들에게는 치마 속 버팀대를 빼고 오도록, 남성들에게는 칼을 집에 두고 오도록 부탁해야 했다. 그렇게 700명이 빽빽이 들어찼고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훗날 메시아는 런던의 고아병원(Foundling Hospital)을 위한 자선공연과 결합되면서 영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다. 헨델은 메시아 원본악보를 이 병원에 유증했다. 음악과 복지의 결합이라는 전통은 이렇게 시작됐다. 비틀스보다 200년도 더 앞선 자선공연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오늘날 '할렐루야' 합창이 울려 퍼질 때 청중이 기립하는 관행도 이 시절에 굳어졌다. 조지 2세가 공연 도중 너무 감동 받아 벌떡 일어섰고, 왕이 서면 신하들도 일어서야 했던 당시 예법 덕분에 모두가 일어섰다는 설이 전한다. 왕의 감동이 300년짜리 전통을 만들어낸 것이다.
에두아르 함만(1819~88) 작, 1717년 7월 17일 템스 강변의 헨델(가운데)과 조지 1세(위키피디아)
눈이 멀어서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
1751년, 헨델은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백내장이었다. 당시 돌팔이 의사 존 테일러(John Taylor, 1703~1772)에게 수술을 받은 뒤에 오히려 더 나빠졌다. 공교롭게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도 같은 의사에게 눈 수술을 받고 실명한 뒤 세상을 떠났다. 역사상 가장 많은 천재를 동시에 망가뜨린 의사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헨델은 악보를 받아 쓰게 하고 구술로 수정하며 음악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1759년 4월 6일, 그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공연이 바로 메시아였다. 그로부터 여드레 뒤인 4월 14일 런던에서 74세로 눈을 감았다. 3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모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됐다. 이민자 음악가로 시작해 영국의 국민음악가로 마감한 삶이었다.
헨델 하우스, 브룩 스트리트 25번지, 런던 W1. 조지 프리드리히 헨델은 172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했다.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친 후, 이 집은 헨델의 삶과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재미있는 것은 1968년부터 1969년까지는 지미 헨드릭스가 이웃집인 브룩 스트리트 23번지에 살았다는 것이다.(위키피디아)
한국에서 본 헨델, 영국에서 본 한국
영국에서 살다 보면 헨델의 그림자가 도처에 있다. 런던 브룩 스트리트(Brook Street)의 헨델 하우스 박물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묘소, 그리고 해마다 크리스마스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할렐루야'. 그는 이민자였지만 영국문화의 일부가 됐다.
한국현실에 비추어 보면 헨델에게 배울 것이 꽤 있다.
첫째,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헨델은 오페라 사업에서 몇 번이나 무너졌다. 오늘날 한국 언론이라면 "오페라 사업 폭망, 투자자 손실 막대"라는 제목으로 도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형식(성악대곡)으로 방향을 틀었고 메시아를 남겼다. 전환의 능력이 생존의 조건이다.
둘째, 예술과 공공성의 결합이다. 헨델은 메시아로 번 돈을 자선에 썼다. 오늘날 한국에서 예술가들이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묻는 목소리가 높다. 헨델식 해법은 간단했다. 최고의 예술을 만들되, 그 과실을 가장 약한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었다.
셋째, 이민자와 다양성의 힘이다. 영국은 독일 태생 이민자의 음악을 자국의 유산으로 받아들였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선포로 시작된 헌정 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다시금 공동체의 가치를 묻고 있다. 누가 '우리'이고 누구를 포함할 것인가의 문제는 헨델의 삶에도, 지금 한국에도 유효한 질문이다.
넷째, 왕에게 뱃놀이 음악을 바쳤던 헨델의 현실감각이다. 예술가도 때로는 권력과 협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권력에 매몰되지 않았다. 고아들을 위해 음악을 바쳤고, 죄수들을 위해 공연수익을 내놓았다. 권력과 거리를 유지하되 사회로부터 고립되지 않는 예술가의 균형감각이 오늘날 한국에도 요청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헨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 어느 전임자보다 위대하다. 나는 그의 무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겠다."
정작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그 찬사는 200년을 건너 오늘도 울린다.
이발사 아들, 몰래 건반을 두드리던 소년, 사장에게 음악으로 사과하고 눈이 멀어서도 악보를 구술했던 사람. 헨델의 삶은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할렐루야', 그 한 마디가 지금도 울려 퍼지는 이유다.
2001년 영국 문화유산청(English Heritage)에서 런던 메이페어 브룩 스트리트 25번지(W1K 4HB, 웨스트민스터 시) 건물에 붙인 파란색 기념 명판.(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