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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 세상이야기

사후 179년, 결혼식장에 늘 울려퍼지는 멘델스존

작성자칼을든폴|작성시간26.06.17|조회수0 목록 댓글 0

유대인이란 이유로 나치에 지워진 천재 작곡가
어릴 적부터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비견된 신동
누나 파니도 450곡 남겨, 차별 탓 동생에 가려
스무 살에 묻혔던 바흐의 '마태수난곡' 재발굴
객석에 헤겔과 하이네...음악사 물줄기 바꾸어
바그너의 질투에 시달렸는데 사후 대놓고 격하
최초 근대적 음악학교 라이프치히 음악원 설립

천재 집안의 막내아들, 아니, 둘째 아들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1847). 이름부터 길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이 사내는 38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합창곡, 피아노곡을 쏟아냈고, 지휘봉까지 잡았으며, 독일 최초의 근대적 음악교육기관까지 세웠다. 모차르트(1756~1791)와 베토벤(1770~1827)에 비견되는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집안 내력이 예사롭지 않다. 할아버지는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1729~1786)이다. 계몽주의 시대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이마누엘 칸트(1724~1804)와 지성 경쟁을 벌이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에서 유대인 권리신장에 앞장선 사람이다.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1776~1835)은 은행가였는데, 평생 이런 말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나는 한때 유명한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이제는 유명한 아들의 아버지다."

스스로를 유명한 집안의 연결고리 정도로 여긴 셈이다. 그 겸손이 각별하기도 하고, 어딘가 씁쓸하기도 하다.

펠릭스에게는 누나 파니(1805~1847)가 있었다. 파니는 동생 못지않은 재능을 가졌으나 19세기 유럽사회는 '여성이 공개적으로 음악을 발표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음악은 펠릭스의 직업이 될 것이지만, 너에게는 장식품으로 남아야 한다."

재능이 같아도 성별이 달랐다는 이유 하나로 한 사람은 역사에, 다른 사람은 그늘에 묻힌 것이다. 파니는 45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지만 생전에 공식 발표한 것은 극히 일부였고, 훗날 그녀의 곡 한 편이 "F. 멘델스존"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남동생 작품으로 팔린 적도 있었다. 1970년 파리 서점에서 발견된 그 악보가 파니의 것임이 확인된 것은 2010년의 일이었다.

 

멘델스존(위키피디아)

스무 살 청년이 잠든 바흐를 깨우다

펠릭스 멘델스존이 역사에 남긴 가장 놀라운 일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작품이 아니라 남의 작품을 되살린 것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가 세상을 떠난 뒤 79년이 지나도록, 그의 걸작 〈마태 수난곡〉은 먼지 속에 잠들어 있었다. 당대 음악계는 바흐를 "메마른 수학자"라며 홀대했다.

1829년, 스무 살의 멘델스존은 베를린에서 이 곡을 무대에 올렸다. 객석에는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가 앉아 있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이후 바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하나"로 재평가되었다. 한 청년의 선택이 음악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바흐를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1843년에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세웠다. 독일 최초의 근대적 음악학교였다. 그는 초대 원장을 맡았고, 친구 로베르트 슈만(1810~1856)도 교수로 초빙했다. 오늘날 이 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 '멘델스존-바르톨디 음악예술대학'으로 불린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멘델스존 하우스 박물관 내 작곡가의 서재(위키피디아)

죽은 뒤에 더 미움 받은 사람

이쯤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그는 1850년 〈음악에서의 유대성〉이라는 글을 익명으로 발표하며 멘델스존의 음악을 "영혼이 없는 모방"이라 깎아내렸다. 멘델스존을 직접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누가 봐도 명백했다. 바그너가 그 글을 쓴 데는 예술적 논쟁보다 질투와 경쟁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오늘날 음악학자들의 중론이다.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이름은 독일 음악계에서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나치 정권(1933~1945)이 들어서면서 그것은 공식 말살로 이어졌다. "유대인 작곡가의 음악은 연주할 수 없다"는 칙령과 함께, 라이프치히 광장에 세워진 멘델스존 동상도 끌어내려졌다. 그 동상이 다시 세워진 것은 1997년, 나치가 동상을 파괴한 지 58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기묘하다. 바그너의 음악은 히틀러의 애창곡이 되었고, 그가 오늘날에도 "천재냐 악인이냐"를 두고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반면,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어딘가의 결혼식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영국 문화유산청에서 설치한 파란색 명판이 런던 벨그레이비아의 호바트 플레이스 4번지에 있는 멘델스존의 영국 거주지를 안내하고 있다.(위키피디아)

한국사회에 묻는다, 영웅이 필요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멘델스존의 삶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

첫째, 뿌리를 지운다고 뿌리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멘델스존 집안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름에 '바르톨디'를 붙였다. 유대인 냄새를 지우려는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나치는 그 개종을 인정하지 않았다. 뿌리를 숨기거나 바꾼다고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편견을 가진 쪽의 문제이지 뿌리를 가진 쪽의 문제가 아님을 이 집안의 역사는 보여준다. 한국사회에서도 출신지역, 학벌, 집안 배경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이 여전하다. 멘델스존은 묻는다.

"당신들은 무엇을 지우려 하는가?"

둘째, 파니 멘델스존의 이야기는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재능이 있어도 성별과 사회적 시선 때문에 문이 닫히는 일, 이름이 오빠나 형제의 것으로 넘어가는 일, 뒤늦게 재평가되는 일, 이것이 19세기 독일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인가. 한국 문화·예술계, 학계, 정치계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다. 파니는 죽고 나서 163년 만에 자기 작품을 돌려받았다. 살아 있는 동안 돌려줄 수는 없었을까.

셋째, 멘델스존은 과거를 현재로 되살리는 데 탁월했다. 그는 79년 동안 잠자던 바흐를 깨웠고, 바로크 음악의 유산을 낭만주의 시대에 이어 붙였다. '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라는 편견을 거스른 행위였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선포로 한국사회는 다시금 권위주의의 망령을 목격했다. 그 망령에 맞서는 힘은 역사에 대한 기억에서 나온다. 멘델스존이 먼지 쌓인 악보를 꺼내 들었듯, 우리는 헌정파괴의 역사를 먼지 속에 묻지 않아야 한다.

넷째, 제도를 만드는 일이 개인의 재능만큼 중요하다. 멘델스존은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그가 세운 라이프치히 음악원은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 그 학교는 수많은 음악가를 길러 냈다. 개인의 빛나는 업적이 사라져도 제도와 구조는 남는다. 한국사회가 이른바 '영웅'을 기다리기보다, 영웅이 필요 없는 구조를 만드는 데 더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드라이팔티히카이츠프리드호프에 있는 멘델스존의 묘비.(위키피디아)

38년의 짧은 삶, 그리고 긴 그의 음악

1847년 5월, 누나 파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멘델스존은 그 충격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4일, 그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38세였다. 모차르트(35세 사망)보다 세 살을 더 살았지만, 그 세 살이 라이프치히 음악원과 바흐 부활을 가능하게 했다.

죽은 뒤 그의 이름은 지워지고, 동상은 끌어내려지고, 작품은 연주 금지 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결혼식장의 풍금은 멈추지 않았고, 바흐는 다시 살아났으며, 파니의 악보는 파리의 한 서점 구석에서 163년을 버텼다.

역사는 길다. 그리고 음악은 더 길다.

 

루체른 풍경 – 멘델스존의 수채화, 1847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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