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태풍 전야

작성자황현중|작성시간26.06.21|조회수4 목록 댓글 0

늙은 창문을 열고 낡은 풍경을 바라본다
이제 상처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없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왕거미 한 마리가 망막을 뛰놀며 안개를 엮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가
다리를 절룩이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시야를 건너간다
죽은 자의 배꼽처럼 별이 뜨고
개 짖는 소리가 골목의 음식쓰레기를 핥고 있다

어릴 적 나는 한때 가난한 주소를 버리려고
기차를 타고 아무 역에서나 내려 버렸다
밤꽃 냄새 나는 그때 역전 유곽의 풋풋한 아가씨에게
들꽃 시리즈 우표를 붙여주면
계절마다 내 가슴에 젖은 꽃향기가 배달될까
나는 지금도 울면서 노래를 짓는 새들이 부럽다

지혜로운 내 친구는 하수구를 통해 먼 바다로 떠내려갔다
연어 같은 그 친구는 연어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산호초 아름다운 바다에서 새로운 주소를 찾았다
나의 새 주소는 어디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골목골목 장미꽃 바람이 범람하는 밤이다
분홍분홍 속삭이다 붉은 피가 흐른다
겨드랑이에 묻어 온 한 점 더운 바람이 모반을 꿈꾸고 있다

태풍 전야,
세상의 모든 창문이 몸부림치고 있다
일제히 꽃은 지고 사나운 가시만 남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늙는 속도에 휘청거리며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는 기차를 타지 못하고*
삶의 곳간에 마지막 남은 빛으로 어둠을 끓이고 있다

*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글 중 일부 변용. 《반 고흐, 영혼의 편지》2015년 5월, 신성림 역.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