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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실제 시인이 아닌 내포 시인으로 창작한다- 성공한 우주적 소통

작성자이상옥|작성시간11:16|조회수50 목록 댓글 1

15화: 실제 시인이 아닌 내포 시인으로 창작한다

-성공한 우주적 소통

 

 

                                                     심야의 맹인악사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음률로 별들의 귀를 세우는

 

 

■ 견자의 시학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예술, 그중에서도 언어의 정수인 시는 오랫동안 선택받은 소수, 즉 천재들의 전유물로 인식돼 왔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시인을 '신성한 광기'에 사로잡힌 존재로 봤다. 플라톤은 『이온』에서 시인은 자석의 힘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신의 영감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는 진실을 읊조리는 '거룩한 통로'라는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순간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에 해당한다. 시인이 설령 진리를 말할지라도 정작 자신은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른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 시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비이성적인 슬픔이나 분노를 부추기는 점을 경계하며 지도자는 엄격한 이성의 통제를 행사해야 하기 때문에 접신된 광기가 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계했다. 실상 플라톤이 시인을 국가에서 추방하려고 한 것은 시의 매혹의 공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인이 신적 영감을 받아 내뱉는 그 찰나, 인간의 혼을 얼마나 강력하게 흔드는지 알았기에 그 통제 불가능한 에너지를 격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영감설은 근대 미학의 정점인 칸트에 이르러 '천재(Genius)'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확립된다. 칸트에게는 예술이 단순히 규칙을 배우는 것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예술가는 스스로도 그 원리를 설명할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며, 그 재능은 교육될 수 없는 '자연의 선물'이라봤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천재론은 시인은 대중이 보지 못하는 세계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예언자이자 고독한 영웅으로 신격화됐다.

 

무릇 예술 창작의 주체는 예술가이다. 그렇다면 한 줄의 시라도 쓰려면 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생산해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고 나도 시인이 되었다. 나는 천재가 아닌 필부필부에 불과한데도 어찌 시인이 되었는가.

그것은 현실공간 속의 예술가와 실제 창작하는 예술가는 분리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금방 의문은 풀린다. 현실공간 속의 실제 시인은 천재가 아니라도 내포 시인으로 변신하면 천재가 되는 것이다.

 

'내포 작가'라는 개념은 웨인 부스에 의해 처음 제안돼 시모어 채트먼에 의해 더욱 정교한 의사소통 모델로 체계화되었다. 웨인 부스는 1961년 저서 『소설의 수사학』에서 작가가 글을 쓸 때 실제의 자신과는 다른 '제2의 자아(Second Self)'를 창조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내포 작가'라고 불렀다. 현실 속의 실제 작가는 작가라도 하더라도 한계를 지닌 일상인이다. 이런 일상인이 그대로 창작자로 투여됐을 때는 예술적 완성도를 높일 수가 없다. 창작하는 순간에는 고도화된 이상적 자아(내포 작가)여야 한다. 채트먼은 1978년 『서사와 담론』에서 부스의 개념을 수용하여, 문학적 소통의 층위를 보다 과학적으로 도식화했다. 실제 작가-내포 작가- 화자-청자-내포 독자-실제 독자라는 모델이다. 여기서 함축적 작가는 텍스트 내부에 실재하는 목소가 아니라, 텍스트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이자 설계자이다. 내포 작가는 직접 말하지 않지만, 어떤 화자를 내세워 무엇을 말할지를 결정한다. 부스나 채트먼이 말하는 내포 작가는 실제 작가보다 더 풍부한 사유의 확장성을 지니는 증폭된 자아다.

 

디카시에 있어서도 창작자는 실제 시인이 아니라 내포 시인이다. 실재 시인은 창작에 돌입하는 순간, 자신의 일상적 자아를 탈피하여 텍스트 전체를 지배하는 미학적 원리로서의 '내포 시인이 되어야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현실 공간 속의 나는 평범한 일상인이라도 날시를 포착하고 시적 충동을 받는 순간 내포 시인이 돼 플라톤이나 칸트가 말하는 특별한 존재로서 일반 대중이 못 보는 견자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랭보가 말한 '견자'는 단순히 사물을 눈으로 보는 자가 아니라, 미지의 영역을 꿰뚫어 보는 투시이다. 랭보는 "나는 타자이다"라고 선언했다. 시인이 주관적인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객관화하여 시적 대상이 스스로 말을 하게 만드는 상태를 지향한다. 이는 디카시에서 날시가 유발하는 강렬한 시적 충동과도 맞닿는다. 그런 견자가 되기 위한 방법은 랭보는 '감각의 착란'을 제시한다. 랭보는 인위적으로라도 일상적인 감각의 틀을 깨부숴야 한다고 보았다. 기존의 도덕, 관습, 이성적 판단을 유보하고 감각을 극단으로 몰아붙여 심연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시인의 몸은 세계가 통과해 가는 통로가 된다.

 

디카시를 현실공간의 시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내포시인이 쓰는 것이라고 할 때 내포시인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내포 시인은 어떤 신적이인 존재가 접신해서 나를 통해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랭보처럼 기존의 모든 자아를 잃어버림으로써 사물 존재의 개시를 본다는 관점 등 여러 방면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디카시 「심야의 맹인악사」 는 중국 정주경공업대학교 초청으로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에 체류할 때, 종종 밤에 캠퍼스 인근을 산책했는데, 그때 포착한 것이다. 심야 산책길이라 도로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연주하고 있는 맹인악사를 그냥 예사로 지나쳐 버리지 못하게 하는 뭔가 내게 작동하는 것을 느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음률로 별들의 귀를 세우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음률로 연주하는 맹인악사의 연주를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이것은 과학적이고 객관적 진술이다. 아무 들어주지 않는 심야의 도로변에서 맹인악사가 혼자 연주하고 있는 풍경은 일상이다. 랭보가 말하는 견자는 이 일상의 감각의 틀을 깨부셔 버림으로써 별들이 귀를 세우고 듣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심야의 도로변에서 울려 퍼지는 맹인악사의 연주는 사람의 발길이 끊긴 밤의 공간에서 사회적 의미를 상실한 듯 보인다. 그렇다고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연주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랭보의 견자는 세계를 해석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시인은 감각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세계가 통과하게 허용한다. 이 디카시에서도 맹인악사를 바라보며 연민이나 사회적 비판의 언어를 호출하지 않는다. 시인인 나는 그저 그 장면 앞에 멈춰 선 몸으로서, 세계가 이미 발화하고 있음을 감각한다. 이 순간 포착된 날시는 하나의 사유 이전의 사건이며, 디카시 창작의 원천이 된다. 흥미로운 역설은 맹인이라는 존재의 위치다. 보지 못하는 그는, 오히려 보는 자들보다 더 깊은 차원에 닿아 있다. 랭보가 말한 견자의 조건은 시각의 예민함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지각의 폐기다. 맹인악사는 시인 대신 그 조건을 이미 육체적으로 실현한 존재다. 그는 인간 사회의 시선을 상실한 대신, 우주와 직접 접속한 몸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그의 음악은 누군가에게 들리기 위해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진동으로서 공기 속에 퍼진다. 인간은 부재하지만, 하늘의 별이 그 연주를 듣는다. 그것은 의미의 방향 전환이다. 사회적 소통이 끊어진 자리에 우주적 감응이 들어선다. 랭보가 시를 통해 도달하려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 인간 언어의 실패 이후에 열리는 다른 차원의 언어였다. 별이 듣는다는 설정은, 이 연주가 더 이상 실패한 소통이 아님을 선언한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을 넘어선 완결된 발화다. 사진기호는 이 견자의 세계를 이미 충분히 말하고 있다. 어둠, 고독한 도로, 홀로 서 있는 연주자의 형상은 인간 중심적 의미를 배제한 채 하나의 침묵 어린 장면을 구성한다. 문자기호는 그 위에 의미를 덧붙이지 않는다. 다만 “누가 듣는가”라는 질문의 방향을 인간에서 우주로 돌려놓을 뿐이다. 이 최소한의 시적인 언술은 설명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세계가 스스로 말할 여백을 확보한다. 이 디카시는 실패한 인간 언어가 아니라 성공한 우주 언어의 장면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 연주는 별에게 닿고, 밤의 질서 속에 흡수된다. 여기서 시인인 나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몸으로 통과시키고 있다.

 

아르튀르 랭보

 

 

■ 누구나 시인의 잠재성을 지닌다

 

 

흔히 특별한 존재만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와 나는 다르다고 쉽게 말한다. 이슈타인은 천재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능력을 다 발휘한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예술가, 철학자로서도 가능성은 포기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잠재성과 현실성을 구분해서, 잠재성은 언제나 현실성보다 크다고 봤다.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피조돼 무한한 잠재성을 지니지만 그것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훨씬 적은 것만 현실화한다. 아인슈타인이 천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잠재성 가운데 과학자로서 극단적인 수준으로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성서의 말씀을 원용해도 좋다. 나 자신만 바라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왜소한 존재다. 그러나 능력 주시는 자 안이라는 말을 철학적으로 밀고 나가면 보통 인간의 잠재성도 결코 미미하지 않다. 인간은 철학적으로 누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며, 바로 그 점에서 누구나 특별해질 수 있다. 시를 쓸 때 일상의 나만 생각하지 말고 내포 시인으로 시를 쓴다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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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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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병수 | 작성시간 1시간 59분 전 new 다가올 새해에는 속에 있는
    나를 얼마나 꺼내놓을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겉만 핥고 있는데

    교수님
    한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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