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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의 보석!
시간이 멈춘도시 오르비에토(Orvieto)
이태리 움브리아주 오르비에토
오르비에토
지진과 침식 등으로 하여 자연적인 육지의 <섬>으로 되어버린 오르비에토 성은 역대의 교황들도 위급한 상황에 이곳으로 피했던 곳이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고 <성문>은 한곳밖에 없는 곳으로 에투리아인들이 살던 곳인데 지금도 성안에는 <에투리안박물관>,
<에투리안 우물>등이 있으며 카라(Cara)라 불리우는 요새가 있다. 그 뜻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성곽인데 요새가 함락되면 마지막으로
그곳에 모여 최후 한사람까지 남아서 싸운다는 그런 뜻에서 지어진 것이라 하겠다. 주로 볼만한 곳은 포쏘 디 산 파트리씨오
(산 파트리씨오의 우물)와 두오모 성당, 그리고 성 자체를 천천히 거닐면서 보는 것이다.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96㎞ 떨어진 팔리아강(江)과 키아나강(江)의 합류점에 있다. 해발고도 195m의 바위산 위에 위치하며, 케이블카로
오르내린다. 주변의 비옥한 농업지대의 유통·산업·관광의 중심지이다. 부근의 농촌에서는 포도가 많이 생산되며, '오르비에토'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는 백포도주가 유명하다. 연철·도자기·레이스 등의 수공업이 이루어진다. 철도와 도로를 통해 로마, 피렌체와 연결된다.
고대 에트루리아의 12개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뒤에 로마의 도시가 되었으며, 로마 시대 말기에는 우릅스베투스라고 불렸다. 12세기에
자치체가 될 때까지 토스카나 백작령의 중심지였다. 1448년에는 교황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290년에 착공된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고딕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내부의 벽기둥에 있는 부조(浮彫)가 유명하며, 산브리치오 예배당
의 내부는 프라안젤리코(Fra Angelico)와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i)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주교관저와 포폴로 궁전, 파피
궁전 등 13세기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다. 파피 궁전의 일부는 시민박물관이 되어 미술작품들과 볼시니라고 하는 인근 에트루리아인(人)의
고분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산안드레아 교회(11∼12세기)와 산도메니코 교회(1233∼1264), 공원으로 쓰이는
옛 요새(1364), 산패트리티우스 샘 등 유명한 유적지가 있다.
전형적인 움브리아의 풍경과 맞물려진 오르비에또의 장관

전형적인 움브리아의 풍경과 맞물려진 오르비에또의 장관

완전하게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

중심가의 국민 광장

두오모 성당 정면. 거의가 모자이크와 조각으로 장식 되었는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성경 이야기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조각되어 있다.

1260년 이 도시 근처에 있는 볼세나 호수에서 기적이 있었다고 해서 교황 우르바노 4세에 의해서 건설된 두오모 성당.
고딕 형식이 많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고딕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성당의 내부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건축가 상갈로가 판 우물. 깊이가 50미터가 넘고 양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건설했는데 내려가는 양들과
올라가는 양들이 서로 만나지 않게 길을 달리해서 건설했다.

우물 내부

옛 신전터

해마다 여름이 되면 중세 축제가 벌어진다.















두오모(duomo)란 영어의 돔(dome)과 같으며 라틴어(語)의 도무스(domus)를 어원(語源)으로 한다. 영어의 돔은 반구형(半球形)의 둥근 지붕,
둥근 천장의 뜻으로 사용되는 데 대하여 이탈리아어의 두오모와 독일어의 돔은 대성당(大聖堂:cathédrale)을 말한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주교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을 말하는데, 큰 도시에는 모두 두오모 성당이 있으며, 그 중 밀라노와 피렌체의 것이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 두오모는 단순한 종교적 장소뿐만 아니라 지역민에게 가장 중심적인 장소인데, 과거 도시계획자들은 한 도시를 건설
할 때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두오모를 배치한 후 주변에 시민광장, 관청, 공공시설, 상가 등을 배치하였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이탈리아 고딕의 대표적 건축으로 1290년에서 1330년 사이에 세워졌다. 시에나성당에서 암시받은 R.마이타니가 설계한
아름다운 정면은 예각(銳角)의 장식 박공(牔栱)이나 장미창(薔薇窓) 등 고딕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작은 첨탑(尖塔)에
지나지 않는 탑을 비롯, 전면(全面)을 장식하는 화려한 모자이크의 회화적 효과나 전체를 지배하는 도식적(圖式的) 구성과 명쾌한 프로포션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시에나성당과 같이, 당시에 유행한 고딕 양식을 핑계 삼아 오히려 매우 이탈리아적 전통이 농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부의 산 브리치오경당에는 L.시뇨렐리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있다.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이태리의 가장 위대한 성당중의 하나인 두오모를 보기 위해서이다. 1300년 초 이 건축의 책임을 맡았던
로렌죠 마이타니는 세 부분의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 정면을 고안하게 되는데 정면의 뾰족탑 형태는 이태리 고딕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로 꼽힌다. 특히 두오모성당 정면의 대리석 조각은 지옥에 처한 사람들의 구원의 손길을 펼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것인데 그 조각예술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치맛자락에 찍힌 무늬까지 정교하게 조각 되여 있음을
볼 수 있다. 세밀하게 묘사한 33개의 건축물과 152개의 조각품, 90개의 모자이크화가 장식된 성당의 정면은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인상
적이며 성당의 내부 또한 유명화가들이 장식한 프레스코화가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룬다.
이 성당은 ‘볼세나의 기적’을 기리기 위해 1290년부터 300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그 기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1263년 독일인
사제 프라하의 베드로(Peter of Prague) 신부는 로마로 순례를 가던 도중 볼세나(Bolsena)에서 묵게 되었다. 그는 경건한 사제였으나
축성된 밀병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한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그가 순교자 성녀 크리스티나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에서 미사성제
를 거행하고 있었는데, 성체 축성을 시작하자마자 축성된 밀병으로부터 피가 흐르기 시작하여 신부의 손가락을 적시고, 제대와 성체
포(聖體布) 위로 흘러내렸다. 신부는 몹시 당황하였다. 처음에는 피를 감추려고 했으나 곧 그는 미사를 중단하고 마침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머물고 있던 이웃 도시 오르비에토(Orvieto)로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교황은 신부의 보고를 듣고 나서 그를 사면(赦免)하고
즉시 이 일을 조사하도록 성직자들을 파견했다.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교황은 그 교구의 주교에게 그 성체와 피묻은 성체포를
오르비에토로 모셔오도록 명했다. 추기경들과 대주교들, 그리고 그 밖의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교황은 친히 성체를 모셔오는 행렬을
맞았으며 성체와 성체포를 대성당 안으로 모셨다. 성혈이 묻은 성체포는 아직까지도 오르비에토의 대성당 안에 정중하게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 기적으로 격려되신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오르비에토에서 교서 <Transiturus>를 반포하는 가운데 새 대축일을 제정하였으며, 이 대축
일은 성령강림절 팔부 다음 목요일에 성체성사를 기념하여 지내게 되었다. 우르바노 4세 교황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에게 성체를 공경하는 기도문을 짓도록 명하셨다. 이 기적이 있은 지 1년이 지난 1264년 8월에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의 기도문을 소개하셨으며, 성체 축일(the Feast of Corpus Christi)을 설정하셨다. 오르비에토의 대성당을 찾아오는 많은 순례자들은
그 곳에 이어서 볼세나에 있는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으로 가서 그 기적이 일어났던 현장을 둘러본다. 성당의 북쪽 복도로부터 기적이
일어났던 소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체 축일 설정의 700주년이었던 1964년 8월에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기적의 성체포가 모셔져
있는 오르비에토의 대성당에서 미사성제를 거행하셨다. 12년이 더 지난 1976년에 바오로 6세께서는 볼세나를 방문하셨으며,
그 곳으로부터 그 때 필라델피아에서 열리고 있던 제 41차 국제 성체 대회에 테르레비전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교황께서는 성체가
“위대하고도 무진장한 신비”(a mystery great and inexhaustible)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체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믿고 또 성체를 모심으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시기에 합당한 몸과 마음의 자세는 무척 중요하다. 성체를 모시기에 합당치 않다면 그에 걸맞는 준비를 해야 한다. 죄가 있는 상태
에서 성체를 모시는 것은 독성죄에 해당된다. 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가 말한 바가 있다.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7)

오르비에토를 오르는 열차역입니다.

후니쿨레어(Funicolare) - 협궤열차 - 를 타고 10분정도 올라가야합니다 ^^ 경사가 매우 가파르군요 ㅡ.ㅡ
열차를 내리면 다시 버스로 5분정도 이동하면 오르비에토에 도착합니다.


가장먼저 눈에보이는것은 세계적인 성당인 오르비에토 대성당입니다 ^^

1290년부터 무려 300년에 걸쳐 축조된 대성당으로 밀라노, 피렌체의 두오모에 결코 뒤지지않는 화려함을 자랑합니다 ^^ 역시 똑딱이로는 한장에 잡히지 않는군요 ㅜㅡ

정말 사진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울정도로 장엄하며 전면에 새겨진 조각과 그림은 절로 고개가 숙여질정도로 화려합니다 ^^

300년의 공정이 말해주듯 조각 하나하나에 혼을 불어넣은것이 느껴지시나요 ?
정말 화려하고 웅장한 전면에 비해서 후면은 소박하지요?

후면의 문양이 죄수복같다고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

골목에서 잡아본 오르비에토 대성당입니다. 오르비에토 또한 많은 이태리의 도시들처럼 골목골목 볼거리가 많습니다 ^^

수금을 연주하는 집시를 만났습니다. 듣는사람이 없어도 묵묵히 곡을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이곳도 수많은 관광객들로 넘쳐나는군요 ^^
골목의 대부분은 상점으로 간단한 선물부터 고가의 예술품까지 다양한 물건들로 관광객들을 유혹합니다 ^^
거리에서 작은 음악회가 펼쳐지는군요 ^^
오르비에토에는 재미있는 시계가 있습니다. 사진을 찍은 시간은 오후 2시 40분경이었지만 시계를 자세히 보세요! 오후 8시 10분으로 시침과 분침이 거꾸로 되있지요? 물질화된 현대문명에 반기를 들고 태초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
오르비에토를 "Slow City"라고 부르기도하는 이유랍니다 ^^
언덕에 위치한 오르비에토는 전망이 탁월합니다. 한국이라면 조망권 따지면서 집값을 얘기했을지도 모릅니다 ^^

중세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오르비에토~

빠르게 빠르게를 외치는 일상생활을 벗어나 이처럼 천천히 거꾸로 세상을 돌아보고있는 오르비에토.
큰 호흡 한번하며 여유로운 마음을 오르비에토에서 얻어가는것은 어떨까요?
오르비에또는 이런 곳이라는 간략한 소개. 전세계 사람들이 다 모인 듯한 피렌체와 비교해서인지, 오르비에또는 참 조용한 곳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탈리아라는 (내 머리 속) 이미지와 달랐던 곳이었다.
아기자기하게 예쁜 곳이었다. 오르비에또 대성당.
입이 딱 벌어지는 곳은 로마 바티칸 내 베드로 성당인데, 오르비에또 대성당도 매우 좋았다. 특히 실내가
좋아서 딱히 종교가 없는 나지만 오래 앉아있었다.
골목 골목이 다 단정했고-
모로종탑(Torre del Morro)에서 내려다 본 오르비에토 풍경
오르비에토 시장(市長)이 slow policy 를 채택하고 이 도시의 차량를 모두 없애겠다고 공언했다지만
아주 가끔 비좁은 골목길을 달리는 소형 자동차를 만나게 된다. 정말로 자동차가 한대도 없다면
더없이 고풍스러울만한 골목 골목들이다. 음.. 그리고 사랑하는 그녀 또는 그와 함께 거닐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백포도주를 두어잔씩 걸치고 말이다.
모로종탑(Torre del Morro)에서 내려다 본 오르비에토 풍경
융기지형위에 요새형식으로 만들어진 도시인 오르비에토 관광의 시발점은 바로 사진에 보이는
대성당이다. 무엇보다 대성당의 전면(facade)이 대단한데 각 축대마다 새겨진 부조는 정말 일품이다.
오르비에토
오르비에트의 골목길 풍경
좌에서 우로 네번째 축대엔 최후의 심판(Last Judgement) 부조가 있는데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예배당 최후의 심판
벽화 못지않게 훌륭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부조를 만든 로렌조 마이타니(Lorenzo Maitani; 1310~1330)는
미켈란젤로보다 훨씬 시대적으로 앞서 태어난 사람이다.
이곳 로렌조 마이타니의 작품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 벽화와 유사한 점을 발견한 뒤,
생각한 것은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이 혹시나 미켈란젤로가 이 성당의 부조를 보고가서 그린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 벽화에서 보여준 미켈란젤로의 파격적인 창조성에 사실 놀라웠는데 어찌보면 그당시
미술계의 큰 흐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아쉬운 점은 나는 이 성당에 들어가보질 못했다. 골목 골목 누비며 사진 찍고 돌아다니다보니… 하루중 딱 두번 있는
오픈 타임을 놓쳐버렸다. 이 성당내부의 그림들이 훌륭한 작품이 많다는 것은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끝끝내 구입한
영어안내책자를 뒤적이며 알 수 있었다.
◈ 로마 근교의 소도시라 말할 수 있는 오르비에토를 걷는 기분은 내 경험상 스페인의 톨레도(Toledo)나 그라나다
(Granada) 구시가 골목길을 걷는 것 만큼 운치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 곳 오르비에토는 정말 특이한 지형위에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 백포도주의 맛, 그리고
대성당 파케이드(facade)의 아름다움과 내부의 그림들 때문에 추천해주고 싶은 여행지다.
로마에서 피렌체를 향해 100㎞쯤 가면 푸른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성채 같은 작은 도시,오르비에토를
만난다. 오르비에토는 세 가지로 유명하다. 하나는 이탈리아에서 대표적인 슬로 푸드 마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산 백포도주 ‘오르비에토’로 유명하다. 이곳 오르비에토 시장은 슬로
푸드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주민들을 자연친화적이고 생명존중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이끈다.나머지
하나는 오르비에토가 성체성혈의 기적이 일어난 성지이자, 아직도 중세풍의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신앙 도시라는 점이다. 이곳 오르비에토 두오모(대성당)는 우르바노 4세 교황이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 슬로 푸드를 즐기는 중세풍 도시
무엇이든지 예술로 승화하는 능력을 타고난 이탈리아 사람들의 기질과 문화를 잘 볼 수 있는 성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르비에토이다. 피렌체, 볼로냐, 베니스, 로마 등 이탈리아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이탈리아 여행’을 쓴 괴테가 왜 이렇게 아름답고 경건한 오르비에토에 다녀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영혼이 맑아지고, 예술과 신앙이 자연 안에서 하나됨을 느낄 수 있다.
로마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여 달려와서 오르비에토 버스정류소에 내리면, 다시 산악궤도열차를
타야 오르비에토 두오모에 갈 수 있다. 테너 파바로티의 음성으로 즐겨 들었던 이탈리아 민요
‘푸니쿨리 푸니쿨라’의 본고향으로 가는 것이다.푸니쿨리차를 타고 7, 8분 올라가면 오르비에토
성문에 다다른다.
고도 300m의 화산암에 자리잡은 오르비에토 성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큰 도로하나 없이 푸른 나무에
둘러싸인 중세의 돌집, 벽돌집들이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다. 참 예쁘다. 좁은 골목길을 끼고, 집집마다
화분이 놓여진 아름다운 골목길을 걷다보면 천국이 따로없다 싶다. 빨리빨리도 없고, 관광객이
들어와도 크게 살 것을 강요하지 않고, 성물을 파는 가게들만 크고 작은 교회 가운데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다.자동차가 거의 없는 오르비에토의 거리에 서면, 무엇이 우리의 삶에 안식과 기쁨을
주고, 평화와 예술을 창조해내는지 저절로 느껴진다. 정신없이 바쁘게, 앞만 쳐다보고 사는 게 과연
옳은가?
◈ 성체에서 피가 흘러내리다
오르비에토의 두오모(Duomo·대성당)는 '볼세냐의 기적'을 기리기 위해 1290년부터 300년
동안 건립된 주교좌성당이다.하늘궁전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고딕 양식으로 하늘에 닿을 듯 자리
잡고 있는 오르비에토의 두오모는 기적이 일어난 현장이다. 13세기, 보헤미안 사제인 프라하의
베드로는 매일 먹고 마시는 성체성혈이 과연 그리스도의 몸과 피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신앙심을 다잡기 위해 1263~1264년 로마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제자였다가, 부활한 예수로부터 너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 거듭받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라는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하여서 교회의 반석(초대 교황)이
된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찾아 흔들리는 신앙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로마로 돌아오던 길에 오르비에토와 지근거리인 볼세냐의 산타 크리스티나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그는 또다시 시험에 들었다. “과연, 이 성체성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일까.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그분일까.”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참존재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의구심으로
갈등하던 그는 깜짝 놀랐다. 성찬의 전례를 하던 중에 성체에서 “뚝, 뚝” 피가 흘러내렸다.
성체에서 흘러내린 피는 사제의 손가락을 적시고, 제대와 성체포 위로 흘러내렸다.
◈ 성체성혈대축일 지정
프라하에서 온 사제는 마치 저 위에서 제맘 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 몹시 당황하였다.
처음에는 피를 감추려고 하였으나 곧 미사를 중단하고 볼로냐 인근 마을인 오르비에토에
주석하고 있는 교황(우르바노 4세)을 찾아뵈었다. 교황은 보헤미안 사제 베드로의 보고를 듣고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가 보고한 사실이 진실임이 밝혀지자 우르바노 4세 교황은 피를 흘린
‘그 성체’와 피묻은 성체포를 오르비에토로 모셔오도록 명하였다.
모든 것을 조사하니 진실이었다. 곧 ‘성체의 기적’으로 선포되었다. 이 ‘성체의 기적’을 기념하여
14세기부터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오르비에토의 두오모에 가면 지금도 피묻은 성체포를 볼 수 있다.신앙이 곧 삶이요 삶이 곧
신앙임을 확인할 수 있는 오르비에토 성지를 찾으면 꼭 성체성혈의 기적이 나타난 성체포를
가슴깊이 느껴볼 일이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보석 중의 보석이다. 교황청이 공인한 성체성혈의 기적이 일어난 지
844년. 그 기적의 성체포를 오늘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은총이다. 마치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축소판처럼 아름다운 성물함(1339년 제작) 안에 성체포가 모셔져 있다.숨 죽이고 가만히 본
성체포에는 금방 흘러내린 선혈처럼 붉지는 않지만, 아직도 혈흔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물의 알파요, 오메가인 하느님 아버지가 프라하 지방의 경건하면서도
뜨거운 한 사제를 구하고자 한 그 사랑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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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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