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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04/15~1519/05/02)
한 점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와 해석은 미술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접근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미술사는 물론이거니와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좀더 포괄적인 접근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화가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며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부터다. 예술적
아름다움이 꽃폈던 르네상스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가 사랑했던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의 작품 세계를 읽는다는 것은 르네상스를 읽는다는
것과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인체비례> 이 그림은 다빈치가 비트루비우스 제정초기에 슨
건축10서에 나와있는 인체비례에
대해서 쓴 대목을 읽고 바로 컴퍼스와 자를 들고 그렸다고 한다.
사각형과 원 면적 비례가 1:1.000373이라고 한다.
예술의 꽃 & 천재의 시대, 르네상스
순수 예술과 대중예술의 차이점중 하나는 바로 예술가의 이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 하는가로 비교해 볼 수도 있다. 대중예술은 이름보다 그
내용물이 얼마나 대중과 친숙 한가로 힘을 갖지만 순수예술은 누구의 작품인가로 무게를 지니기 때문이다. 미술사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부터
거론되지만 화가의 이름은 르네상스부터 가능하다, 이전에 미술품을 제작한 화가가 왜 없겠는가 만은 제작된 결과물을 위해 존재하는 한낱 노동자 일뿐
그들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세 시대에 그래도 수많은 작품들이 남아 있지만 발견된 지역과 현존하는 지역만 거론
될뿐 누가 제작한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14C 시작된 르네상스. 문화예술의 전성기로 미술사는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는데 또하나 빼놓을수 없는 것이 바로 승격된 화가의
위상이다. 당시 음악보다도 위상이 떨어졌다. 일상기술로서의 미술은 자유기예(Liberal arts)의 한 분야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발전했고 미술과 과학의 접목으로 미술의 지위를 승격시킨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천재화가 출현으로 미술사에 화가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던가 그 천재들이 탄생한 것은 바로 '재탄생'을 뜻하는 르네상스 시기. 그리스. 로마의
고전문화를 부흥시키며 모방과 재발견을 통해 창조의 전성기를 이룬 것이다.
아름다운 근육과 신체의 비례, 그 대표작 비너스와 같은 8등신의 미의 기준이 형성된 그리스, 그것을 계승한 로마의 예술이 중세시대
종교적 이유로 잠식되고 메시지 전달을 위해 도구화 되었다. 조형적 아름다움보다 성경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적이 중요했던 중세. 그래서 중세를
예술의 암흑기라 하지 않던가. 중세는 어떻게 문맹인들에게 시각적으로 이야기를 전달 할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예술적으로는 도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이 고전미의 부활을 부르짖으며 다시 아름다움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르네상스 인 것이다. 정확한 신체구조와 비례를 알기위해
해부학을 연구하게 되고 나체모델을 통해 체계적인 데생을 하며 고전적 아름다움을 재발견 한다. 하지만 당시 천재화가들이 르네상스의 틀보다
위에 있는 것은 재발견을 넘어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체를 통해 우주를 발견한 레오나르도다빈치. 약 30여구의 시체를 해부하여 인간의 신체를
완벽한 기계로 여기고 신체 각부분을 복잡한 기계로 간주 하였다. 손의 힘줄을 연구하여 건반을 선으로 잇는 문제를 해결하였고 후두를 연구하여
녹음기를 설계하고...
그의 관찰과 연구는 신체뿐아니라 자연으로 확대되었고 그러한 관찰로 원리를 터득하고 과학적인 발명들을 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인류의
돌연변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의 천재성과 불후의 명작을 포함해 인류의 황금기. 르네상스를 빛낸 천재화가로 단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꼽는다.
르네상스를 빛낸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화가. 조각가. 음악가. 건축가. 발명가. 과학자.
해부학자... 지질학. 식물학. 수력학. 기계학. 입체기하학. 운하공학. 자연철학....
정말 화난다. 이걸 어찌 한사람의 업적으로 나열할 수 있단 말인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기가 막혀 지는 것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의 세계다.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든 적이 있다. 혹시 이 세상의 완성을 서두르려고 신이 보낸 메신저가
아닐까. 인간으로 탄생시켰으니 무한정 생명을 연장할 수는 없고, 신의 급한 마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허물을 쓰고 이것저것 건드려 역사를 앞당긴
것 아닐까. 많은 것들을 완성시키기에는 시간들이 부족했을 테고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거론할 때 급한 성격과 빠른 사고의 진전으로 미완성이
많다고 하지 않던가. 비록 그 누구도 그 만큼의 업적을 성취하기엔 벅차지만 어쨌듯 그가 인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투철하고 끊임없는 관찰력으로
창의성의 원천을 삼았다는 것이다. 미술을 전공한 나도 가끔은 조물주의 창조물인 신비로운 자연들 앞에서 더 이상의 예술이 있을까 라는 무력감에
빠질 때도 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상의 진리와 미를 이해할 수 있는 창조물을 복제하며 그 원리를 터득하여 과학적 창조물을
생산해낸 것이다.
"모든 경험은 하나의 아침, 그것을 통해 미지의 세계는 밝아 온다. 경험을 쌓아 올린 사람은 점쟁이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경험이 쌓일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슬기를 깨우칠수록 감정을 억제하는
법이다. 경험이 토대가 되지 않은 사색가의 교훈은 허무한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멀지 않은 안치아노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러한 환경 탓에 그는 늘 들과 산을 외롭게 돌아다니면서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고
관찰하며 이때의 체험이 평생동안 자연과 사물을 세밀히 연구하고 기록하는 과학적, 예술적 습관을 길러 주게되었다고 한다. 아들의 재주를
발견한 아버지가 그가 14살 되던 때 피렌체 유명한 화가 밑으로 그림 공부를 보냈고, 스승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재능을 보고 아예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다는 에피소드는 그의 어려서부터의 탁월한 재능을 입증해주는 단적인 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탁월한 남다른 미술적 재능은 여러 가지
거론된다. 그의 관찰과 연구를 입증하는 노트. 더구나 '거울 쓰기'로 기록된 그만의 거꾸로 글쓰기는 예사롭지 않다.
당시 발견되면 감옥 행임을 알면서 남몰래 목숨걸고 감행한 해부. 화폭에 담기는
인체에 대한 궁금증이 직접 사람의 몸을 뜯어보게 충동질했던 것이다. 더구나 살아있는 살결표현을 위해 윤곽선을 흐릿하게 표현하는 '스푸마토
기법'의 창조. 그 밖의 그만의 시도는 아니었어도 원근법, 유화물감 사용 등은 미술사의 수많은 예술가의 몫을 한몫에 거둔 만큼이고 단지 미술을
떠난 그의 과학적 발명품만 보더라도 비행기계, 악기 설계, 무기개발, 운하건설, 접을 수 있는 다리, 하수도, 성을 깨뜨리는 장비, 장갑차...
더구나 미국 남북전쟁에 그대로 사용된 증기 대포와 현대 총의 시조인 다총열 소총의 발명은 목구멍에 치미는 비명마저 빼앗아 간다.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있지만, 안 봐도 눈에 선한 그 작품 보다 더욱 르네상스다운 작품 <레다와 백조>를
골라보았다.
레다와 백조
르네상스 천재들의 영감이 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미술에서 획득되었음을 입증1/16/2001하는 그림. 당시 고대에 대한 열정은 신화나
고전에서 따온 주제들을 그림에 담았고 고대에 이미 실현되었던 조화와 비례의 개념을 통한 고전적 아름다움의 재발견이 잘 담기 그림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즐겨 다룬 레다(인간의 오만, 부도덕을 벌하는 여신)과 제우스가 변신한 백조의 신화를 소재로한 이 그림은 고전의
이야기를 차용하였지만 그만의 개성이 곳곳에 베어있다. 수많은 자연의 관찰을 통한 드로잉이 풀밭의 꽃들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으며 움직임이 있는
인체의 누드는 정확한 비례와 근육을 보이고 먼 곳의 풍경까지 담아 2차원의 화폭을 3차원으로 끌어올린 원근법은 손색없다. 선명한 색감을 구사한
유화로 그려진 이 그림이 르네상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일면을 함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491년, 새로 지어진 수도원의 벽화를 그릴 유명한 화가를 찾던 로마 교황청은 당시 이태리에서 명성이 높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불러
'성서속에 있는 예수의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광경을 벽화로 그려줄것을'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부탁을 받은 다빈치는 그때부터 실제로 그림의 모델로 쓰일 사람들을 찾아다녔다고 하며, 오랜 엄선끝에 1492년 예수의 모습을
상징할수있는 깨끗하고 선하게 생긴 19세의 젊은이를 찾은뒤 본격적인 작업에착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빈치가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게된 로마의 시장은 "로마의 지하감옥속에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수백명의 죄수들이 있으니,
그곳에서 한번 모델을 찾아보라"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의 제안을 승락한 다빈치는 로마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
감옥을 방문한뒤, 그곳 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한 죄수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500년전 유대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에게 은화 몇개를 받고 예수를 팔아넘긴 못된 사람의 얼굴을 묘사한 다빈치는 몇달에 걸친 작업을 통해
유다의 모습을 완성한뒤 "모델은 이제 감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통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연행되다 갑자기 결박을 풀고 다빈치앞에 무릎을 꿇은 살인범은 다빈치에게 계속 자신을 모르겠냐는 질문을 하였다고 하며, 다빈치는 "난
당신같은 사람을 내 인생에서 만난적이 없소"라는 답변을 하였다고합니다.
순간 젊은이는 다빈치가 완성한 최후의 만찬을 가리 키며 다음과 같은 말을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저기 저 그림속에 그려진.. 6년전 예수의 모델이 바로 나였소.." 현재 이태리의 르네상스 미술역사에 등장하는
위의 일화는 실화였을까요? 그렇게 얼굴이 성스럽고 깨끗했던 젊은이가 로마 최악의 살인마로 돌변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다빈치는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다고 하며, 이 그림 이후로는 예수에 관한 그림을 더이상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해나 고뇌는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분투와 노력에 의해
타파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신비의 미소로 유명한 '모나 리자 Mona Lisa'의 제작연대와 모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레오나르도가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모나
리사'는 프랑스 왕실 소유가 되었다. 바시리는 '모나 리자'가 프로렌스의 은행가 프란시스델 조콘도의 부인 '라 조콘다'이며 미완성품이라고 기술
하고 있다. 또한 "모나 리자의 눈섭은 인간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갈망과 윤기에 차 있으며, 속눈섭은 아주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눈섭
또한 살에서 나오기 때문에 여기는 숱이 많고 저기는 드물며, 곱술머리로 되어 있으며 자연스럽다"고 평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 리사' 작품은 실제로 속눈섭과 눈섭이 없다. 그러나 작품은 미완성품이 아니라 완성품이다. 물론 16세의
'리사 게라르디니'라는 처녀가 두번 상처한 35세의 바르톨로메오에게 시집간 사실은 있다. 리사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여 신흥부자인 사위에게
딸의 지참금을 지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가 리사의 남편의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에 부인의 초상화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바시리는 현재 루브르에 있는 그림이 아닌 다른 그림을 보고 글을 썼거나 아니면 남한테 들은 이야기를 썼을지도 모른다. 모나
리사의 실제 주인공은 누구일까? 레오나르도가 사랑한 여인이 아닐까? 레오나르도가 어떤 여자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없다. 프로이트가
카나리아를 포식한 고양이와 같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다고 한 이 여인은 누구일까? 이사벨라는 미래의 군주가 될 기안 가레아초
스포르차의 부인이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1494년에 죽고 시동생인 로도비코에게 권력을 빼았겼다.
레오나르도는 이사벨라가 사는 궁전에 자기 화실이 있어서 그녀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스포르차가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밀라노를
떠날 때까지 이사벨라를 보살폈다. 스위스에 있는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모나 리사와 너무도 닮았다. 또 뉴욕주 글렌스 폴 하이드 컬렉션의 아라곤의
초상화는 들고 있는 갈대를 제외하고 거의 똑 같다. 우리는 모나 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레오나르도가1516년 프랑스에 초청되어 왕실
화가로 갈 때 이 작품을 가지고 갔고, 그가 죽은 1519년까지도 아끼던 작품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영국의 월터 페이터가 말했듯이
"어린 시절부터 모나 리사의 이미지는 레오나르도의 꿈결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상적인 숙녀가 실제로 나타나 마침내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의 이야기보다는 실제로 작품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원래 '모나 리사'는 기둥이 있는 벽을 가진 건물의 로기아
loggia(난간 혹은 거실)에 앉아 있었지만 그 부분은 잘려 나갔다. 그녀는 오른손을 왼손 위에 놓고 있다. 흥분을 억제하여 안정감을 찾은
인상이다. 한쪽 어깨를 안쪽으로 돌리고, 머리는 밖을 향해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신비로운 미소는 '동굴의 성모'에서도 상용했던
윤곽이 확실하지 않은 '키아르스쿠로(chiaroscuro 명암대조법)'라는 레오나르도 기법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또 눈의 시선이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환상도 막연한 분위기의 '키아로스쿠로' 기법
때문에 생긴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은 '모나 리자'의 심성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어서 눈가와 입가가 항상 변하는 것 같고 또 눈웃음치고 미소짓는것
같이 보이게 한다. 송나라의 산수화 같은 그녀의 뒷배경은 레오나르도가 중국 송나라 산수화를 접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아는 것이 적으면 사랑하는 것도
적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녀를 자기의 가장 뛰어난 그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림을 가지고
다녔다. 누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장 기품있게 표현한 그녀와 떨어져 있기 싫어서 라고 대답한
것이다.
실제로 <모나리자>는 극히 평범한 스푸마토 초상화이다.
왼쪽에 있는 시골 풍경을 낮게 그려서 오른쪽보다 왼쪽의 모나리자 커보이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 빈치 나름대로의 해학 입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남자와 여자라는 개념은 한쪽씩 차지하는 거였습니다. 왼쪽이 여자 오른쪽은
남자였지요. 다 빈치는 여성이 가진 본질을 매우 아꼈기 때문에 왼쪽에 보이는 모나리자를 크게 보이게 한
것입니다.
"열심히 일한 날에는 잠이 잘 찾아오고, 열심히 일한 일생에는 조용한 죽음이 찾아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