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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노트

[영국의 역사] 헨리 2세의 사법 개혁

작성자좋은소식|작성시간21.06.16|조회수50 목록 댓글 0

1-5 헨리 2세의 사법 개혁

헨리 2세의 사법개혁은 영국에 새로운 법질서를 세우면서 강력한 중앙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로써 지방 영주의 전횡과 억압이 줄어들고 국왕의 권위가 강화되었다. 이에 대해 전 영국 총리 처칠은 "헨리 2세의 위대한 공적은 영국 관습법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세운 주춧돌 위에 집을 지었을 뿐이다. 관습법의 세부적인 내용은 많이 변화했으나 기본 골격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저절로 굴러들어 온 왕위

1135년, 윌리엄 1세의 아들 헨리 1세가 죽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잉글랜드의 귀족들 간에 격렬한 분쟁이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전체 잉글랜드가 무려 20여 년간 내란에 휩싸였다. 1154년 12월, 싸움에 지친 귀족들은 정치적 분쟁을 끝내기 위해 마침내 타협했다. 그 결과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와 앙주 백작의 아들인 헨리를 공동의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바로 헨리 2세다. 이로써 백여 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한 노르망디 왕조가 끝나고 새롭게 앙주 왕조가 시작되었다. 앙주 왕조는 헨리 2세의 아버지인 앙주 백작이 항상 투구에 금작화 가지를 꽃은 데서 유래하여 플랜태저넷(Plantagenet) 왕조라고도 부른다.

헨리 2세는 매우 독특하고 개성적인 왕이었다. 평소에는 성미가 급하고 변덕스러우며 포악한 편이었으나 일단 군사나 정치와 관련된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는 냉혹하리만큼 이성적이고 기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헨리 2세는 라틴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는 단 한 문장도 완벽하게 구사할 줄 몰랐다. 어린 시절부터 노르망디 공국에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물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특유의 총명함과 재능으로 제왕의 면모를 드러냈다. 국내의 반대 세력을 평정하고, 불가ㅗ 4년 만에 다루기 까다로운 봉건 귀족을 굴복시켰으며,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하는 동시에 아일랜드 정벌에 나섰다.

개혁 의지

경제나 문화적으로 낙후되었던 잉글랜드와 서유럽 지역에는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신성 재판(Ordeal)'이 유행했다. 이른바 신성재판이란 신은 무고한 사람을 돕는다는 전제 아래 법정에서 피고나 증인에게 물이나 불을 이용해 고통스러운 고문을 한 다음 이를 무사히 견뎌 낸 사람의 결백을 인정하는 재판 방식이었다. 예컨대 불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팔을 지진 후 상처가 덧나지 않고 원상태로 회복되거나 강물에 빠뜨려서 살아남으면 무죄로 인정했다. 또 재산권 다툼에서는 소송을 건 쌍방이 칼이나 권총으로 승부를 겨루는 '결투'가 성행했다.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참으로 황당하고 비합리적이었지만 신성 재판은 무려 수세기에 걸쳐 잉글랜드와 유럽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다.

1163년에 헨리 2세는 잉글랜드에서의 통치권을 강화하고 혼란스러운 법질서를 바로잡고자 영국 헌법의 기초가 된 관습법 '코먼로(common law)'를 제정한 것이다. 코먼로는 잉글랜드 귀족과 대주교로 구성된 '국왕 법정'의 권위를 강화햇다. 당시 국왕 법정은 왕실 소유의 영토에서 발생한 소송 사건만 다루었고, 나머지 사건은 해당 지역의 영주 법정에서 심판했다. 헨리 2세는 이러한 기존의 법을 개정하여 시민이 일정한 금액을 내면 영주 법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왕 법정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영주 법정의 판결을 번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국왕 법정의 권한을 크게 강화했다. 이 밖에도 순회재판소를 시행해 국왕 판사를 전국 각지로 파견해서 사건을 재판하도록 했다. 이로써 소귀족과 하층 계급의 기사들, 일반 시민, 농노들에 대한 지방 영주의 사법권을 크게 제약하는 한편, 국왕이 대리인을 통해 직접 백성과 접촉하면서 왕권을 크게 강화했다.

배심원 제도

국왕 법정의 권위를 노피익 위해 헨리 2세는 배심원 제도를 마련했다. 12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피고의 유죄와 무죄 여부를 판단한 후 판사가 코먼로에 따라 형량을 결정했다. 배심원들은 법관이자 증인이었다. 이들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각기 공정한 평결을 맹세햇으며, 불공평한 판정을 하면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배심원 제도는 오늘날 까지 이어져서 미국과 영국 사법 제도의 근간을 이루며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라는 원칙을 실현하고 있다.

이 밖에도 헨리 2세는 봉건 영주들의 군사력을 빌리지 않기 위해 국왕이 직접 지휘하는 친위부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일정한 금액의 돈을 내면 병역의 의무를 면제해 주었다. 이러한 조치로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고, 기사들은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 상업이나 농업, 목축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새로운 자본가 계층으로 부상하면서 훗날 영국 청교도 혁명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

헨리 2세는 사법 개혁을 단행하여 영국 역사상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자식교육에는 크게 실패해 아들 헨리, 리처드, 제프리가 그를 냉대하며 반역을 일으켰다. 1189년 8월 6일, 헨리 2세는 향년 쉰넷의 나이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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