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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노트

[영국의 역사] 장미 전쟁

작성자좋은소식|작성시간21.06.25|조회수57 목록 댓글 0

1-10 장미전쟁

장미는 우리에게 화려하고 고귀한 아르마움과 코끝을 감도는 향기로 다가온다. 특히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겐 열정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낭만적인 장미가 영국 역사에서는 피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의 상징이었다.

전쟁의 서막

영국와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어 그의 손자 리처드 2세가 즉위했다. 리처드 2세는 정치적 역량이 없는 무능한 왕이었다. 설상가상 백년 전쟁을 겪으면서 영국의 귀족 세력이 급격히 팽창한 반면에 왕권을 하루가 다르게 약화되고 있었다. 1399년, 잉글랜드 북부의 귀족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리처드 2세를 폐위했다. 대신 랭커스터(Lancaster)가문의 가문의 헨리 4세를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플랜태저넷 왕조가 끝나고 랭커스터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무력으로 빼앗은 왕위는 더욱 강력한 무력의 도전을 받기 마련인 법이다. 영국의 귀족들은 백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 부를 축적했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으로 사병을 양성하고 의회를 조종했다. 랭커스터 왕조 3대째인 헨리 6세가 나이가 어려 요크 공작 리처드(Richard)가 대신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헨리 6세에게서 왕자가 태어나자 왕후 마거릿은 섭정 공인 리처드에게 불안감을 느껴 그를 국외로 추방했다. 이에 격분한 요크 공작 리처드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귀족들을 모아 전쟁을 일으켰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이랬다. 즉, 선대왕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햇기 때문에 그의 손자인 헨리 6세는 왕위의 자격이 없다. 정통적인 왕위 계승권은 플랜태저넷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약 30년 동안 벌어진 전쟁은 랭커스터 왕가가 붉은 장미를, 요크가 흰 장미를 각각 가문의 휘장에 그려 넣은 데서 유래하여 '장미 전쟁'이라고 일컬었다.

곤두박질

당시 요크가는 상공업이 발달한 영국 동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요크가는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봉건 영주와 상인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막강한 군사력을 키울 수 있었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손쉽게 랭커스터가의 병사를 격파하고 렌리 6세에게 압력을 가해 요크 공작을 섭정 왕과 왕위 계승자로 선포하게 했다. 그러나 야심이 큰 헨리 6세의 왕후 마거릿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왕위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마거릿은 런던을 탈출하여 친정인 프랑스 왕실에 도움을 요청했다. 프랑스의 지원 속에서 대군을 모은 마거릿은 요크 공작을 공격하여 포로로 잡는 데 성공했다. 마거릿은 그동안 으스대고 의기양양해 하던 요크 공작을 무릎 꿇린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요크 공작의 머리에 종이로 만든 왕관을 씌워 모욕을 준 뒤 그의 병사 수천 명과 함께 처형시켰다.

마거릿 왕후의 충동적이고 무자비한 살육은 매우 어리석은 처사였다. 역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우두머리를 처형시키는 선례는 있었지만 대규모 살육은 너무 잔인하고 무모했다. 이로 말미암아 국왕은 요크 가문가 철천지 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동남부 지역의 영주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요크 공작의 아들 에드워드는 자신을 에드워드 4세라 칭하며 병사를 끌어모아 막강한 군사력을 키웠다. 1461년 3월, 에드워드는 랭커스터군을 타우턴(Towton) 전투에서 격파하고 헨리 6세를 국외로 추방했다.

당시 랭커스터 군은 2만여 명의 병력으로 무장한 막강한 부대였기 때문에 승리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하늘은 요크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전투가 벌어지던 날은 본래는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랭커스터군은 졸지에 역풍을 맞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병사들은 강한 비바람에 몸조차 가누기가 어려워져 대오가 크게 흐트러지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요 크군은 바람의 힘을 빌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상대편을 제압했다.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말을 타고 최고 선봉에 서서 병사들을 지휘했다. 전투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되었고 들판에는 새빨간 피와 주검으로 가득 뒤덮였다. 랭커스터군은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도망쳤고 요크군은 그 뒤를 바작 추격했다. 당시 전투에서 랭커스터군과 요크군 합쳐서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헨리 6세 역시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평화의 악수

타우턴 전투 후 남편을 잃은 마거릿 왕후는 허겁지겁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 마침내 영국의 국왕에 오른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 가문을 멸족 시키지 않고 자비를 베풀었다. 그는 20여 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고, 덕분에 영국의 경제는 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요크가의 번영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워드 4세가 죽고 난 뒤 열두 살의 장남이 에드워드 5세로 즉위하였으나 왕통이 확립되기도 전에 동생 글로스터공 리처드가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스스로 리처드 3세라 칭하며 조카 에드워드 5세를 투옥한 뒤 살해했다. 리처드 3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에게 반대하는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면서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무렵 대륙에 망명해 있던 랭커스터계의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Henry Tudor)가 이 기회를 틈타 영국으로 돌아왔다. 1485년 8월, 헨리 튜더는 병사를 이끌고 웨일스에 상륙하여 영국 동남부 지역으로 진격했다. 그는 웨일스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랭커스터가의 붉은 장미 대신 웨일스 지방의 전통 깃발인 붉은 용 그림의 깃발을 새로운 휘장으로 삼았다. 덕분에 그는 웨일스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

8월 22일, 헨리 튜더는 보스워스(Bosworth) 평원에서 리처드 3세가 이끄는 병사들과 결전을 치렀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리처드 3세가 이끄는 병사들이 앞다퉈 투항을 하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뚝 떨어졌다. 리처드 3세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격전 속에서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3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2명의 영국 국왕이 내란으로 인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보스워스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헨리 튜더는 귀족과 병사들의 옹호를 받으며 런던으로 입성했다. 얼마디 그는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하면서 헨리 7세가 되었고, 새로운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 7세는 요크가와 랭커스터가의 대립을 끝내고자 요크가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두 가문이 화해의 악수를 하면서 30년에 걸친 장미 전쟁이 비로소 끝났다.

30년 동안 계속된 장미 전쟁은 귀족 계층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왔다. 당시 전쟁으로 남작 계습 이상의 귀족 65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외 수많은 봉건 영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 말미암아 귀족 세력은 크게 약화했고, 반면에 왕권은 나날이 강화되어 헨리 튜더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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