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 요한복음 13장 -예수님, 파워, 특권
흔히 설교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당시의 현존하는 파워들에 도전하는 방식이었다고 지적하면서 나사렛 예수가 ‘파워를 포기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완전한 비폭력의 삶을 가르치셨고 그렇게 사셨다는 것은 참으로 사실이다(동료 인간들에게 비폭력적이셨다는 것이지 고기잡이에 대해서도 그러셨던 것은 아닌 듯하다). 제도화된 폭력의 힘이 그들의 모든 분노를 그분의 재판과 십자가 형벌을 통해 그분에게 쏟아부을 때 그분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사 53:9)
예수님이 자신에게 행사된 부당한 폭력 앞에 침묵하고 복종하신 것은 그분의 전 생애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들 중 하나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성찰했던, 예수님의 첫 전기 작가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이 ‘파워를 포기하셨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폭력적 죽음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신약성경 저자들은 폭력이 파워의 가장 진정한 형태라는 우상숭배적인 소설에 더 이상 동의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제국이 행사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파워가 세상에서 일하고 있다는 증거를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그들의 손으로 만졌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삶 곧 그분의 특별한 탄생부터 인간으로서 그분의 마지막 밤까지를 회고했을 때, 그들이 기억한 것은 그분의 특별한 파워였다. 그것은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옛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는 동시에 또한 그 기름부음 받은 자가 어떻게 파워를 행사할지에 대한 모든 기대를 거부하시고 재정의한, 예측할 수 없고 창조적이고 강렬한 그분의 존재감이었다.
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요한은 예수님 사역의 모든 순간에 그분 안에서 작용하는 파워를 가장 직접적으로 서술한다. 섬세하게 정교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요한은 연이어 점점 더 강력한 파워의 표지들을 그려 낸다.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인 예수님은 복음서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빌립이 그의 형제 나다나엘에게 말한 것처럼 “진실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요 1:45)였고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꿰뚫어 보시는 능력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후에 인정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셨다.
이 놀라운 아들이자 왕이신 분에 대한 요한의 이야기가 절정을 향해 나아가면서 이 이야기꾼은 섬세한 영화 제작자처럼 시간의 흐름을 점점 늦추어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예수님의 죽음 전 며칠간의 장면에 집중시킨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마지막 밤에는 속도가 더 느려져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으신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과 기도로 그분을 가장 가까이 따르던 사람들은 그분 사역의 핵심으로 이전보다 더욱 깊이 데려가신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을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길르 시작하여.”(요 13:3-5)
시기의 엄중함 때문에 분별력을 잃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물리치기 위해 요한은 이 예기치 못한 행동을 가능한 한 넓은 맥락 속에 위치시킨다. 예수님은 파워를 잃기는 커녕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으셨다. 그분은 자신이 어디서(그리고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아셨다. 그분은 자신이 어디로(그리고 누구에게로) 갈지를 아셨다. 다시 말에서 이제 이어질 행동과 고난은 파워를 잃으신 분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파워를 받으신 분의 표지였다.
그리고 요한은 참으로 놀라운 예수님의 행동을 기록한다. 예수님은 신속한 몇 가지 동작으로, 주목과 존중을 받는 식탁 중앙의 자리를 떠나서 겉옷을 벗으시고 방 안에 있던 이것을 집어 드셨다. 그분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이것을 만지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바로 손님들의 발을 씻기는 수건이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문화권에서 예수님 시대의 발이 상징했던 수치감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다. 발은 신체의 가장 낮은 부분이며, (예수님 당시에는 현대의 정비된 보도보다 훨씬 더 먼지가 많았던) 세상의 먼지를 가장 많이 뒤집어쓰는 부분이자 육체의 땀과 수고로 인해 가장 냄새나기 쉬운 부분이다. 다른 사람의 발을 만지는 것은 심각한 예속의 행위이기에 오직 노예나 탄원자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었다. 발은 파워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손님들이 기대 앉아 있는 식탁 쪽이 아닌 바깥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오직 가장 무시당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돌봄을 받는다. 일반적인 잔치 자리에서는 집안에 속한 노예들이 발 씻기를 수행했을 것이다. 발 씻기는 개인위생과 관련된 것이기에 오늘날 가정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자리를 뜰 때처럼 어떤 예전이나 설명이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겉옷을 벗고 모든 사람의 관심을 그들의 발에 집중시키셨다.
수치스럽고 충격적이게도 예수님이 식탁 주위로 다가오셨을 때 베드로가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요 13:6)라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질문하고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요 13:8)라고 강하게 저항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훨씬 더 세속적인 형태의 파워를 목격한다. 베드로는 의지의 불가피한 경합인 제로섬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기시든지 베드로가 이기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베버가 정의한 헤어샤프트와 마흐트가 완벽하게 구체화된다. 예수님과 베드로 중 누가 “구체적 명령에 대한 복종을 확보할”능력을 가졌는가? 누가 “저항을 극복”할 능력을 가졌는가? 이것은 파워라는 말이 가진 가장 일상적인 의미, 즉 다른 사람에게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기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스승이며 주님이셨다. 베드로는 큰소리를 쳤지만 그의 삶을 예수님께 내어 드려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어조를 바꾸어서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요 13:8-9). 예수님이 이기셨다. 예수님은 저항을 극복하셨고 복종을 확보하셨다. 그리고 논쟁에서 진 베드로도 이겼다. 사람들을 당혹시키는 그분의 새로운 왕국에서 예수님의 식탁에 앉을 한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리에 앉으셨을 때 요한은 다시 한번 그분의 파워에 대해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라고 물으시고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옿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3:12-13). 여기에는 가장한 겸손의 모습이 전혀 없다. 제자들의 세계에서 ‘랍비’(rabbi, 선생)와 ‘귀리오스’(kyrios, 주)보다 더 파워 있는 역할은 없다. 이 칭호들은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황제의 통치권을 지칭할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직저적인 의지 경합에서 승립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로 가신다. 요한은 그분이 파워를 당연한 듯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가 보기 원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수천 년 뒤에 읽는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창조적이고 문화적인 파워를 발견한다. 서유럽 교회력에서 성금요일 전날 밤인 세족목요일에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발을 씻어 주기 위해 모인다. 선생이며 주님이셨던 분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을 꿇으신 후로 2천 년이 지난 지금, 그분을 따르고 섬기고 전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모범을 계속 본받는다. 의례를 창시하는 것은 문화를 형성하는 파워의 행위 중 가장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그 의례를 처음 경험한 사람들이 죽어서 묻힌 지 오랜 후에도 여러 세대를 거쳐 진리에 대한 증언을 지속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식탁에서 하셨던 행동과,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이 기록하듯 그날 밤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신 행위가 오늘날까지 질기게 지속되는 것은 그분의 파워에 대한 궁극적 시험이자 표지다. 바로 이 순간에 예수님은 문화를 창조하신다. 수건과 떡과 잔의 의미를 영원히 변화시키고 선생과 주인이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는 방식과 그들의 제자와 종이 그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은 새로운 문화를.
특권의 종말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파워를 포기하시는 지점은 없다. 오히려 그분의 파워가 절정에 이르고 입증된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포기하시는 것은 파워가 아니라 특권과 지위다.
그 방 안에서 가장 큰 파워를 가진 사람은 발 씻기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이 존경받는 랍비라면 그런 일은 당신이 굳이 모멸감을 느끼며 스스로 낮추어 그 일을 요청하는 수고를 할 필요 없이 그냥 일어나는 일이었다. 만일 그 잔치에 시중을 드는 종들이 어찌된 이유에서든지 발 씻기는 의례를 잊어버렸다면 그 일은 참석한 손님 중 가장 파워가 없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그 사람은 재빠르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님들의 지위의 높고 낮음을 계산해 보고 신속하게 수건을 집어 들어 그 의무를 수행할 것이다. (전통적인 문화 배경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또는 오늘날 미식축구 슈퍼볼 경기가 있는 일요일에 남자들은 앉아서 경기를 보고 여자들이 음식을 차리고 접시를 치우는 것을 경험했다면 이 계산이 얼마나 당연하게 이루어지는지 알 것이다. 섬김을 받는 사람은 물론 섬기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들이 이런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지위 계산이나 특권을 나타내는 이런 표시들에 전혀 관심이 없으셧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하면 이것이 일관된 방식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파워를 사용하는 일에 거의 주저함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그 파워로,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수천 명을 먹이시고 폭풍을 잠잠케 하셨다. 예수님이 주저하셨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대하신 것은 이런 파워의 행위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었다.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후에 온 동네가 그녀의 집 앞에 모였지만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그 마을을 떠나셨다. 예수님이 수천 명을 먹이시고 나서 군중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떠들어 댈 때 예수님은 배를 타고 건너편 이방인들의 지역으로 떠나셨다. 군중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들이 안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진리를 담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한 후에 예수님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예루살렘 성을 떠나 성 밖에 있는 한 가정에서 그 밤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결코 특권을 쌓아 놓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위에 대한 절대적 무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신다. 이는 예수님이 성부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잔의 자리에 대해 의심하셨거나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분은 당신의 자리를 분명히 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뱀과 그 이후의 모든 우상이 자신에게 홀려 있는 인간 앞에 매혹적으로 달아 놓는 궁극적 지위조차도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취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지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늘 자기 주의 사람들의 지위를 분류하는 데 정력을 쏟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서열이나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기에 소위 ‘제대로 된’ 사람들과 교제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로마 총독과 창녀들, 세리들과 열심당원들, 회당의 지도자들과 12년간 앓아 온 질병으로 고통받는 여인을 동일한 돌봄과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대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자녀들 각각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을 항상 존중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과장된 형상이나 역할에 조금도 찬사를 보내지 않으셨다.
특권을 보호하고 지위를 상승시키는 데 집착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런 무관심은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같은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위하는 데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거룩하고 순전한 파워다. 예수님은 파워를 사용해서 전혀 자신을 보호하거나 높이지 않으셨고 오직 창조하기 위해서만 파워를 사용하셨다. 아마도 이것이 예수님의 비폭력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설명일 것이다. 폭력은 정당한 자기 방어를 위해 사용될 때에도 회복하고 구원하고 창조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오직 손상을 되돌려 줄 뿐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파워가 언제나 오직 번영만을 위해 사용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회복하고 구원하고 창조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특권과 지위는 무시되고 버려질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하나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의 진정한 소명, 즉 저주가 있는 곳 어디서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소명을 방해할 뿐이다.
요한은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고 우리에게 알려 준다. 종들이 사용하는 때 묻은 수건을 두르신 메시아는 파워를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파워를 본래의 목적에 맞도록, 모든 왜곡을 제거하여 회복시키신다. 사랑스러운 그러나 사랑 없는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는 파워로 말이다. 그분의 파워는 특권을 세심하게 지키거나 지위를 일일이 계산하기 위해 유보된 것이 조금도 없이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다 쏟아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