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이제 두 번째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감정 안에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1. 감정의 본질을 설명한 내용은 다른 내용을 더 참가하지 않더라도 이 문제를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할 만큼 충분하고도 확실하다. 어떤 사람이 참된 신앙이 대체로 영혼의 성향과 의지가 활발하고 생생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또는 마음이 불타는 듯한 행동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부인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받으시는 종교는 약하고 무감각하며 생기 없는 우유부단한 종교가 아니다. 종교가 아니다. 그런 우유부단함은 우리를 단지 무관심의 상태보다 조금 낫게 이끌 뿐이다.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마음이 생동감 있는 신앙 안에 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 또한 신명기 6장 4-5절에서는 “이슬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이 열정적이고 생동감이 있는 신앙 안에 거하는 것은 마음에 행한 할례의 참된 열매이며, 생명의 약속이 있는 참된 중생의 열매인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상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만일 우리가 신앙에 아주 큰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 의지와 성향이 강하게 활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종교에 속한 일은 너무나 크고 중요하기 대문에 만일 우리 마음의 활동이 생동감도 없고 강력하지 않다면 우리 마음의 활동은 신앙의 본질과 중요성에 부합될 수 없다. 종교만큼 우리 성향이 왕성하게 활동하기를 요구하는 것도 없다. 종교만큼 우리의 미지근함을 괴이하게 여기는 것도 없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강력한 것이다. 신앙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마음에서 신앙의 내적인 활동으로 나타난다. 마음이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 본래적인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의 모양과 구별해서 경건의 능력이라고 부른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딤후 3:5). 건강하고 견고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안에 계신 성령은 강력하고도 거룩한 감정의 영으로 존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 1:7)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성령의 영향력 안에 거할 때, 성경은 그들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한다.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 곧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일으키는 능력과 열심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다고 말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경우처럼 말이다. (눅 24:32)
신앙생활은 때때로 사람들의 심장과 힘을 크게 움직이게 하고 사용하게 하는 운동에 비유된다. 그것은 달리기 경주나 씨름 또는 큰 상과 면류관을 얻기 위한 몸부림과 같은 것에 비유되며, 우리의 생명을 찾는 강한 적들과 싸우는 것이나 성이나 나라를 무력으로 취하기 위해 전쟁하는 것에 비유된다.
또한 참된 은혜에도 다양한 정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도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런 어린 아이 같은 사람 안에서는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일들에 대한 의지와 성향이 비교적 약하게 활동한다. 그러나 마음에 경건의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의 마음과 성향은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에 대해 강력하고 생동감 있게 활동한다. 그래서 이런 거룩한 활동들이 육욕적인 또는 본능적인 감정들을 눌러 이기고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모든 참된 제자들은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나 자녀, 형제나 자매, 집이나 전토 그리고 자신의 생명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믿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나님에 대한 성향과 의지가 황성하게 활동한다. 그러므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감정이란 의지가 왕성하고 생동감 있고 감지될 수 있게 활동하는 것이다.
2. 인간의 본질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감정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감정이 그들의 행동의 발원지가 되게 하셨다. 감정이 인간의 본질에 필연적으로 속한 것일 뿐 아니라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거룩한 감정은 필연적으로 참된 믿음에 속한 것일 뿐 아니라 참된 믿음에서도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 전인이 새로워지며, 그의 전 영역이 거룩해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참된 믿음은 본질상 실천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감정이 사람들의 행동의 발원지가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은 참된 믿음 또한 감정 안에 존재해야 함을 보여 준다.
인간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이나 미움, 갈망, 희망, 두려움 같은 감정들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매우 소극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런 감정들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원천이며, 무언가를 추구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런 감정들은 인간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힘이며, 세상에 속한 모든 일들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다. 특별히 이런 감정들은 사람을 자극하고 사람에게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모든 일을 진지하게 행하게 하며, 모든 일에서 열정적인 추구자가 되게 한다. 우리는 인간 세상이 매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이 바로 이런 움직임의 원천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과 믿음, 희망과 두려움, 분노와 열정, 갈망 등 모든 감정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세상은 정지해 버리고 죽은 것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활동이나 진지하게 추구하던 것들은 다 사라져버릴 것이다 또한 탐욕적인 사람이 세상적인 이익을 이기적으로 추구하게 만드는 것 역시 감정이다. 그리고 야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 세속적인 영광을 정열적으로 추구하게 만드는 것 역시 감정이다. 또 쾌락을 즐기는 사람이 감각적인 쾌락과 희열을 추구하도록 자극하는 것 역시 감정이다.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흥분하면서 분주하게 이런 것들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감정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이 모든 추구의 원동력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이렇게 추구하는 행위 자체도 멈추어 버릴 것이다. 세속적인 일에서 세속적인 감정이 인간의 추구와 행동의 발원지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문제에서도 종교적인 감정이 바로 종교적인 행동의 원천인 것이다. 감정 없이 교리적 지식과 사변적 지식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영위해 나갈 수 없다.
3. 믿음에 속한 일들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데 그 일들이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만큼만 그렇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통해 그들은 무한히 크고 중요한 일들에 대해 들으며, 진정 그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듣는 모든 것은 그들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들의 성품과 행동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그들의 듣는 것 때문에 감정이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을 듣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그리고 무한한 지혜와 위엄을 듣는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어서 당신의 순결한 눈으로 악과 최를 차마 보지 못하시며, 하늘이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정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듣는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듣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놀랍게 드러내는 위대한 일들을 듣는다. 또한 그들은 특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을 들으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과 고난당하신 것을 듣는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엄정하신 진노를 받게 되는 죄인들의 영원한 비참함을 들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 누릴 영원한 축복과 영광과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듣는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엄위로운 명령과 은혜로운 경고들과 경고들 그리고 달콤한 복음의 초청을 듣게 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이런 일들을 자주 듣기는 하지만, 그들의 마음 자세나 행실은 느낄 수 있는 어떠한 변화도 없이 이전과 같은 상태다. 그것은 그들이 듣는 바가 그들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기 전에는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 내가 담대하게 주장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믿음에 관계된 일을 읽고 듣고 보았다 하더라도, 그의 감정이 움직이지 않았을 때에는 그 사람이 생각과 말에 큰 종교적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생각과 말에 큰 종교적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심령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거듭나지 못한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구원을 얻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수 없으며, 지혜를 구하기 위해 몸부림칠 수도 없다. 또한 지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자비를 얻고자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씨름할 수도 없다. 그리고 자신의 비참함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마땅한 진노에 대해 듣고 상상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수 없으며, 영혼의 피난처이신 그리스도께 달려갈 수도 없다. 심지어 어떤 신앙인도 그 사람의 심령이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차갑게 죽은 것 같은 생활에서 깨어날 수 없다. 그리고 믿음이 퇴보한 상태에서 회복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떠난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요컨대 믿음에 속한 일들이 어떤 살아있는 사람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심령이 감정적으로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성경은 도처에서 믿음을 두려움, 소망, 사랑, 미움, 갈망, 기쁨, 슬픔, 감사, 불쌍히 여김 그리고 열정과 같은 감정과 깊이 연관시킨다.
성경은 참된 믿음을 경건한 두려움과 연관시킨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참된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는 특징을 말씀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떨며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들의 육신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떨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성경에서 성도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이 참된 경건에서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참된 경건은 보통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소망은 종종 성경에서 참되고 매우 큰 믿음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소망은 신앙이 속해 있는 세 가지 위대한 미덕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다. (고전 13:13) 여호와를 소망하는 것 또한 성도들의 특징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146:5).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17:7),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시편 31:24). 이와 같은 말씀들은 다른 여러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종교적인 경외심과 소망은 종종 연관되며, 모두 참된 성도들의 특징이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시편 33:18).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편 147:11). 소망은 참된 믿음을 구성하는 매우 큰 요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한다(롬 8:24). 그리고 소망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써야 할 투구라고도 말씀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그리고 소망은 성도들을 악한 세상의 폭풍에 쓰러지지 않게 보호해 주는 확실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이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6:19). 소망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참된 성도들이 받게 되는 위대한 열매요 은혜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성경은 믿음을 사랑이라는 감정 즉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과 신약에는 이 사실을 명백하게 해 주는 수많은 본문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나중에 소개할 것이다)
성경은 사랑과 반대 감정인 미움을 죄에 대한 미움과 연관시키며, 그런 미움은 참된 믿음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씀한다. 바로 죄를 미워하는 것은 믿음이 참된 것임을 드러내 주고 구별해 주는 시금석이라고 말슴한다. 잠언 8장 13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성도들은 죄를 미워함으로써 자신들이 신실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말씀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편 97:10). 그리고 시편 기자는 죄를 미워하는 것이 자신이 신실하다는 증거가 된다고 자주 말씀한다.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102:2-3). “내가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편 119:104). 128절 역시 같은 말씀이다. 또한 시편 139편 21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시편 139:21)라고 말씀하신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님과 거룩함에 대한 사모와 주림과 목마름으로 표현되는 거룩한 갈망을 참된 믿음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언급한다.
“주의 이름 곧 주의 개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내가 여화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의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편 27:4).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시편 42:1-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편 63:1-2).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편 84:1-2).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편 119:20). 시편 73편 25절과 143편 6-7절 그리고 130편 6절에도 역시 이런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의 첫 부분에서도 그런 거룩한 갈망과 목마름이 참으로 복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위대한 일 가운데 하나라고 언급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또한 이런 거룩한 목마름을 영원한 생명의 축복에 참여하기 위한 하나의 큰 조건으로 묘사한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 21:6).
성경은 거룩한 기쁨 역시 참된 믿음에서 큰 부분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기쁨은 믿음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자주 권면되고 또 진지하게 요구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편 37:4),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시편 97:12).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시편 33:1).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2).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3:1).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시편 149:2). 기쁘믄 은혜로우신 성령의 중요한 열매들 가운데 하나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갈 5:22). 시편 기자는 그의 거룩한 기쁨을 자신의 신실함의 증거로 소개한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편 119:14).
종교적인 슬픔, 애통함 그리고 상한 마음 역시 참된 믿음의 큰 요소로 자주 언급한다. 이런 것들은 참된 성도들을 구별해 주는 특질이며 그 특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시편 34:18).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3). 이런 거룩한 슬픔과 상한 마음은 성도를 구별해주는 특성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뻐하시고 열납하시는 것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참된 믿음이 역사하는 곳에서 자주 언급되는 다른 감정은 특히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과 찬양으로 표현되는 감사다. 이것에 대해 시편과 성경의 다른 부분들이 많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본문을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불쌍히 여김이나 자비를 참된 믿음의 크고도 본질적인 요소로 자주 말씀한다. 성경은 또한 선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자비로운 사람이 선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사 57:1). 그리고 성경은 자비로움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특별히 의인을 구별해주는 특성이라고 소개한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편 37:21).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시편 37:26). 그리고 잠언 14장 31절은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한다. 또 골로새서 3장 12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아…옷 입고”라고 말씀한다. 우리 구주께서도 참으로 복된 자들을 자비가 있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7).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자비를 율럽의 더 중한 부분 중 하나로 말씀하신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 23:23).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 이 구절은 우리 구주께서 아주 즐겨 사용하신 구절인데 마태복음 9장 13절과 12장 7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열정 역시 참된 성도들에게 있는 믿음의 아주 본질적인 요소로 소개한다. 열정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자신을 주실 때에 마음에 품고 계셨던 위대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그리고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크게 요구되는 것이 열정이었다(계 3:15-16, 19).
나는 성경 전체에서 믿음을 감정과 긴밀히 연구시키는 수많은 구절 가운데 몇 가지만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참된 믿음이 감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그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견해가 틀렸으며, 믿음의 본질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5. 성경은 다른 모든 감정들의 원천이며, 또 감정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인 사랑안에 참된 믿음이 온전히 들어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서도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은 율법사에게 대답하실 때 이 사실을 언급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가 규정한 모든 의무와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친 믿음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가끔씩 이 점에 대해 똑같이 가르친다. 로마서 13장 8절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럽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하고 10절은 “사랑은 율럽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 14절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말씀한다. 마찬가지로 디모데전서 1장 5절은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은 사랑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자 참된 믿음의 생명력이고 본질이며 영혼과 같다고 말씀한다.
사랑이 없이는 가장 위대한 지식과 은사들, 가장 영광스러운 사역 그리고 믿음에 속한 다른 모든 것이 헛되고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는 사랑을 모든 선한 것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보통 영어 성경에서 ‘charity’라고 번역된 말의 원문은 ‘아가페’다. 그리고 ‘아가페’의 바른 영어 번역은 ‘사랑(love)’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인간의 영혼이 가지는 진실로 자애로운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영혼의 경향성이 느낄 수 있도록 활력 있게 작용할 때에는 하나의 감정(affection)이 되며, 다름 아닌 바로 감정적 사랑이 된다는 것은 위에서 본 것처럼 분명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실 때, 이런 활력 있고 정열적인 사랑이야말로 모든 경건과 믿음의 요체라고 말슴하신 것은 확실하다.
여기와 다른 성경에서 모든 믿음의 요체라고 묘사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도 않고 올바로 이해하지도 않은 채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경에 따르면 모든 참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한 사랑에 있으며 이 하나님의 성품을 습관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의 총체는 이런 하나님의 성품의 토대가 되는 빛과 그 하나님의 성품을 열매 맺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과 경건이라는 요소는 감정에 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사랑은 여러 감정 가운데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 가운데 으뜸이며 동시에 모든 감정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에서부터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나 또는 즐거워하는 것들에 반대 되거나 위협적인 것들에 대한 미움이 생겨난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 작용하는 대상들의 현존이나 비현존, 확실성이나 불확실성, 가능성이나 불가능성 등과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사랑과 미움의 감정들은 다양한 작용을 하게 되며 이런 다양한 작용들은 갈망, 소망, 두려움, 기쁨, 슬픔, 감사, 분노 등과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드러내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살아 있고, 정열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신앙감정들을 드러내는데 그 중에는 죄에 대한 강렬한 미움과 혐오, 죄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 은혜롭게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때 얻게되는 만족과 기쁨,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을 때 느끼는 슬픔, 장차 하나님을 누릴 것을 기대할 때 생기는 즐거운 소망,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강한 열정 등이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람을 뜨겁게 사랑할 때 사람들을 향한 모든 덕스러운 감정들이 생겨난다.
6. 성경에 나오는 가장 탁월한 성도들의 믿음과 경건은 거룩한 감정 안에 있었다.
세 명의 탁월한 성도들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상태와 감정들을 표현함으로써 그들의 믿음과 그들이 하나님과 누린 교제 방식을 기술했고, 그들이 남긴 기록들은 정경의 일부가 되었다.
내가 첫째로 주목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이다.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의 믿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가 남긴 거룩한 시들은 경건하고 거룩한 감정이 밖으로 내뿜어진 것이었고 또 표현된 것이었다. 다윗은 이 시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겸허하고 뜨거운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성과 놀라운 사역을 찬탄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영혼의 진지한 갈망과 목마름과 갈급함을 표현했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을 달콤한 감사로 표현했다. 또 하나님의 은총과 충분하심과 신실하심 가운데 영혼이 누리는 거룩한 고양감과 승리감을 표현했고, 다른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땅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자신의 큰 기쁨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한 슬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뜨거운 열심을 노래했다.
다윗은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에 대한 불붙는 혐오를 표현했다. 모든 다윗의 시편들에 충만해 있는 거룩한 감정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에 더욱 적합하다.
그것은 이 시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합한다고 말씀하신 그 탁월한 성도 개인의 믿음의 표현이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당시 뿐 아니라 후 세대의 하나님의 교회가 공적인 예배를 드릴 때에 사용할 수 있도록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시들은 시편 기자 자신의 믿음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의 믿음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은 시편에서 다윗은 한 개인의 자격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의 대표로서 그리고 그 교회의 예배와 찬양의 인도자로서, 또한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많은 시에서 다윗은 거룩한 감정을 밖으로 내뿜으련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으며, 많은 다른 시에서는 교회를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다른 경우는 사도 바울이다. 그는 많은 면에서 신약의 복음 사역자 가운데 으뜸이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그릇으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하는 주된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교훈이 되는 복음의 영광스러운 비밀들을 계시하기 위한 도구로 특별히 사용되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이 땅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탁월한 그리스도의 종이었고, 그 주인의 나라에서 가장 큰 상을 받은 자다. 바울에 대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바울은 감정이 충만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믿음은 대부분 거룩한 감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을 종합하면 바울은 그의 모든 삶에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주님을 매우 뜨겁게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행동했으며 완전히 그 사랑에 삼키운바 된 것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여겼기 대문에 모든 것을 해로 여겼으며,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바울은 자신이 이 거룩한 감정에 압도된 것처럼 말하고, 그리스도의 강력한 사랑 때문에 모든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전진한다고 말한다(고전 5:14-15). 그의 서신서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의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바울은 그들을 향산 자신의 애틋한 사랑을.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고후 12:19; 빌 4:1; 딤후 1:2). 고린도후서 2장 4절은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유모가 자기 자녀에게 느끼는 애틋하고 유순한 사랑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7-8). 그래서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말하며(빌 1:8; 몬 1:12,20), 다른 사람들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자신 안에 있는 그들을 향한 긍휼과 자비를 말한다(고후 8:16; 빌 2:1). 그리고 그들을 향한 금심과 애통한 마음을 말한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금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4). 그는 그들 때문에 영혼이 많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골 2:1). 그는 또한 유대인 때문에 마음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롬 9:2).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입을 열고 마음을 넓혔다고 말한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고후 6:11). 바울은 종종 자신의 사랑과 갈망을 말한다. (살전 2:8; 롬 1: 11; 빌 1:8, 4:11; 딤후 1:4).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매우 자주 기쁨의 감정을 표현한다(고후 1:12, 7: 7, 9, 16; 빌 1: 4, 2:4, 3:3; 골 1:24; 살전 3:9). 그는 자신이 큰 기쁨으로 기뻐한다고 말하며(빌 4:10; 몬 1:7),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말하고(빌 2:17), 더욱 많이 기뻐한다고 말한다(고후 7:13). 그리고 위로가 넘침으로 기뻐한다고 말한다(고후 7:4). 그는 자신이 항상 기뻐하는 자라고 말한다(고후 2:14). 또한 모든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자랑한다고 말한다(살후 1:4; 롬 5:3). 그는 또한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말한다. 바울은 또한 거룩한 질투심의 감정을 표현한다(고후 11:2-3). 바울이 회심한 이후 사도행전과 그의 서신서에 나오는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듯이 교회의 유익과 번영에 대한 강한 열정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이 열정은 그의 마음 속에서 계속 불타올랐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경고하고 경책할 때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할 때 지속적이고 위대한 힘의 근원이 되었다. 그런 열정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을 계속적으로 대적하는 강력하고도 셀 수 없이 많은 원수들과 싸웠으며, 정사와 권세들과 싸울 때 허공을 치는 것같이 하지 아니하고,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온갖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푯대로 향해 나아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 나간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감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풍성한 눈물로 입증되는 것 같다. 고린도후서 2장 4절에서 바울은 많은 눈물로 서신을 썼음을 밝히고 있으며, 사도행전 20장 19절에서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음을 그리고 31절에서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만일 이 위대한 사도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과 사도 자신의 증언들을 살펴본 사람 가운데 사도 바울에게 있던 믿음 대부분이 감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눈이 이상해져서, 자기 눈앞에 가득 차 있는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다른 경우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주님께 가장 사랑을 받은 제자였으며 12사도 가운데 가장 가깝고 친밀한 자였고, 다른 제자들보다 많은 특권을 누린 자였다. 그는 변화산상에서 주님과 함께 있었던 세 명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실 대 함께 했었고, 주님께서 고통 가운데 계실 때 함께 했던 자였으며,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교회의 세 기둥이라고 말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지막 만찬을 드실 때 주님의 가슴에 기댈 수 있는 특권을 누렸으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처럼 세상 끝 날까지 교회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경륜을 계시할 제자로 선택함을 입었다. 또한 신약과 전체 성경의 마지막 책을 기록했고,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삶으로써 사도들이 죽은 뒤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것을 정비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가 기록한 책을 보면(신학자들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의 서신들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정감이 넘치며,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내뿜고 있다. 그는 마치 달콤하고 거룩한 감정으로 들어찬 사람처럼 보인다. 그 증거는 그가 쓴 모든 글들 속에 가득차 있다.
7.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전체 교회의 머리로,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참된 믿음과 미덕의 완전한 모범으로 그가 어디로 가든지 모든 양무리가 다라야 할 목자로 보내신 분인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심령을 가진 분이셨다. 그리고 주님의 미덕은 거룩한 감정들로 많이 표현되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가장 강하고 생생하고 열렬하게 사랑하신, 가장 위대한 모본이었다. 주님이 간절히 기도하시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시고 눈물과 피를 흘리며 씨름하실 때, 극심한 갈등과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거룩한 감정 때문이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능력은 너무나 커서 죽음보다 더 강했으며,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을 때에 두려움과 슬픔 같은 강력한 본성적인 감정들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로 이런 거룩한 감정 때문이었다. 주님은 또한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도 감정으로 가득 찬 분이셨던 것 같다. 우리는 시편 69편을 성취하는 주님의 큰 열심을 읽게 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우리는 사람들의 죄를 슬퍼하시는 주님에 대해 읽게 된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5). 또한 우리는 경건치 못한 자들의 죄와 비참을 생각하시고 눈물로 호소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읽으며,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 누가복음 13장 34절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원을 읽게 된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심(마 15:32, 18:34; 눅 7:13)을 읽게 되며 민망히 여기심(마 9:36, 14:14; 막 6:34)을 읽게 된다. 우리는 또한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라버니의 일 때문에 슬픔에 잠겨서 원망과 눈물로 주님께 왔을 때 주님은 그들과 함께 우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대로 비록 주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면 그들의 슬픔이 변하여 곧 기쁨이 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그들의 슬픔을 느끼시고 그들과 함께 우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설교는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 16장에 기록된 고별 설교에서 주님은 당신이 제자들을 더나갈 것이며, 주님께서 더나신 후에 제자들은 세상에서 큰 환난과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예고하셨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을 당신의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같이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으며,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령 안에서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이 모든 말슴을 마치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을 하시듯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요한복음 17장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제자들과 당신의 모든 교회를 위해 사랑이 넘치는 중보 기도를 하시면서 고별 설교를 마무리하셨다. 사람이 기록하거나 입으로 전달한 설교 가운데 이 설교가 가장 애정이 넘치고 감정이 넘치는 설교인 것 같다.
8.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천국에는 의심할 바 없이 참된 믿음과 경건이 있다. 그것도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경건이 있다. 천국을 묘사한 성경에 따르면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 역시 주로 거룩하고 강렬한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사랑과 기쁨이 열정적으로 고양되도록 표현한 찬양 속에 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경건도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경건과 똑같이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천국의 성도들이 혈과 육에서 떠나 있고, 영혼과 육체의 연합이라는 법칙을 다라 그들 영혼의 감정들과 함께 움직이는 체액들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넘치는 사랑과 기쁨이 감정이 아닐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육신의 감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감정들을 말하는데 그 감정 가운데 주된 것은 사랑과 기쁨이다. 이런 감정들이 영혼 속에 있기 때문에 영혼이 몸 속에 있든 몸 밖에 있든 상관 없이 영혼은 감정적으로 자극을 받고 움직이게 된다. 또한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정도로 사랑과 기쁨 같은 감종들이 영혼 속에 있을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강한 자극을 받게 되고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다시 말하면 강하게 감정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몸 밖에 있는 영혼 또는 영화된 몸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우리는 그런 상태에서 영혼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성도들은 영혼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분리된 영혼 속에 있는 사랑과 기쁨이 같은 종류하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은 하늘에 속한 빛과 생명과 축복의 시작이요 여명이다. 그리고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은 비록 그 정도와 환경은 다를지라도 천국에서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과 유사한 것이며 본질상 같은 것이다. 여러 성경 구절이 이 사실을 입증해 주는데 그 중에서 잠언 4장 18절, 요한복음 4장 14절, 6장 40정, 47절, 50-51절, 54절, 58절, 요한일서 3장 15절, 고린도전서 13장 8-12절이 있다. 따라서 천국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이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거룩한 사랑과 기쁨과 비교할 때 그 정도와 환경뿐만 아니라 그 본질에서도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한 천국의 성도들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혈액과 본능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비록 혈액과 본능이 마음의 감각에 어떤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혈액과 본능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감정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마음의 감각이 있는데 이것은 체액에 미치는 어떤 영향보다도 선행한다. 따라서 이 마음의 감각은 몸 안에 있는 체액들의 움직임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몸이 없는 영혼 속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의 기쁨이 있는 곳이면 그것이 몸 안이든 밖이든 어디든지 바로 이 마음의 감각이 있게 된다. 바로 이런 내적 감각 또는 일종의 영적 감각 또는 느낌 그리고 영혼의 움직임 바로 이것을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이 무엇인가를 느껴서(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에 따라 움직일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이런 내적 감각과 움직임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처럼 매우 강하게 작용할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천국을 묘사한 것을 보면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넘치도록 크고 활기 차서 가장 강하고 가장 생생한 감각작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심령을 움직이고 성도들을 강력하게 자극하며 활력을 주고 사로잡으며 그들을 뜨거운 불꽃과 같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사랑과 기쁨이 감정이 아니라면 ‘감정’이라는 단어는 언어학적으로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얼굴과 그들의 구속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구속주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묵상하고, 그들을 위해 구속주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음을 깊이 생각할 때, 그들의 마음이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감정적으로도 절대로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과 기쁨 가운데 있는 천국의 경건과 믿음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의심할 바 없이 참된 경건은 거의 감정에 내재한다. 어떤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려면 우리는 그 사물이 순수하고 완벽하게 나타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금의 참된 본질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금광석의 상태에서가 아니라 순화된 상태에서 살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참된 경건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결함과 혼합도 없이 최고로 완벽한 상태에서 오로지 참된 경건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참으로 경헌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외인들이며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위로부터 낳음을 입었고, 하늘이 그들의 본향이며, 이런 신적인 출생으로 생긴 그들의 본성은 하늘에 속한 본성이다. 그들은 하늘에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 참된 경건과 믿음의 원리가 그들 안에 있으며, 그것은 하늘의 경건이 전달된 것이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장차 그들이 받을 영광의 여명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영광스러운 세계에 적합한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
9.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과 경건의 표현 수단으로 제정하신 여러 원리와 의무의 본질 그리고 양식을 보면 분명해진다.
기도를 예로 들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완전성, 존엄, 거룩하심, 선하심, 자기충족성, 우리의 비참함, 허망함, 의존성, 무가치함 그리고 우리의 소원과 갈망을 선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신다. 또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울어지게 하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강요하라고 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표현하는 것들이 우리의 심령을 적절하게 감정적으로 자극하게 하여 우리가 구하는 복들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습관적으로 겸손과 경외심을 표현하도록 의도된 제스처나 외적 행동 양식들은 우리들 자신의 심령이나 다른 사람들의 심령을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노래로 찬양하는 것 역시 전적으로 신앙감정을 고무시키고 표현하기 위해 만드신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표현할 때 산문으로가 아니라 시로써, 그것도 음악과 함께 하도록 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구조가 시와 음악을 들으면 감정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례의 본질과 양식도 같은 사실을 가르친다. 우리 인간의 구조를 염두에 두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위대한 복음과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 귀로 듣도록 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 일들에 대해 교훈을 얻도록 정하셨다. 뿐만 아니라 복음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된 위대한 일들이 성례라는 시각적 표상으로 우리 눈앞에 제시되도록 하셨다. 그것은 성례가 우리의 감정에 더욱 큰 영향을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신적인 일들을 인간의 심령과 감정에 각인시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의 위대하고 중요한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당신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 열려지고 적용되며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단지 사람이 훌륭한 성경주석서나 강해서를 갖거나 훌륭한 경건서적을 갖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껫 설교라는 제도를 세우실 때 마음 속에 품으셨던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교뿐만 아니라 이런 서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하게 교리적으로 또한 철학적으로 이해시키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설교만큼 사랑의 심정과 감정에 인상을 심어 주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설교로 사람에게 특별히 생생하게 적용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설교야말로 믿음과 경건에 속한 중요한 사항들 즉 인간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그 비참함을 치유하는 치료책의 필요성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껫 제공하신 그 치유책의 영광스러움과 충분함에 대해 죄인들을 감정적으로 깨우칠 수 있는 적절한 도구다. 설교는 종종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배운 바 있는(벧후 1:12-13) 경건에 속한 위대한 일들을 성도로 하여금 다시 기억하게 하고, 성도들에게 적절한 체계로 제시함으로써 성도들의 순수한 마음을 각성시키고 그들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 있는 사랑과 기븜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고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또는 사도로 또는 선지자로 또는 복음 전하는 자로 또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슴한다(엡 4:11, 12,16).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 사역을 가르치고 권면할 때 사도는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는 중요한 목적이 사랑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슴한다(딤전 1:3-5). 하나님께서 설교라는 수단으로 성도들에게 고양시키고자 하시는 또 하나의 감정은 기쁨이다. 그래서 사역자들을 성도들의 기쁨을 돕는 자라고 부른다(고후 1:24).
10. 참된 믿음 또는 거룩한 심령이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죄를 마음의 완악함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성경은 도처에서 죄와 마음의 완악함을 연결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노하셨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5). 사람들은 이런 완악한 마음 때문에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말슴에 순종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미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겔 3:7). 광야에 있었던 완악하고 반역적인 세대가 사악했던 이유는 그들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시 95:7-10). 시드기야가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한 것 역시 그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었다. “저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대하 36:13). 마음의 강퍅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니이까”(사 63:17).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 역시 그들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행 19:9).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 마음의 죄악과 부패함에 내버려 두시는 것은 종종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요 12:40). 사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가는 악한 마음과 강퍅한 마음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노하심을 격동하여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8).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2-13). 사람을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며 그 부패함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굳음 마음을 제하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한다(겔 11:19, 36:26).
여기서 굳은 마음이란 감정이 없는 마음, 곧 덕스러운 감정으로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은 마음은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무지하며 감동되지 않고 쉽게 인상을 주기 어려운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굳은 마음을 돌과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며, 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되는 마음과 상반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읽게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두 마음은 상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드러운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것에 쉽게 인상을 받는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요시야의 마음이 부드러웠기 때문에 그를 칭찬하셨다. 분명한 것은 그의 마음이 부드러웠다는 말은 그의 마음에 경건한 신앙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엇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왕하 22:19).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 아이들이 다른 일들로 쉽게 감동받는 것처럼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로 쉽게 감정이 영향을 ㅂ다고 감동되는 마음을 뜻한다.
성경의 본문 가운데 몇 가지를 보면 굳은 마음이란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타조는 자기 새끼를 본성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욥기는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욥39:16)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위험에 빠졌을 때에도 감정적인 변화가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라고 표현된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라고 표현된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성경에서 굳은 마음이란 경건한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하며, 성경은 자주 마음의 죄와 부패함을 마음의 강퍅함과 연결시킨다. 다라서 그 반대로 은혜로운 마음과 거룩함은 경건한 감정을 소유하는 것과 그런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죄의 근원은 거룩함의 결여나 부족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따라서 죄가 강퍅한 마음과 경건한 감정이 결여된 마음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므로 거룩함은 그런 경건한 감정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나는 모든 감정들이 부드러운 마음이 산물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미움과 분노와 허영과 다른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높이는 감정들은 강퍅한. 마음에서 잘 자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의 강퍅함과 마음의 부드러움은 감정들과 관련된 표현이고, 마음이 어떤 감정들에게서는 쉽게 영향을 받지만 어떤 감정들에게는 굳게 닫혀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여러 감정들은 뒤에 가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요컨대 나는 참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고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이 마음 속에 현존해 있는 감정의 강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참된 성도들의 마음 속에도 영적이지 않은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신앙감정은 종종 혼합되어 있다. 모든 감정들이 은혜의 산물은 아니며 대부분 본능적 감정일 수 있다. 그리고 비록 감정들이 거하는 곳이 몸은 아니라 하더라도 몸의 상태는 마음 속의 현존하는 감정에 매우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거룩한 감정은 습관적이기 때문에 믿음의 정도를 감정이 작용하는 습관의 정도와 강도에 따라서 판단해야지 감정의 작용, 자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습관성의 강도는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내적인 영향과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감정이 없이는 참된 신앙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에 거룩한 감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떠한 진리의 빛도 선하지 않다. 그리고 마음 속에 거룩한 감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습관과 원리도 선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감정적 작용에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떠한 외적 열매도 선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