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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걷는다

[추가] 이른바 '서울 중심점 표지석'에 관한 자료 사진

작성자제자리|작성시간07.02.13|조회수788 목록 댓글 6

[추가] 이른바 '서울 중심점 표지석'에 관한 자료 사진

 

지난해 봄에 서울 인사동 하나로빌딩 지하층에 남아 있는 이른바 '서울 중심점 표지돌'에 관한 내용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별건곤> 제23호(1929년 9월 27일자 발행)에 '경성 최중심지(京城 最中心地)'라고 소개된 사진자료가 들어 있는 것을 새로 확인하였기에, 그것을 여기에 추가로 정리하여 둔다.

 

▲ <별건곤> 제23호(1929년 9월 27일자 발행)에 소개된 '경성 최중심지(京城 最中心地)'이다. 여기에는 "20여년전 경성의 최중심지 - (인사동 태화관내)"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사진 속에 보이는 곳이 그냥 중심지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중심지를 표시한 돌이라는 것인지 잘 구분이 안된다. 하지만 이 당시에 '서울의 중심지'라는 관념이 통용되고 있었던 사실만큼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곳이 무슨 연유로 서울의 중심점이라는 것인지, 그리고 "20여년전"이라 함은 과연 어느 때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자료의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또한 이 중심점 표지석이 세워진 때가 과연 수백년 전 조선시대부터의 일인지, 아니면 근대적 측량개념 혹은 외곽지형의 균분지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한 대목인 듯하다.

 

(정리 : 2007.2.13,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참고자료]

 

이른바 '서울 중심점 표지석'이란 것의 정체는?

 

삼일만세운동의 현장인 '태화관' 자리에 대한 글을 정리하기 위해 인사동 안쪽에 있는 '태화빌딩' 부근을 두어 차례 둘러본 적이 있다. 현재 태화빌딩 앞쪽에는 '삼일독립선언유적지' 기념비와 '순화궁터' 표지석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 태화빌딩 바로 옆에 있는 하나로빌딩(중앙교회) 자리에도 꽤나 흥미로운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하나로빌딩은 태화빌딩과 더불어 "인사동 194번지"로 표시하고 있는데, 원래 양쪽 다 예전의 태화관(순화궁터)였다가 도심재개발 과정에서 양쪽으로 분리된 것이다.

 

건물 전면의 한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안내표지석을 살펴보니, "서울 중심점 표지돌"이라고 하고 "여기 놓인 네모꼴 화강석은 서울의 한복판 중심점을 표시한 표지돌로 건양 원년(1896)에 세웠다"고 적혀 있다.

 

가운데 문을 열고 계단 아래로 내려서면, 지하층 계단 바로 아래에 이 표지돌이라는 것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사각형 중심돌을 사이에 두고 사방으로 팔각형 기둥돌이 에워싸고 있는 형태이다.

 

주차관리원의 설명을 듣자하니, 이것이 원래 여기에 있던 것은 아니고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약간 자리를 옮겨 이곳으로 옮겨서 보전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자리가 지하층이니까 원래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자료를 보니까 이 표지석은 한동안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의 경계화단에 놓여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몇 가지 궁금한 건, "서울 중심점 표지돌"이라고 하였으니 이곳이 과연 '서울 중심점'이기는 한 것인지, 그리고 안내표지석에 표시된 대로 과연 1896년이라는 시기에 설치된 것인지, 무슨 근거로 그렇게 표시한 것인지 하는 것 등이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래의 사진에서 보이는 중심점 표지돌이라는 건 암만봐도 그러한 뜻을 지닌 것 같지는 않아보이며, 그저 한옥(이나 무슨 정자와 같은 구조)의 초석이나 기둥돌 모양 같아 보이는데 그것이 어째서 '서울 중심점을 나타내는 표지석'이라는 것인지 .... 선뜻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명을 버젓이 해두고 있으니 무조건 아니라고 할 도리는 없다. 차차 이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해들어가는 방법 밖에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주 미흡하지만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역사>(1993)에 약간의 설명이 들어 있으므로, 이에 관한 내용을 덧붙여 둔다.)

 









[참고자료]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역사" (2003)

 

(107~108쪽) 태화기독교사회관이 자리잡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일대는 조선시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주인이 자주 바뀌면서 권세와 영화의 변천을 목격한 유서깊은 장소이다.

 

고려 왕조를 무력으로 붕괴시키고 조선조를 창시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별궁으로 이용되었던 한양(서울)을 도읍지로 삼고 이곳에 궁궐과 도로를 건설하면서 역사의 중심지를 옮겼다. 1495년 서울로 천도하면서 주궁터를 북한산자락, 지금의 경복궁으로 삼았지만 4대문과 성곽으로 확정된 서울 도읍의 중앙점을 바로 태화기독교사회관이 자리잡게 될 인사동 194번지로 잡아, 그곳에 지표석(地標石)을 세웠던 것이다.(*주)

 

(*주) E. Wagner, The Center: The Social Evangelistic Center, Seoul Korea, 1930, p.1; "The Social Evangelistic Center at Seoul", KMF, Dec. 1930, 화보사진. 그러나 중앙을 표시하는 지표석이 정확하게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중앙교회가 빌딩건축후 안내문을 쓰면서 건양원년(1896년)을 건립연도로 밝혔으나 일제시대 선교사 문헌들은 건립연대를 조선조 초기로 밝히고 있다). 또한 1930년 당시 사진자료를 보면 지표석은 가운데 팔각형 석조물이 자리잡고 동서남북 네 방향을 의미하는 공 모양의 네 석조물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만들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현재 남아 있는 돌의 모습은 중앙 돌이 4각이고 주변 4개볼이 8각 기둥에 꼭대기에 구멍을 낸 형태가 되어 있다. 이처럼 중앙지표석의 모양이 언제 바뀌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없으나 1938년 옛 건물을 헐 때 전에 있던 지표석도 같이 철거되고 대신 현재의 것을 세워놓은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또는 일제 말기 총독부 당국에 의해 훼손된 것을 해방 후 다시 복원하면서 형태가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지표석 형태가 바뀐 데 대한 정확한 상황설명은 불가능한 형편이다.

 

그리고 원래 이 지표석은 태화사회관 부지 안에 있었으나 1980년 태화빌딩 건축과정에서 재개발 구획정리에 따라 중앙교회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중앙교회 빌딩과 태화빌딩 사이 경계선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정리 : 2006.3.4,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자료보충] '양경거류지'에 채록된 '태화정'와 '경성중심점'

 


▲ <양경거류지>에 수록된 '태화정' 및 '경성중심점' 관련 항목이다.

 

경성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흔히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일본 언론계의 거물 토쿠토미 이이치로(德富猪一郞, 1863~1957)의 저작물 가운데 <양경거류지(兩京去留誌)> (民友社, 1915)이란 것이 있다.

 

여기에서 '양경(兩京)'이라고 한 것은 동경(東京)과 경성(京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일본과 조선을 왔다갔다 하면서 일기 대용삼아 긁적거려놓았던 글들로서 국민신보와 경성일보 등에 게재되었던 것을 다시 모아 책으로 엮는다는 뜻이 담겼다.

 

그야말로 잡문이거나 개인의 감상 같은 것을 적어놓은 내용들이 적지 않지만, 어쨌거나 이 사람 자체가 나름의 권세가에 포함되는 사람인지라 다시 새겨듣거나 역사의 행간을 읽어낼 만한 중요한 증언 또는 채록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죽 훑어보니까 '태화정(太華亭)'이라는 항목(178~179쪽)이 들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글의 말미에 표시된 내용에 따르면 이것은 1914년 10월 17일에 정리된 내용이다.

 

그런데 태화정이라고 하면 삼일운동의 현장이 '명월관 지점' 즉 '태화관'이 있던 곳이 아닌가 말이다. 글의 내용만으로는 이곳이 반드시 인사동의 태화관 자리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 시절 서울에 다른 '태화정'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으니 이곳이 필시 그 '태화관'의 태화정일 가능성은 99%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더구나 글의 내용 가운데 " ...... 그 아래에 석상(石床)이 있고, 무학선사(無學禪師)의 정한 곳, 이곳이 경성중심점(京城中心點)이라고 전해진다 이른다"고 적고 있는 것이 보인다.

 

현재 인사동 태화빌딩 옆 하나로빌딩(중앙교회)의 중앙계단 아래 지하층에는 '서울중심점표지석'으로 알려진 석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미 소개한 바 있는데, 위의 토쿠토미가 적어놓는 '태화정'관련대목에 "경성중심점...... 운운"하는 내용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관념은 적어도 1910년경 이전부터 전해내려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한편, 위의 내용에 등장하는 태화정은 다름 아닌 "아베무불거사(阿部無佛居士)의 우사(寓舍)"라고 표시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곳(예전의 순화궁었다가 나중에 태화관이 들어서는 자리)은 친일귀족 이완용의 집이었다가 1913년 12월 1일자로 그가 옥인동에 새집을 지어 나간 이후 용도불명 상태가 되었고, 그 이듬해인 1914년 12월 무렵부터 '태화관'이라는 이름의 여관이 개업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니까 이완용이 옥인동으로 떠난 이후 1년 동안은 "어떤 일본인이 이 집에 여관을 설치하기로 교섭중"이라는 신문기사만 나와 있을 뿐 그 사용처가 분명하지 않았던 것인데, 위의 토쿠토미의 글에서 나오는 태화정이 태화관의 태화정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사이(즉 1914년 1년동안)의 일정기간에 '아베'라는 일본인이 이 집에 머물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아베'라는 인물 역시 알고 보면 '토쿠토미'에 버금가는 거물이다. 그는 토쿠토미가 운영하던 국민신문의 부사장을 지냈고 그의 초빙으로 경성일보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본명은 아베 미츠이에(阿部充家, 1862~1936)이나 무불거사(無佛居士) 또는 아베 무부츠(阿部無佛)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경성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것이 1914년 8월 1일이었고, 그 후 4년 가량을 조선에 머물며 경성일보과 매일신보를 경영하였는데, 그의 취임시기로 가늠해보건대 급히 조선으로 건너와서 때마침 비어있던 이완용의 집(곧 순화궁 자리)을 임시숙소로 빌려 당분간 거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에 관해서는 기회가 닿는대로 좀 더 관련자료를 조사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끝으로 아베에 관한 참고자료를 하나를 덧붙여 둔다. 국립중앙도서관의 도서목록을 살펴보면, 그의 고희를 맞아 일본과 조선에 있는 지인들이 기념책자를 만들어준 것이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古稀之無佛翁   阿部無佛翁古稀祝賀會 編  阿部無佛翁古稀祝賀會  昭和6[1931]     6-69-A184

 

(정리 : 2006.4.4,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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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구룡산 | 작성시간 07.02.13 흐음... 흥미있는 이야기 입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중심점을 종루라고 생각햇던 것은 확실하니... (세종실록지리지 : 鐘樓 在都城中央 ) 혹시 그것과 관계가 있을런지요 ? 태화관자리와 종루(보신각)가 직선거리로는 100m 정도 밖에 안될 터이니까요...
  • 작성자구룡산 | 작성시간 07.02.14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 http://gimjenet.co.kr/dolo4.htm ) 이란 곳에 (인용시작)" 서울중심점 표지석은 조선 고종33년 건양(建陽)원년(1896년)에 태화관 자리를 한양의 중심지라고 하여 이 표지석을 세웠다. 이곳이 서울의 중심점이 되는 이유는 지번의 순위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표지석은 서울 중앙의 중심점이며 전국토지의 구심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 (인용끝) 지번 매기는 것을 이 지점부터 시작해서 중심이라는 이야기 인바.. 그러면 왜 그 지점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지번을 매기기 시작했느냐에 대한 대답이 없기는 마찬가지군요 ^^
  • 답댓글 작성자구룡산 | 작성시간 07.02.14 (이어지는 인용문) 현재 서울의 중심점 표지석은 원래 위치에서 동쪽으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었다 하며 지금은 하나로 빌딩 앞으로 이전되었다. 예전의 자리에는 “서울 중심점 표지석”을 설명하는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서울 중심점 표지석은 사각형 화강암으로 4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앙의 중심돌은 서울을 상징하고 4개의 기둥은 서울을 둘러 싸고 있는 북한산 인왕산 남산 낙산등 4대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동.서.남.북 방향인 청룡(동쪽) 백호(서쪽) 주작(남향) 현무(북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다.
  • 작성자제자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2.14 태화관 관련 자료와 위의 별건곤 수록 사진을 보면, 일제 때 남아 있던 초석의 모습과 지금의 그것은 많이 다르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집니다. 원래의 돌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거기에 무슨 표시나 글씨 같은 것으로 어떻게든 그 내막을 짐작이라도 해 볼텐데, 지금 남아 있는 돌로는 원래의 돌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원래의 돌이 아니라면 지금의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이 정말 난감하네요.. 아무튼 일제때 경성중심점이라거나 서울중심지표지돌 같은 개념이 있엇던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에 의미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 작성자제자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2.14 지번을 매기는 시작점이라는 인용구절에 대해서는, 그것이 확실한 인용출처가 있다면 모르되 막연한 얘기라면 선뜻 믿기는 어려운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지번을 매기기 시작한 것은 일제 초기 일본인들에 의해 토지조사가 이뤄지면서 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한성 무슨무슨부 무슨무슨방 몇통 몇호라는 주소체계를 지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기에 무슨 지번이 따로 있었던 것인지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대한제국 시절에 양지아문이라는 측량기구가 만들어진 적이 있긴 했지만, 이에 관한 관련자료도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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