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해방 공간에서 신익희와 조성환의 거처로 사용된 낙산장(駱山莊, 종로 6가 11번지)의 내력
▲ 아래에서 발췌정리한 내용의 자료출처는 신창현, 『내가 모신 해공 신익희 선생』(인물연구소, 1992)이다.
※ 참고사항 : 이 낙산장은 동숭동 129번지의 낙산장(옛 우석 김종익 가옥)과는 전혀 무관한 별개의 공간이다.
(244쪽) ……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의 사무실은 종로 6가에 있는 낙산장(駱山莊)에 있었다. 낙산장이라 명명(命名)한 것도 해공 선생이었다. 낙산 밑에 있는 연유로 낙산장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원래 이 터(垈)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사촌동생이며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조카이고, 한말(韓末)에 이조판서(吏曹判書)와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을 지낸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의 궁(宮) 터이던 것을 일제 말기에 수원의 거부 차모(車某*)가 사서 일부는 수십 채의 집을 지어 매도하고 일부 대지에다가는 고루거각을 지어 자신의 살림집으로 만들려다가 해방과 더불어 임정 내무부에 빌려주게 된 것이다.
※ 차준담(車濬潭, 1906~1980)
※ 이재곤(李載崑, 1859~1943) 자작, 이재완(李載完, 1855~1922) 후작의 동생
(244~245쪽) …… 이 집의 구조는 바깥 솟을대문의 양 옆으로 줄행랑이 있고, 중문과 그 왼쪽 바른쪽 뜰 아래에 온돌방, 마루방, 창고 등등의 건물과 안방, 건넌방, 여섯 칸 대청에 뒷방, 찬방, 주방, 사랑채로 통하는 일각문에 사랑방, 대청, 누마루 7, 8십 칸의 궐사(厥舍)였다. 그래서 그 근처 주민들은 99칸 집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교회 건물*이 서 있다.
※ 중앙성결교회(中央聖潔敎會, 종로 6가 11-1번지) 1979년 신축 이전
(245쪽) …… 임정 내무부에서 빌어 사용할 때 정문인 솟을대문 기둥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정치공작대 판사처(大韓民國臨時政府內務部政治工作隊辦事處)’라고 누런 바탕 널나무에 검은 페인트로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 현판글씨는 해공의 친필이었다. 정치공작대의 운명은 미군정장관의 탄압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해체결의로 말미암아 재중경 임시정부와 의정원 연석회의 결의로 입법된 지 여섯 달, 공작 착수한 지 넉 달만인 4월 중순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 전공이 가석할뿐더러 앞으로 독립운동에 국민에 뿌리박힌 조직체 없이는 독립운동이고 건국운동이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해공은 이를 국민운동의 기반으로 전환할 양으로 이승만 박사와 제휴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라고 이름하고 운니동(雲泥洞) 14번지 대원군 이하응의 저택이던 운현궁(雲峴宮) 안 새로 지은 양관(洋館)에 간판을 걸게 되었다.
(245쪽) …… 이렇게 되어 낙산장은 자연히 빈집이 되자 전 임시정부 군무부장이고 현 임시의정원 의원인 청사(晴蓑) 조성환(曺成煥)*이 국내에 남아 혼자 살고 있던 부인과 같이 우선 비어 있는 사랑채로 들어와 살고 안채는 그대로 비어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해공께서는 환국한 뒤 약 반년 만에 들어온 가족들과 비로소 이 집에다가 살림을 꾸리게 되었다.
※ 청사 조성환(晴蓑 曺成煥, 1875~1948)
(264쪽) …… 해공은 국내에 들어온 뒤 충무로에 있는 한미호텔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유숙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 봄에는 중국에서 가족들이 귀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정치공작대 사무실로 사용하던 종로 6가에 있는 낙산장(駱山莊)에서 가족과 함께 살림을 시작하였다. 이 집터는 원래 조선왕조 말기 양관제학(兩館提學)을 지낸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政應)의 아들이요,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조카이고, 고종의 종제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의 구기(舊基)인데 해방되기 수년 전에 수원의 거부 차(車)씨*가 사들여 한옥 수십 채를 지어서 분양하고, 남은 대지에 지은 것이다.
※ 이재곤(李載崑, 1859~1943) 자작, 이재완(李載完, 1855~1922) 후작의 동생
※ 차준담(車濬潭, 1906~1980)
(264~265쪽) …… 예전 사대부(士大夫)들이 구종(驅從), 별배(別陪)를 거느리고 살림살이하기에 적합한 구조로 된 건물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깥마당이 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시원할 정도로 넓다. 층계 위로는 여섯 칸 대청이 훤칠하게 쳐다보이는데 왼쪽에 건넌방, 오른쪽에 안방과 복도가 보이고 뒤로 뒷방이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넓직한 사랑마당이 있고, 마당가 담장 밑에는 작약과 모란이 수십 그루가 있는데 봄이 되면 그 풍부함과 요염함을 경쟁이나 하듯이 맘껏 뽐내어 허울 좋게 핀다. 층계 위에는 사랑 툇마루를 격해서 큰사랑, 작은사랑, 마루방, 뒷사랑이 있다. 뒷마당은 경사가 약간 져 있는데 해당화, 영산홍, 장미 등등의 꽃나무와 그 밖에 백합, 난초 등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심어져 있어 옛 풍속을 연상하면 대방마님이 몸종을 거느리고 한가롭게 거닐며 소요(逍遙)하는 모양을 상상케 할 정도의 후정(後庭)으로 꾸며져 있었다.
(265쪽) …… 이 집이 낙산장이라 불리워진 것은 해방 후부터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한 뒤 의정원 의원의 현임으로 임정각료와 같이 환국한 청사 조성환(晴蓑 曺成煥) 선생이 그 사랑채에서 해공보다 몇 달 훨씬 앞서서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청사가 환국하기 전 부인 조씨(趙氏)_는 혈혈단신으로 인아족척의 집을 전전하면서 고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사 선생이 환국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이 낙산장 사랑채를 빌어 거처를 정한 것이다.
(384쪽) ……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북경에 남아 공작하던 조중서도 급거 귀국하여 백창섭과 같이 서울 종로 3가 뒷골목 돈의동 168 오복여관(五福旅館)의 방을 하나 빌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사무국(大韓民國臨時政府特派事務局)이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인사 진헌식(陳憲植), 임병기(林炳驥), 박문(朴文) 등을 끌어들여 계동(桂洞) 입구 임병은(林炳殷)의 집 사랑채로 사무실을 옮겼다가 임시정부요인 제2진이 그해 12월 2일 저녁 무렵 서울에 도착 환국하므로 해공 신익희 내무부장과 제휴해서 종로 5가 수원 부호(富豪) 차준담(車濬談)의 집을 얻어서 12월 3일 아침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정치공작대 판공처(大韓民國臨時政府內務部政治工作隊辦公處)’라는 간판으로 바꾸어 달았다.
(444쪽) …… 해방된 1945년 12월 2일 서울에 입성한 해공께서는 종로 6가 낙산장(駱山莊)을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 사무실로 정하였다. 건국운동의 일환으로 남한 방방곡곡에 공작원을 내려보내 지방조직에 착수하는 한편, 임시정부각료와 의정원 의원들을 초청하여 임시정부 내무부 기구 밑에 설치하는 정치공작대 조직의 의의(意義)와 조직원으로서의 마음가짐, 태도에 대한 지침을 강습시키느라 눈코 뜰 사이 없었다.
(947쪽 연보) …… 1946년 4월 중국에서 환국한 가족과 종로 6가 낙산장(駱山莊)에 살림을 마련 …… (6월) 종로구 묘동(廟洞) 78(장준영 소유 가옥)로 이사.
(681쪽) …… 28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귀국해서는 충무로 한미호텔 19호실, 종로 6가 11번지 낙산장(속칭 수원집, 또는 아흔 아홉 칸 집), 묘동 78번지(영월 장준영 소유 가옥), 삼청동 106번지(일제 때 경전 사장 집) 적산가옥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으나 전부 빌려 산 것이나, 임대계약에 의한 것들이었다. 그러하니 효자동 이 집이 해공 60평생 처음의 사유재산이었다.
(881쪽) …… 이런 인물[*조성환]이 해방 직후 그 흔한 적산가옥 한 칸 얻지 않고 종로구 종로 6가 11번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정치공작대 판사처(政治工作隊 辦事處)로 사용하던 집의 사랑채 협호(夾戶)에 살다가 건국(建國)되던 해에 74세를 일기로 하세하였다.
(추가자료)
▲ 『동아일보』 1946년 6월 20일자, 「항일투쟁의 맹장(猛將), 이범석 장군(李範奭 將軍) 환영회 성황(歡迎會 盛況)」
해외에서 32년 만에 환국한 전 광복군총참모장 이범석 장군의 일행을 맞이하여 건국군협진회(建國軍協進會) 한국장교단(韓國將校團)에서는 18일 하오 3시부터 시내 동대문안 낙산장 조성환(曺成煥) 씨 자택에서 회원 40여 명이 참석하여 환영회를 열었다. (하략)
▲ 『서울신문』 1949년 9월 21일자, 「재향장교회(在鄕將校會) 발족(發足)」
구한국장교회(舊韓國將校會)에서는 임원을 개선하는 동시에 한국재향장교회(韓國在鄕將校會)라 개칭하고 낙산장(駱山莊)에 두었던 사무소를 종로 4가 9번지로 이전하였다 한다.
⊙ 회장 윤병호(尹炳晧) ⊙ 부회장 이항식(李恒植) ⊙ 총무부장 신가균(申可均)
▲ 『조선일보』 1955년 2월 7일자, 「색연필」
수 일 전 서울 종로 6가 11의 1 김씨댁에는 밤중에 술에 취한 청년 5명이 기생 세 명을 데리고 들이닥치며 행패를 하는 통에 공군중령인 집주인 김씨를 비롯하여 온 집안 식구가 부상을 당했다고. 그런데 그 집은 그 전에 요리집을 하던 낙산장(駱山莊)이었던 만큼 술취한 패들이 요리집으로 알고 야료를 한 모양. 그러다가 주인 행동이 요리집 뽀이 같은 리 없었으니 사고가 날 수밖에─. 헌병과 경찰관이 동원되어 두 시간만에야 진정되었다고 하니 요리집하는 집은 마음 놓고 못 살 일.
▲ 『동아일보』 1978년 11월 17일자, 「99칸 한옥(韓屋)에 불」
17일 낮 11시경 서울 종로구 종로 6가동 12의 1 노준용(盧峻容) 씨(61, 나전모방 사장)의 99칸 한옥에서 불이 나 본채 전부와 행랑채 일부 등 80여 평을 태워 4백여 만 원의 피해를 내고 한 시간만에 꺼졌다. 불을 처음 본 이집 고말선 씨(55, 여)에 따르면 옷감을 손질하다가 옆 빈방에서 종이타는 냄새가 나 문을 열어보니 천장에서 불이 붙고 있었다는 것. 불이 난 집은 대지 750평, 건평 450평의 목조기와집으로 1943년 수원(水原) 윤(尹)부자라는 사람이 지어 살다 6.25이후에는 낙산장이란 요정으로 바뀌었는데 지금의 집주인 노씨는 본채의 일부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재곤 자작(李載崑 子爵)의 집터(종로 6정목 12번지)에 들어선 '양사대주택지(養士臺住宅地)'의 분양안내광고(1938년)이다. 해방 이후 '낙산장'으로 변모한 집이 곧 이때 만들어진 주택지의 하나가 아닌가 싶은데, 이에 관해서는 추가적인 확인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함께 덧붙여두고자 한다.
(정리 : 이순우, 2026.6.17, https://cafe.daum.net/dist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