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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들여다보다

[재정리] 건청궁(乾淸宮) 안의 양관(洋館) '관문각(觀文閣)'의 내력

작성자제자리|작성시간06.12.06|조회수1,287 목록 댓글 4

[재정리] 건청궁(乾淸宮) 안의 양관(洋館) '관문각(觀文閣)'의 내력

 

을미사변의 현장,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에는 '관문각'이라고 부르던 서양식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의 존재는 세상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옥호루 건물' 사진 뒷배경에도 등장하거니와 제법 사람들에게 소개된 건청궁 전경 사진에도 들어 있으므로, 새삼스러운 것은 전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언제 지어졌으며, 또 언제 사라진 것일까? 아래에서는 이에 관한 몇 가지 자료들을 모아둔다. 아울러 이 관문각이 언제 헐어졌는지에 대한 자료도 추가해둔다.

 

키쿠치 겐죠(菊池謙讓), <조선왕국(朝鮮王國)> (東京民友社, 1896)
(169쪽)

...... 여기가 운현궁이 팔도의 원성을 사며 지은 경회루(慶會樓)이다. 누와 태광전(泰光殿)의 사이를 지나 북진하면, 남방에 옹화문(雍和門)이 있다. 문으로 들어서면 연못이 있고, 작은 배를 띄운 연못 가운데의 섬에는 누각 하나가 세워졌는데, 주란(朱欄)의 목란교(木蘭橋)가 있으니 취향정(醉香亭)이 여기이다. 국왕이 연유(宴遊)하는 정자라고 전한다. 취향정의 북쪽에는 장정(長亭)의 벽을 두른 정원의 사이를 지나서 어느 집의 대문이 있다. 문안은 국왕 및 왕족이 거처하는 건청궁(乾淸宮)인데 근신궁녀(近臣宮女)는 그 장정(長亭)의 안에 머물며, 건청궁의 북각(北角)에 벽와백악(碧瓦白堊)의 양관(洋館)이 하나 있어 이름하기를 관문각(觀文閣)이라 이르는데, 러시아인 사바친이라는 사람이 축조한 빈전(賓殿)으로 경복궁의 보물은 모두 이 전내에 들여놓았다. 이들 외에 허다한 장정(長亭), 단정(短亭), 이궁(離宮)이 있다. 소나무언덕, 동북쪽에 있는 정원의 화목(花木)은 여러 나라로부터 수집하였는데, 건축의 장관, 정원의 아름다움은 쇠약해졌다 할지라도 경복궁은 왕궁의 전궁(殿宮)으로는 부족함이 없다.
 

시노부 쥰페이(信夫淳平), <한반도(韓半島)> (1901)
(152쪽)
...... 경복궁내 유일의 양관(洋館)으로 일찍이 궁정(宮庭)의 보물을 넣어두었던 곳이라고 이르는 관문각(觀文閣)은, 건청궁(乾淸宮)의 뒤편에 있다. 원래 로서아인 아무개가 축조한 것으로, 당초에는 이를 빈전(賓殿)으로 충당했다고 이른다. 결구(結構)가 장위(壯偉)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지금은 백벽(白璧)은 낡았으며 벽와(碧瓦)는 퇴락하고, 석계(石階)는 허물어져 발을 디딜 수가 없는데, 정면(正面)의 쌍룡(雙龍)은 색이 바래 덧없이 새똥에 맡겨져 있을 뿐이다. 이곳과 떨어져 수십 보, 도랑에 붙어서 북으로는 주란황비(朱欄黃扉)의 큰 누각이 하나 있으니 집옥재(集玉齋)라 부르며, 여기가 각국사신의 알현소였다고 듣고 있다.

 


▲ 시노부 쥰페이, <한반도(韓半島)> (1901)에 수록된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의 모습이다. 그 뒤로 보이는 양관이 건청궁 유일의 양관 '관문각(觀文閣)'이다.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건청궁 관문각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사바찐, 薩巴丁, 薩巴珍)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883년에 처음 한국(조선)으로 건너온 사바틴의 행적과 건축관련활동에 대해서는 김태중, "개화기 궁정건축가 사바찐에 관한 연구 : 고용경위와 경력 및 활동환경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논문집> 제12권 제7호 통권93호 (1996년 7월)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논문에서는 관문각의 건립시기에 대해 "1888년 5월 관문각신축공사의 약정이 이뤄지고, 착공 4년 후인 1892년에 준공을 보았다"고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바틴은 숱한 시비와 분규(특히 부실시공문제)에 휘말리는 곤욕을 치렀다고 전한다. (다만, 이 논문의 필자인 김태중 교수는 '관문각'은 신군영의 관아건물로 추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궁내의 건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라고 서술하고 있어, 이것이 건청궁 안의 건물이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 4년 이상 인천해관에 근무한 사바찐은 1888년 4월, 묄렌도르프의 후임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O. N. Denny, 德尼)를 통하여 서울의 신왕궁에 주재하면서 '외국방옥(外國房屋)'을 신축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는 사바찐이 인천해관장인 영국이 스트라이플링(A. B. Stripling, 薛必林)과 관계가 좋지 않아 해관을 떠나기로 작정함에 따라 데니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내려온 것이다.

인천시대를 끝내고 서울시대를 시작하면서 사바찐에게 공사가 맡겨진 이 건물의 이름은 관문각(觀文閣)이었다. 1888년 3월 25일에 시역(始役)을 본 관문각은 서양식 군제를 본받아 .... (이하 부분은 사실관계의 오류가 많아 인용을 생략함) ...... 

현존하지 않고 도며이나 사진도 남아 있지 않은 관문각의 양식과 규모 등은 알 수 없지만 사바찐이 작성한 관문각의 공사비내역서에 의하면 벽돌과 유리가 들어갔으며 증기보일러가 설치되었고 앞뒤로 복도와 계단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일부에는 일본산 자재와 일본인 기술자가 투입되었다고 하니 관문각은 신군제에 걸맞게 양식(洋式)에 가까운 건물이었고 규모 또한 작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해 5월 초손에 관문각공사를 시작하면서 사바찐은 정부와 고용건을 별도로 약정했다고 한다. 이 약정은 입국시와 같은 신분에 관한 고용약정이 아니라 공사를 추진하는 방법에 관한 것으로 사바찐은 관문각 공사의 경리일체와 공사의 지휘 감독을 모두 맡기로 되어 있었다. ...... (중략) ...... 또한 사바찐이 설덕을 지명하여 차출을 요구한 것은 설덕이 양식공사에 밝으며 인천해관 시절의 사바찐과 호흡이 맞는 공장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기의 관문각 신축공사는 그런대로 순조로웠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사바찐은 '대조선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지도(Plan of General Foreign Settlement at Chemulpo)를 작성하고 있다. 하스가 말한 조계지 측량이 이것으로 사바찐이 조선에 도착한 지 거의 5년만에야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때 사바찐은 관문각 공사를 연주하는 동시에 조계지를 측량하여 지도를 만드는 작업도 병행한 후 같은 해 11월 9일, 미국,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청국, 일본의 7개국 공사들이 서명하고 통상사무 조병직(趙秉稷) 독판이 직인을 찍은 이 지도에는 사바찐의 서명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관문각은 착공 4년 후인 1892년에 준공을 보았지만 공사과정에서 사바찐은 다음 절에서 보는 바와 같은 숱한 시비와 분규에 휩쓸리게 된다.

관문각 착공 2년 후인 1890년경부터 사바찐은 그를 도우는 역할을 맡았던 현응택(玄應澤)이라는 한국인 집사와 심각한 불화에 빠져 귀국가지 생각하게 된다. ...... 이미 언급한 '薩巴丁所建宮室建物의 漏渗事解明 및 所費額數明細表'(1892년 6월 4일 작성제출)에는 관문각공사를 둘러싼 분규의 전말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와 있다. ...... (하략)

 


▲ <대한제국 관보> 1901년 6월 4일자에는 '관문각 철훼비용 청구'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로봐서 관문각은 1901년 무렵에 철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완공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이 건물을 헐어내려고 했던 것은 아마도 을미사변의 현장이라는 점, 그리고 애당초 이 건물이 부실하게 지어졌다는 점 등이 고려된 탓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렇다면 이 건청궁 관문각은 과연 언제 사라졌을까?

 

이에 관한 가장 명쾌한 자료는 <대한제국 관보> 1901년 6월 4일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여기에는 "[휘보(彙報)], 관청사항(官廳事項)란'에 "탁지부에서 청의한 ... 관문각 철훼수운비... 등을 예비금중 지출할 것을 의정부회의를 경한 후 상주하여 제왈가(制曰可)라 하심"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밖에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각사등록(공문서자료)'에도 관련내용이 두어 곳에 등장한다.

 

여기에 적혀 있는 내용 그대로 관문각의 철거가 1901년 당시에 이뤄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다음의 사진자료를 보면 정말로 그러했을 가능성은 아주 높은 것 같다.

 

▲ Burton Holmes, <Travelogues>에 수록된 옥호루의 모습이다.

 

미국 시카고대학 사진학과 교수인 엘리아스 버튼 홈즈(Elias Burton Holmes: 1870~1958)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고 직접 촬영한 사진자료 등을 정리하여 '버튼 홈즈의 여행강의'라는 시리즈물을 펴냈다. 이 가운데 한국 관련내용이 제10권에 수록된 'Seoul : The Capital of Korea'이다.

 

어떤 자료에는 이 '트래블로그(Travelogues)가 "1901~1908년 간행분 (10vols) 가운데 제10권이라고 적어놓아 1908년에 간행된 것인 듯이 설명해놓았고, 또 어떤 자료에는 버튼 홈즈의 여행강의 시리즈가 1901년에 시작된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 1901년에 간행된 듯이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더구나 버튼 홈즈의 '트래블로그'는 여러 판본이 거듭 출간되었으므로 "한국관련 내용"의 초판본이 도대체 언제인지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못한 상태이다. (초판본이 언제인지는 조속히 규명되어야 할 일인데, 이 책의 국내소장처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워서 미처 확인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또 일설에는 그가 우리 나라에 처음온 것은 "1899년"의 일이라고 하기도 하나, 이 부분이 정확한 고증을 따른 결과인지는 참으로 의심스럽다. 나의 생각으로는 홈즈의 책에 수록된 사진 속에 등장하는 거리풍경, 건물의 건립연대 등에 비추어 보건대 사진촬영시점이 1900년 내지 1901년 언저리인 듯하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증과정을 거쳐야만 가타부타 확실한 시기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국립영상자료원이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버튼 홈즈가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촬영한 필름이 우리 나라와 관련한 최초의 동영상이라고 하고, 이 때가 1899년이었다"는 것이 거의 공인되다시피한 얘기인데, 나로서는 이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는 주저되는 점이 없지 않다. 아무튼 버튼 홈즈가 버튼 홈즈가 언제 처음 우리 나라에 왔으며, 그후 재차 방문한 일이 있는지의 사실여부는 이래저래 별도의 고증작업을 꼭 거쳐야할 일이 아닌가 한다.)

 

버튼 홈즈가 언제 한국에 왔는지가 정확하게 밝혀진다면, 옥호루 사진 속에서 없어진 것으로 확인된 '관문각' 건물의 철거시기도 저절로 규명되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점에서도 버튼 홈즈의 행적과 출판자료의 연혁 등은 서둘러 규명될 필요가 있겠다.

 


▲ 국사편찬위원회 유리원판자료 #사자1483 건청궁 옥호루의 모습이다. 이 사진자료가 언제 촬영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옥호루 지붕 너머에 보이던 서양식 건물 '관문각(觀文閣)'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마당에 세워진 전등의 모습에 비춰보건대, 버튼 홈즈의 책에 수록된 사진과는 큰 차이가 없는 시점에서 촬영된 것인 듯하다.

 

(정리 : 2006.5.10,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재정리 : 2006.12.6,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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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ddorang | 작성시간 10.04.06 버튼 홈즈와 국사편찬위원회 사진 자료를 보면 관문각 건물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붕위로 보이는 피뢰침이 보이는데 이것이 관문각 건물의 일부임.
  • 답댓글 작성자제자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4.06 의견 감사합니다. 시노부 준페이의 책에 수록된 것과 비교하면 버튼 홈즈 등의 사진자료는 거의 앵글이 일치하는데, 그렇다면 뒤로 보이는 서양식 건물 지붕은 사라진 것으로 봐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피뢰침 부분은 건물자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말씀인지요? 아님 건물 일부가 남아 있었다는 뜻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Minsookim | 작성시간 21.04.07 저 피뢰침은 관문각이 아니라 곤녕합 지붕 위에 달려있는 겁니다.
  • 작성자ddorang | 작성시간 10.04.06 사진은 찍을때 조금 뒤에서 당겨서 찍을때와 건물 바로앞에서 찍을때 화면에 들어오는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고요. 홈즈의 사진에 나타난 피뢰침은 시노부 준페이 책 사진이 선명하지 못해 피뢰침이 보이지 않아서 판단에 혼동이 된것입니다. 제가 가진 자료는 1911년책에도 관문각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면 1901년 철거도 근거가 애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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