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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들여다보다

'영종'과 '정종'은 왜 '영조'와 '정조'로 고쳐졌을까?

작성자제자리|작성시간06.03.09|조회수1,780 목록 댓글 1

'영종'과 '정종'은 왜 '영조'와 '정조'로 고쳐졌을까?

 

우리가 익히 '영조'와 '정조'와 부르는 두 임금은 원래 '영종'과 '정종'이라는 묘호를 가졌으나, 고종 때에 이르러 이것이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그래선지 철종시기 이전 내지 고종 초기에 간행된 여러 고문헌에는 난데 없는 '영종'이나 '정종'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맥락을 알지 못하면 자칫 인쇄오류인 듯이 오인하거나 어느 임금인지 선뜻 짐작이 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두 임금 가운데 '영종'이 '영조'로 바뀌고, '정종'이 '정조'로 고쳐지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뤄진 일이다. 우선 '영조'의 경우에는 아래 첨부된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1889년 즉 고종 26년에 이르러 영종대왕의 공덕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묘호를 종(宗)에서 조(祖)로 고쳐 올려부르자는 논의에 따른 것이고, '정종'의 경우에는 1897년 대한제국의 출범과 동시에 고종임금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그 후속예절의 하나로 직계 4대조에 해당하는 역대 임금을 황제로 추숭하면서 묘호가 함께 고쳐진 사례에 속한다. 즉, 고종은 국왕으로 등극할 때 추존왕 익종(翼宗, 효명세자)과 신정왕후(조대비)의 아들(익성군, 翼成君)이라는 신분으로 바뀌었으므로, 따라서 아버지는 익종, 할아버지는 순조, 증조할아버지는 정조, 고조할아버지는 사도세자로 정리되는 셈이다.

 

이에 따라 조선 건국과 더불어 태조의 직계 4대조가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추존되었다시피,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의 경우에도 직계 4대조(건국 시조로서 태조도 포함)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리면서 모두 조(祖; 이 경우에는 조공종덕(祖功宗德)의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할아버지(조상)라는 뜻이 강함)로 고쳐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사도세자(장헌세자)는 황제의 칭호를 받기 직전에야 장종(莊宗)이라는 추존왕이 되었다가 불과 몇 달 여에 다시 '장조'라는 황제의 신분으로 전환되었고, 익종(翼宗)은 문조(文祖)라는 전혀 다른 이름의 묘호를 받기도 했다.

 

(영조 때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할 때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죽은 효장세자(진종)의 후사를 잇게 하였으므로, 법통으로 보년 정조는 효장세자의 아들이 되고, 이를 뒤집어 말하면 고종의 고조할아버지는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가 되는 것이 맞는 듯 보이지만, 정조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을 누가 강조하였던 바 이는 별개의 논의로 따져봐야될 문제인 듯하다.)

  

이와는 별도로 고종 때는 직계 4대조에 포함되지 않았던 진종, 헌종, 철종에 대해 종래의 묘호 그대로 사용하다가, 순종 때에 이르러 1908년에 묘호는 그대로 둔 채 황제의 칭호를 별도로 부여한 바 있었다. 이들 추존 황제들의 경우, 묘호까지 고쳐지지 않았던 것은 고종황제의 직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

 

『태조실록』 태조 1년(1392년) 7월 28일(정미) 기사

사대 존호 추상 : 1) 고조고 목왕(穆王), 비 효비(孝妃) 2) 증조고 익왕(翼王), 비 정비(貞妃) 3) 조고 도왕(度王), 비 경비(敬妃) 4) 황고 환왕(桓王), 비 의비(懿妃)

 

『태조실록』 태조 1년(1392년) 11월 6일(계미) 기사

사대조 존호 책봉 : 1) 황고조 목왕(穆王), 황고조비 효비(孝妃) 2) 황증조 익왕(翼王), 황증조비 정비(貞妃) 3) 황조 도왕(度王), 황조비 경비(敬妃) 4) 황고 환왕(桓王), 황비 의비(懿妃)

 

『태종실록』 태종 11년(1411년) 4월 22일(임자) 기사

종묘 사실 존호 가상 : 1) 목왕 묘호 목조(穆祖), 2) 익왕 묘호 익조(翼祖), 3) 도왕 묘호 도조(度祖), 4) 환왕 묘호 환조(桓祖)

 

『태종실록』 태종 8년(1408년) 8월 7일(임오) 기사

태상왕 묘호 : 태조(太祖)

 

『숙종실록』 숙종 7년(1681년) 9월 18일(정묘) 기사

공정대왕(恭靖大王) 묘호 의정 : 정종(定宗)

 

 『숙종실록』 숙종 24년(1698년) 11월 6일(정축) 기사

노산대군(魯山大君) 묘호 의정 : 단종(端宗)

 

『예종실록』 예종 즉위년(1468년) 9월 24일(경진) 기사

묘호 의정 : 세조(世祖)

 

드디어 의논하여 계달하기를, “묘호(廟號)는 신종(神宗)·예종(睿宗)·성종(聖宗) 중에서, 시호는 열문 영무 신성 인효(烈文英武神聖仁孝)로, 혼전(魂殿)은 영창(永昌)·장경(長慶)·창경(昌慶) 중에서, 능호(陵號)는 경릉(景陵)·창릉(昌陵)·정릉(靖陵) 중에서 하소서.” 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대행대왕께서 재조(再造)한 공덕은 일국의 신민으로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고 일컬을 수 없는가?”하니,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등이 아뢰기를, “여덟 글자는 신 등이 감히 제한한 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조종(祖宗)의 시호가 모두 4자·6자·8자에 그쳤기 때문에 이를 모방하여 의논한 것입니다. 세조는 우리 조종에 세종(世宗)이 있기 때문에 감히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때에 세조가 있고 또 세종이 있었는데, 이제 세조로 하는 것이 어찌 거리낌이 있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신 등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한계희가 재차 신 등에게 이르기를, ‘어찌 여덟 자로 한정할 것인가?’ 하였으나, 상교(上敎)라고 전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성상의 뜻을 알지 못하였으니, 대죄(待罪)하기를 청합니다.”하고, ...... 한참 있다가 중관(中官)에게 술을 대접하도록 명하고 다시 의논하여 고쳐서 계달하게 하였다. 시호를 ‘승천 체도 지덕 융공 열문 영무 성신 명예 인효 대왕(承天體道至德隆功烈文英武聖神明睿仁孝大王)’으로 하고, 묘호는 ‘세조(世祖)’로 하여 권감이 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효(仁孝) 위에 의숙(懿肅)을 더하고, 능호(陵號)는 태릉(泰陵)으로, 전호(殿號)는 영창(永昌)으로 하라.” 하고, 인하여 대죄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인종실록』 인종 1년(1545년) 1월 6일(경자) 기사

 

중종(中宗)의 묘호를 중조(中祖)로 고쳐부르자는 인종(仁宗)의 전교

 

 

우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찬성 이기(李芑), 우찬성 성세창(成世昌), 좌참찬 권벌(權橃), 병조 판서 정옥형(丁玉亨), 예조 판서 임권(任權), 호조 판서 임백령(林百齡), 예조 참판 정만종(鄭萬鍾), 병조 참판 신영(申瑛), 형조 참판 윤개(尹漑), 공조 참판 강현(姜顯), 동지중추부사 정순붕(鄭順朋)이 명을 받고 예궐하니, 전교하기를, “대행 대왕의 묘호를 보고 내 생각에도, 상사(商史)에 은(殷)나라의 도를 부흥시겼으므로 중종(中宗)이라 호칭하였다는 말이 있다 하여 조정이 이에 의거하여 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미 계하(啓下)하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생각하건대 부왕(父王)께서 폐조의 혼란한 때를 당하여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반정(反正)하고 종사를 40년 동안 또 편안하게 하셨으니, 중흥시킨 공이 작다 할 수 없다. 그래서 조(祖)라 칭하고자 하는데 첨의(僉意)가 어떠한가? 중(中)자가 중흥의 뜻이라고는 하나 또한 흡족하지 못한 듯하니, 세조(世祖)의 예(例)에 견주어 종(宗)자를 고치고자 한다.” 하였다. 윤인경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다시 함께 상의하였으나, 조(祖)자 위에는 달리 알맞은 글자가 없고 세(世)자가 있을 뿐인데 이미 세조의 묘호가 있으니 합당한 자가 전혀 없습니다. 또 역대의 임금 중에 특별히 조자로 칭한 경우가 없으며 조는 공이 있는 것이고 종은 덕이 있는 것이니, 종자가 어찌 범연한 것이겠습니까. 위에서도 《상서(尙書)》 무일편(無逸篇)에서 보신 바와 같이 은 중종(殷中宗)의 일이 바로 대행 대왕의 일과 서로 같았기 때문에 이 호를 의논해 올린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무일편의 은 중종에 대한 일에 부표(付標)하여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졸곡(卒哭)뒤에 백립(白笠)을 쓰는 일에 대해서는 이제 육조(六曹)와 함께 회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조는 공이 있고 종은 덕이 있는 것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나, 부왕께서는 공과 덕을 다 갖춘 가운데에서도 그 공이 크시니 은 중종과 덕은 서로 같을지라도 공은 현격히 다르다. 어찌하여 조자 위에 알맞은 자가 없다 하는가. 나는 조호(祖號)로 칭하여 올리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다. 그리고 백립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인경 등이 회계(回啓)하기를, “남송 고종(南宋高宗)의 호를 정할 때 홍매(洪邁)가 조로 칭하고자 하였으나 우무(尤袤)가 ‘한 광무(漢光武)는 장사정왕(長沙定王)의 후손으로서 들어가 대통(大統)을 이었으므로 조로 칭하였으나, 고종은 중흥하였어도 휘종(徽宗)의 아들로서 바로 대통을 이어받았으므로 조로 칭할 것은 없다.’ 하여 마침내 고종이라 칭하게 된 것입니다. 신들이 상의 분부를 다시 받고 반복하여 생각하여 보았습니다만, 세조를 조로 칭한 것은 아우로서 형을 이었기 때문인데 대행 대왕께서는 중흥하였어도 바로 성종(成宗)의 계통을 이었으니 조로 칭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 (중략) ...... 하니, 대답하기를, “부왕께서는 성종의 계통을 이으셨다 해도 그 사이에 폐왕(廢王)이 재위하였으므로 세조와 문종(文宗) 사이에 노산(魯山)이 재위한 일과 서로 다르지 않을 듯한데, 어찌하여 유독 조호(祖號)를 칭해 올릴 수 없단 말인가? 또 송 고종의 일과는 견주어 논할 수 없으니 내 뜻을 따르기 바란다. 그리고 백립에 대한 일은, 성종께서 전교하신 뜻이 우상(右相) 등의 뜻과 서로 맞기는 하나 참판 등의 뜻도 예문과 맞는다. 상제(喪制)의 대례(大禮)는 경솔히 정하기 어려울 듯하니, 내일 성종 때의 전례에 따라 대간·홍문관이 함께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1608년) 2월 21일(무인) 기사

 

빈청 대신들이 아뢰기를, “신들이 《실록(實錄)》을 참고하여 반복하여 상의한 결과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는 선양(禪讓)받아 중흥시켰으니 조(祖)라고 일컫는 것이 진실로 당연합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재조(再造)의 공덕이 있기는 합니다만, 대를 이어 수성(守成)하였으니, 사체가 본래 다릅니다. 따라서 종(宗)으로 일컫는 것이 당연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비망기로 이르기를, “이는 막중한 일인데 나 또한 어찌 잘 알 수 있겠는가. 나의 의견은 전에 이미 다 유시하였으니, 경들이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라. 〈이런 내용으로 대신에게 이르라.〉” 하였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1608년) 2월 25일(임오) 기사

 

묘호 의정 : 선종(宣宗)

 

『광해군일기』 광해군 8년(1608년) 8월 4일(임인) 기사

 

묘호 개정 : 선종(宣宗) ---> 선조(宣祖)

이비가 아뢰기를, “다시 물어서 아뢸 일로 전교하셨습니다. 영의정 기자헌에게 물었더니, ‘신들의 두 번 아룀에서 이미 모두 진달드렸는데, 다시 하문을 받들었기에 신이 복상했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아서 아룁니다. 좌상이 복상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혹 말을 전해듣기는 하였습니다만,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오직 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판서를 뒷 정사에서 차출하도록 하라.” 하고, 정사를 그대로 시행하였다. 빈청이 모여 의논하여, 선종 대왕(宣宗大王)의 추상 존호를 계통 광헌 응도 융조(啓統光憲凝道隆祚)라고 하고, 묘호를 선조(宣祖)라 하고, 의인 왕후(懿仁王后) 추상 존호의 망(望)에 현숙(顯淑)과 장숙(莊淑)과 명덕(明德)이라 하고, 공성 왕후(恭聖王后) 추상 존호의 망에 현휘(顯徽)와 정순(貞順)과 명순(明順)이라고 하였다. 단자를 입계하였다.

 

『효종실록』 효종 즉위년(1649년) 5월 23일(신사) 기사

묘호 개정 : 열조(烈祖) ---> 인조(仁祖)

 

대행 대왕의 묘호(廟號)를 개정해서 올리기를 인조(仁祖)라 하고, 시호를 헌문 열무 명숙(憲文烈武明肅)이라 하였다.【몸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숙(肅)이다. 나머지는 모두 위에 나타났다.】 대신 이하가 아뢰기를,

“시호를 의논하던 날에 뭇사람의 의논이 모두, 공이 있는 분을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분을 종(宗)이라 하는 것이 고례(古禮)인데 대행 대왕께서는 공은 조종(祖宗)을 빛내시고 덕은 온 누리에 입혔으니 높혀 조(祖)라 하는 것이 실로 고례에 부합하며 시법에 열(烈)자에 대한 해석이 셋이 있는데 그 중에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묘호에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같았으므로 열자로 의논해 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의논하는 자들이 남당(南唐)의 임금 서지고(徐知誥)가 이 호칭을 사용하였으므로 지금 대행왕에게 이 글자를 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여러 재상들과 널리 상의하였더니 어떤 이는 ‘시법에는 글자는 같아도 뜻이 각각 다르니 위로 소열(昭烈)의 열자에 비교할 것이지 하필이면 아래로 남당의 열자에 비교하는가.’ 하고, 어떤 이는 ‘이미 합당하지 않다는 의논이 있으니 즉시 여쭈어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 조종조 때에도 시호 가운데 고쳐야 할 글자가 있으면 여쭈어 고친 전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들이 다시 시법을 상고하여 반복해 헤아려 보았습니다. 뭇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헌(憲)자가 묘호로 합당하니 시호 중의 문(文)자 위에 있는 헌자는 빼고 대신 경(景)자로 고치고 무자 위에 열(烈)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개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에 정한 묘호를 그대로 쓰는 것이 무방할 듯하니 다시 의논해 아뢰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열조(烈祖) 두 글자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칭한 바와 한소열(漢昭烈) 묘호의 자의(字義)를 취한 것으로 진실로 대행 대왕의 공덕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말하는 자들은 남당(南唐)이 참람한 묘호를 사용하여 국운(國運)을 재촉했기 때문에 지금 이 시호를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인(仁)자가 대행 대왕 묘호로 가장 합당합니다. 삼가 《통전(通典)》을 상고하건대 역대 제왕의 시호에 부자가 호칭이 같은 이도 간혹 있었으니, 우리 나라 세종과 세조의 호칭도 어찌 이에서 근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명나라 제도를 상고하건대 이미 인조(仁祖)가 있는데 또 인종(仁宗)이 있었습니다. 근거할 만한 고금의 전례(典禮)가 이미 이와 같을뿐더러 주공(周公)의 군부(君父)와 같은 시호를 쓴다고 한 것이 더욱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니, 이로써 결단하여 의논하건대 오늘의 묘호로는 이 인자를 버리고는 달리 쓸 글자가 없으니 인자로 고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묘호를 이미 인자로 고쳤으니 시호 가운데 인명(仁明) 두 글자를 명숙(明肅)으로 고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는 바로 만세의 공론이므로 내가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다. 정신(廷臣)의 정성이 재차 삼차에까지 이르렀으니 감격스러운 생각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절로 눈물이 흐를 뿐이다.” 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즉위년(1776년) 3월 12일(계미) 기사

 

묘호 의정 : 영종(英宗)

 

『고종실록』 고종 26년(1889년) 11월 28일(경오) 기사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묘호(廟號)를 추후에 높이기 위하여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행하도록 명이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영종 대왕은 문장과 계책과 무공은 우뚝이 모든 임금 가운데 으뜸이고, 52년 동안 명하여 토벌하고 공로에 따라 관리들의 품질(品秩)을 내려 준 것은 역사책에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이므로 탄식하며 잊지 못하는 생각이 세월이 오래 될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지금 다행히 대론(大論)이 일어나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게 되었으니, 위로 성상의 효성이 빛나고 아래로 사람들의 여론에 참으로 부합합니다. 신들은 흠송(欽頌)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병시(金炳始)는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영종 대왕은 문덕(文德)으로 교화를 펴시고 무덕(武德)으로 난리를 평정하셨으니, 큰 공과 성대한 업적은 높고 위대하여 형용할 수 없으며 나라의 터전을 영구히 다져서 오늘날까지 아름다움이 이어졌습니다. 이에 묘호(廟號)를 추후에 높이는 것은 실로 모든 임금들의 변함없는 법이며 온 나라 사람들의 다같은 바람인데, 조정의 의논이 하나로 합쳐져 성대한 예를 크게 거행하게 되니, 따르고 계승하는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날 것이므로 찬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조병세(趙秉世)는 아뢰기를,  “우리 영종 대왕은 큰 공과 위대한 업적이 있는데도 공이 있는 임금은 ‘조(祖)’라고 칭하는 예를 아직 행하지 않았으니, 수백 년 동안 겨를이 없어 행하지 못한 일이어서 공의(公議)가 억울해합니다. 오늘 조정의 의논이 모두 같으니 떳떳한 의식을 거행하여 묘호를 추후에 높임으로써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나고 사람들의 여론이 모두 기뻐할 것이므로 기쁘고 다행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우리 영고(英考)는 5기(紀) 동안 정치가 융성하였고 덕은 모든 임금 중에 으뜸이며 문장과 계책과 무공은 역사에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이므로 백대 후에도 탄식하며 잊지 못하는 생각이 오래될수록 더욱 간절하다. 지금 경들의 의논을 보니, 묘호를 추후에 높이는 것이 여러 사람의 여론에도 참으로 부합하여 나 소자는 감동되어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공이 있으면 ‘조’로 칭하는 것은 바로 변할 수 없는 법이니, 오늘 추후에 천양하는 것은 오히려 늦다고 하겠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나라의 예를 살펴보니, 묘호와 시호(諡號)를 일찍이 고쳐 정한 예(例)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고쳐서 의논하여 정해야 하니, 묘호를 의논할 날짜를 해조에서 좋은 날을 받아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행한 예가 과연 그러하였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우상(右相)이 아뢴 것을 물론 널리 고찰해야 합니다. 시호는 행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니 한두 글자는 고치는 것이 마땅하고, 묘호에 이르러서는 ‘영(英)’ 자는 참으로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니, 다시 더할 나위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영’ 자는 실로 문무(文武)의 뜻을 다 갖추고 있으니 과연 더할 나위 없다. 더구나 ‘영’ 자는 바로 평소에 남긴 뜻이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옳습니다. 묘호가 남긴 뜻에 부합하니 실로 우연이 아닙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묘호를 장차 높일 것이다. 현책(顯冊)을 추가로 올려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이나마 형용하는 것은 떳떳한 전례(典禮)에 부합하며 또 우리 왕가에서 이미 행한 예이다.” 하였다.  ...... (하략)

 

『고종실록』 고종 26년(1889년) 12월 5일(병자) 기사

묘호 개정 : 영종(英宗) ---> 영조(英祖)

 

 

『고종실록』 고종 27년(1890년) 1월 5일(병오) 기사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존호(尊號)를 추상하는 것을 칭경(稱慶)하고 진하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왕세자가 따라 나아가 예식을 행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7대의 사당에서 그 덕을 관찰하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선조를 높이고 업적을 찬양하였으며, 세 왕후에 대해서도 성대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존위를 높이고 미덕을 밝혔다. 그리하여 다함없는 추모의 정을 붙여 크게 대고(大誥)를 펴는 바이다. 생각건대 묘호(廟號)를 종(宗)이라고 하고 조(祖)라고 하는 것은 왕법(王法)을 고찰해 보건대 덕이나 공로를 가지고 부르는 것이다.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은 〈우서(虞書)〉의 첫머리에 실렸는데 하늘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해서 큰 칭호를 받았고, 고조(高祖)와 광무제(光武帝)는 모두 한 나라를 융성하게 하였는데 왕업을 창시한 것으로 해서 특별한 칭호를 받았다. 대를 잇고 선대의 업적을 고수한 공적에 대해서는 왕업을 창시한 데 비해 응당 차이를 두어야 하겠지만, 변란을 평정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업적은 반드시 큰 이름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옛날 역사에 기술한 사례로서 우리 왕조에서도 이미 시행한 규례이다.

삼가 생각건대, 영종 지행 순덕 영모 의열 장의 홍윤 광인 돈희 체천 건극 성공 신화 대성 광운 개태 기영 요명 순철 건건 곤녕 배명 수통경력 홍휴 익문 선무 희경 현효 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은 자질이 빼어난 성인으로 태어나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운수를 지녔으며, 은(殷) 나라 고종(高宗)처럼 오랫동안 노고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알았고, 한(漢)나라 문제(文帝)처럼 들어가 계승하자 모두 왕통이 빛남을 우러렀다. 부모를 잘 섬기고 형제간에 화목하여 인륜의 도리를 다했으니 그 마음을 따르고 그 뜻을 이은 것이며, 학문에 근거하여 정령(政令)을 내었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화합시킨 것이었다. 황단(皇壇)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니 그 의리는 《춘추(春秋)》의 원칙에 의거한 것이고, 왕도(王道)에 표준을 세웠으니 정사는 홍범구주(洪範九疇)에 근거한 것이었다.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맹자(孟子)의 말에 감동되어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혜택을 입히었다. 위(衛) 나라 무공(武公)이 〈억편(抑篇)〉을 노래한 나이에도 오히려 엷은 얼음을 밟으며 깊은 못에 임한 것 같이 조심하는 마음을 간직했으니, 그 금궤(金匱)와 석실(石室)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옥검(玉檢)과 은승(銀繩)에 모두 실려 있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검소하게 한 것은 우(禹) 임금의 세 가지 정사인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본받은 것이고, 부세(賦稅)와 부역(賦役)을 고르게 한 것은 홀아비,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이, 자식 없는 늙은이에게 먼저 은정(恩政)을 베푼 문왕(文王)의 정사를 본받은 것이었다. 질서를 바루고 토벌을 명하는 것은 반드시 사리를 따랐으니 가을 서리와 봄바람보다 뚜렷했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 성의(誠意)에 근본을 둔 것으로써 맑은 하늘의 해와 같이 명백하였다. 이룩한 사업은 오랜 왕도(王道)를 조화롭게 만들고, 어려움과 위험을 극복한 것은 곧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게 하였으니, 어찌 단지 훌륭한 덕을 잊기 어려운 것뿐이겠는가? 성대한 무열(武烈)은 그 누구도 다툴 수 없었다. 천벌을 내려 간악한 무리를 치고 난리를 평정한 공훈을 세웠으며, 우정(禹鼎)과 같은 신기한 계책으로 괴물들의 간악함을 통찰해 의리를 밝히는 귀감을 세웠다. 신무(神武)하여 죽이지 않은 결과 대궐에서 태평한 정사를 폈고, 의리를 크게 밝혀 나라의 위태한 형세를 돌려 세웠다. 나라의 여론이 정해지자 나쁜 무리들이 자연 감화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기강을 떨치자 큰 운수가 길이 안정되었다. 돌아보건대 선대에서 세운 공적이 너무도 많으니, 아! 어찌 드러나지 않겠는가? 후대 임금이 높이 보답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명분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혜경 장신 강선 공익 인휘 소헌 단목 장화 정성 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는 왕비가 될 복을 받아 하늘의 덕에 짝하였다. 이름 있는 가문에서 길러져 효성과 공경을 천품으로 타고났고 왕실을 빛냈으니, 유순하고 곧은 것은 왕비의 도(道)에 맞았다. 왕비가 되어서는 성녀(聖女)인 문왕(文王)의 비(妃)의 모범을 따라 왕대비를 잘 섬긴 것이 마치 문왕의 비의 덕이 왕업을 일으키는 기초가 되어 남쪽 나라에까지 교화를 편 것과 같았다. 말소리가 중궁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왕후의 복을 모두 송축했고, 은택이 외가에 미친 것이 드물었으니 한 나라 명덕 왕후(明德王后)가 탁룡궁(濯龍宮)에서 숭상했던 절검(節儉)의 경계를 깊이 간직하였다. 30년 간 유순한 덕화를 널리 입히어 한 왕대의 훌륭한 운수를 이룩하였다.

또한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 광헌 융인 소숙 정헌 장순 왕후(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王后)는 후덕한 품성이 크게 빛났고 공은 넓고도 두터웠다. 당요와 우순 같은 훌륭한 임금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왕실의 많은 곤란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덕화로 운수를 넓힌 왕비의 공적은 아름다운 덕을 전승한 태임(太妊)이나 태사(太姒)라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정사를 대리하니 온 나라가 새 정사에서 이룩한 공을 받들었으며, 3대를 덮어주고 보호하여 한 나라 장락궁(長樂宮)의 보양(保養)보다 융성하게 하였다. 선조의 뜻을 따라 하늘의 이치를 밝히니 큰 의리가 해와 별처럼 빛났고, 이단을 물리치고 백성이 지킬 도의를 부지하니 하교가 부월(鈇鉞)보다 엄하였다. 대개 도운 것이 깊고 성취한 일이 원대한 것은 실로 지극히 유순하면서도 강하고 지극히 고요하면서도 바르기 때문이었다.

하늘에 뜬구름이 지나가듯 이미 세상을 떠나 그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나라에 남긴 풍습은 아직도 귀에 들리고 아름다운 명성도 오래오래 울린다. 그래서 못 잊어 하는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 종묘(宗廟)에서 큰 예식을 거행하였다. 아! 세워놓은 훌륭한 업적은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과 맞먹고 어지럽던 것을 다스린 데 대해 칭호를 높임에 있어서는 조(祖)로 높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원로들의 해박한 의론에서 징험하였고 조정의 의견이 일치하였기에 행적을 형상한 옥책문을 올리니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시호를 올리기 위해 좋은 날을 밝히니 해와 달 같이 빛났다. 주(周) 나라의 크나큰 업적을 찬양함에는 읍강(邑姜)의 덕을 10명의 충신과 같이 놓았고, 우순의 크나큰 공을 칭송함에는 규예(嬀汭)로 시집간 요(堯) 임금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모범을 드러내었다. 이에 제사를 지내는 동시에 아름다운 의식을 거행하였다. 올해 1월 4일에 옥책과 금보(金寶)를 삼가 받들어 올렸다.

영종 대왕(英宗大王)에게 올리는 묘호는 ‘영조(英祖)’로, 고쳐서 올리는 시호(諡號)는 ‘정문 선무 희경 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로, 추상하는 존호(尊號)는 ‘중화 융도 숙장 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으로 하였다.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존호는 ‘원렬(元烈)’로, 정순 왕후(貞純王后)의 존호는 ‘정현(正顯)’으로 하였다. 술잔을 올리니 사모하는 마음이 피어오르고 아름다운 홀〔琬〕을 쥐니 환하게 빛이 어린다. 경사(卿士)의 의견을 따르고 일반 백성들의 소원을 풀어 주니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이익을 누리게 한 은혜를 못 잊기 때문이고, 공적 있는 조상을 높이고 훌륭한 왕후를 높이니 위대한 공렬을 드날린 복락(福樂)을 받기 때문이다. 종묘(宗廟)에 가니 신령이 내려와 밝게 살피고 구석구석까지 미쳐서 온 나라에 널리 퍼진다. 새해에 경사로운 일을 시행하니 천지의 절기(節氣)가 바뀌는 때에 맞고, 따사로운 봄에 덕을 펴니 비가 와서 언 것을 풀어주는 기상에 맞는다. 이달 5일 새벽 이전까지의 잡범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다 용서하라. 아! 깨끗한 사당에 공적을 칭송하는 글을 올리고 대궐 뜰에서 관대하게 용서하는 글을 내린다. 나는 착한 자손을 마련해 준 선대 임금들의 생각을 따랐으니 규범을 이어받은 것이고, 너희들은 널리 베푸는 임금의 복을 받았으니 떳떳한 교훈이 모여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대제학(大提學) 한장석(韓章錫)이 지었다.】

 

 

『정조실록』 정조 즉위년(1776년) 3월 19일(경인) 기사

영종(英宗)의 유지를 따라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眞宗)으로 추숭

 

『헌종실록』 헌종 즉위년(1834년) 11월 19일(경진) 기사

묘호 의정 : 순종(純宗)

효명세자 묘호 추숭 : 익종(翼宗)

 

『철종실록』 철종 8년(1857년) 8월 11일(기미) 기사

묘호 개의 : 순종(純宗) ----> 순조(純祖)

 

『철종실록』 철종 8년(1857년) 8월 10일(무오) 기사

 

빈청(賓廳)에서 수의하였는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순종(純宗)의 묘호(廟號)를 조(祖)로 일컫는 일에 있어 상경(上卿)의 장주(章奏)로 인하여 조정의 신료들에게 순문(詢問)하는 일이 있었는데, 예전(禮典)이 매우 중대하니 어렵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덕화(德化)가 있으면 종(宗)이라 일컫고 공로(功勞)가 있으면 조(祖)라고 일컫는 것은 곧 당연히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요 공통(共通)된 분의(分義)입니다. 〈조·종〉 두 가지가 모두 성대하고 아름다워서 처음부터 차등이 없는 것이지만 후왕(後王)이 〈공·덕을〉 드날려 찬양하는 정성에 있어서는 특별히 뚜렷하게 드러난 것을 표현하여 칭호를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 순고(純考)께서는 하늘에서 낸 자질(資質)로 전성(前聖)의 계통을 이어 인(仁)에는 정미롭고 의(義)에는 익숙하시어 도(道)를 오래 행하여 덕화를 이루었습니다.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었음은 제요(帝堯)의 덕(德)이고 부지런하며 검소함은 대우(大禹)의 덕이니, 깊으신 인자함과 두터우신 은택은 백성의 마음에 협흡(浹洽)하였습니다.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올바른 도의를 호위하였고 서란(西亂)을 평정하여 큰 기반을 공고하게 한 것에 이르러서는 성대하신 공렬(功烈)이 옛날의 제왕보다도 월등하게 뛰어났으니, 나라 사람들이 백세(百世)토록 잊지 못하여 항상 칭찬하며 은덕 갚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주(周)나라 백성들이 문왕(文王)의 덕(德)의 순수함을 노래하며 하늘과 짝지우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성배(聖配)께서 승하(昇遐)하신 때를 당하여 지난날의 슬픔과 새로운 서러움에 있어 온 나라 백성이 동일한 심정으로 세대가 점차 멀어짐을 슬퍼하고 빛나는 공렬(功烈)을 잊기 어려움을 한탄하였으니, 이것이 중신(重臣)들이 소장(疏章)을 껴안고 궐문(闕門)에서 부르짖게 된 이유인 것인데, 신(臣)은 덕화(德化)를 직접 본 가장 오래 된 사람으로서 더욱 찬송(贊頌)하는 정성이 간절합니다. 막중한 예전(禮典)은 진실로 근거(根據)를 끌어댐이 귀중한 것인데, 역대(歷代)에서 상고하고 모방할 데가 드물으나, 우리 조정에는 본디 전해오는 가례(家禮)가 있어 전후 성왕(聖王)의 제도를 계승할 만하니, 오직 널리 의견을 묻고 의논을 채택하여 제도(制度)·문물(文物)과 의식·절차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의 의논도 대략 동일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36년(1889년) 9월 1일 기사

장헌세자(莊獻世子) 추숭 묘호 의정 : 장종(莊宗)

 

『고종실록』 고종 36년(1899년) 12월 7일 기사

 

태조 및 사대조 묘호 개정 및 제호(황제 칭호) 추숭 : 태조(太祖; 태조고황제); 장종(莊宗) ---> 장조(莊祖, 장조의황제); 정종(正宗) ---> 정조(正祖, 정조선황제); 순조(純祖, 순조숙황제); 익종(翼宗) ---> 문조(文祖, 문조익황제)

 

의정부(議政府)에서 태조대왕(太祖大王)의 묘호 망단자(廟號望單子)는 ‘태조(太祖)’【천대(千代)에 빛을 뿌린 것을 태(太)라 한다.】·원조(元祖)【인(仁) 체행(體行)하여 백성들의 어른이 된 것을 원(元)이라 한다.】·‘예조(藝祖)’【시호법에 없다.】로, 제호 망단자(帝號望單子)는 ‘고황제(高皇帝)’【기강을 만들고 표준을 세운 것을 고(高)라 한다.】·‘순황제(純皇帝)’【덕과 업적이 순수하게 갖추어진 것을 순(純)이라 한다.】·‘열황제(烈皇帝)’【나라의 터전을 크게 하고 넓힌 것을 열(烈)이라 한다.】로,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시호 망단자(諡號望單子)는 ‘고황후(高皇后)’·‘순황후(純皇后)’·‘열황후(烈皇后)’로,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고황후’·‘순황후’·‘열황후’로,

장종대왕(莊宗大王)의 묘호 망단자는 ‘장조(莊祖)’【덕이 훌륭하고 예절이 공손한 것을 장(莊)이라 한다.】·‘광조(光祖)’【선대의 위업을 잘 이어나간 것을 광(光)이라 한다.】·‘흥조(興祖)’【훌륭한 계책을 크게 떨친 것을 흥(興)이라 한다.】로, 제호 망단자는 ‘의황제(懿皇帝)’【성스럽고 신성하며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의(懿)라고 한다.】·‘소황제(昭皇帝)’【덕을 밝히고 공로가 있는 것을 소(昭)라고 한다.】·‘철황제(哲皇帝)’【밝은 지혜가 깊은 것을 철(哲)이라고 한다.】로, 헌경 왕후(獻敬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의황후(懿皇后)’·‘소황후(昭皇后)’·‘철황후(哲皇后)’로,

정종대왕(正宗大王) 묘호 망단자는 ‘정조(正祖)’【안팎이 복종하는 것을 정(正)이라고 한다.】·‘성조(聖祖)’【높은 덕으로 계통을 물려준 것을 성(聖)이라고 한다.】·‘경조(敬祖)’【기미를 경계하고 조심한 것을 경(敬)이라고 한다.】로, 제호 망단자는 ‘선황제(宣皇帝)’【정사와 교화를 널리 편 것을 선(宣)이라고 한다.】·‘유황제(裕皇帝)’【어질고 훌륭하여 위업을 이어 나가도록 도운 것을 유(裕)라고 한다.】·‘원황제(元皇帝)’【인을 체행하여 백성들의 어른이 된 것을 원이라고 한다.】로, 효의 왕후(孝懿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선황후(宣皇后)’·‘유황후(裕皇后)’·‘원황후(元皇后)’로,

순조대왕(純祖大王)의 묘호 망단자는 ‘순조(純祖)’【덕과 업적이 순수하게 갖추어진 것을 순(純)이라고 한다.】·‘희조(熙祖)’【덕을 공경하여 빛발을 뿌린 것을 희(熙)라고 한다.】·‘숙조(肅祖)’【법도가 잘 서고 밝혀진 것을 숙(肅)이라고 한다.】로, 제호 망단자는 ‘숙황제(肅皇帝)’【위와 같다.】·‘순황제(淳皇帝)’【시호법에 없다.】·‘영황제(寧皇帝)’【안팎이 귀화한 것을 영(寧)이라고 한다.】로, 순원 왕후(純元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숙황후(肅皇后)’·‘순황후(淳皇后)’·‘영황후(寧皇后)’로,

익종대왕(翼宗大王)의 묘호 망단자는 ‘문조(文祖)’【천지를 경륜하고 다스린 것을 문(文)이라고 한다.】·‘덕조(德祖)’【은덕이 멀리에까지 미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강조(康祖)’【온 나라를 편안히 한 것을 강(康)이라고 한다.】로, 제호 망단자는 ‘익황제(翼皇帝)’【백성들을 사랑하고 정사를 잘한 것을 익(翼)이라고 한다.】·‘장황제(章皇帝)’【법도가 크게 밝혀진 것을 장(章)이라고 한다.】·‘간황제(簡皇帝)’【정사하는 법이 밝고 엄숙한 것을 간(簡)이라고 한다.】로,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시호 망단자는 ‘익황후(翼皇后)’·‘장황후(章皇后)’·‘간황후(簡皇后)’로 의정(議定)하여 상주(上奏)하니, 모두 수망(首望)으로 하라는 칙지(勅旨)를 내렸다. 또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존호 중에서 익모(翼謨)를, 의모(懿謨)로 고쳐 의정하여 상주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칙지를 내렸다.

 

『고종실록』 고종 36년(1899년) 12월 23일 기사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조문(詔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법에서는 주 나라를 본받아야 하는데, 주 나라의 도리는 높일 사람을 높이고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직(后稷)을 배천(配天)한 것은 그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고,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을 추존(追尊)하여 왕으로 봉한 것은 그들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다. ...... 그리고 또 생각해 보건대 만물은 하늘에 근본을 두고, 사람은 조상에게 근본을 두는 만큼 근본에 보답하려면 조상을 높이고, 조상을 높이려면 하늘을 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는 하늘과 사람의 의사에 순응하여 왕업을 이룩하고 그것을 선대 임금들에게 물려주었으며, 열성(列聖)은 전대의 업적을 두터이 하여 위업을 이어받고, 그것을 후세에 굳건히 지켜낸 결과 업적을 거듭 빛내고 하늘의 의사를 잘 받들었다. 그러니 감히 주(周) 나라에서 배천하고 추존한 예법을 따라 우리 열성조가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으로 보살펴 준 하늘의 명령에 우러러 보답한 것을 드러냄으로써 보잘 것 없는 이 몸은 관계없다는 뜻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이번 음력 11월 17일에 모든 신하들을 거느리고 종묘(宗廟)에 나아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조대왕(太祖大王)은 태조 지인 계운 응천 조통 광훈 영명 성문 신무 정의 광덕 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로, 승인 순성 신의 왕후(承仁順聖神懿皇后)는 고황후(高皇后)로, 순원 현경 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皇后)도 고황후(高皇后)로,

고조 할아버지 장종대왕(莊宗大王)은 장조 신문 환무 장헌 광효 의황제(莊祖神文桓武莊獻廣孝懿皇帝)로, 고조 할머니 헌경 왕후(獻敬王后)는 의황후(懿皇后)로,

증조 할아버지 정종대왕(正宗大王)은 정조 경천 명도 홍덕 현모 문성 무열 성인 장효 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로, 증조 할머니인 장휘 예경 자수 효의 왕후(莊徽睿敬慈粹孝懿王后)는 선황후(宣皇后)로 높였다.

할아버지 순조대왕(純祖大王)은 순조 연덕 현도 경인 순희 체성 응명 흠광 석경 계천 배극 융원 돈휴 의행 소륜 희화 준열 대중 지정 홍훈 철모 건시 태형 창운 홍기 고명 박후 강건 수정 계통 수력 건공 유범 문안 무정 영경 성효 숙황제(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로, 할머니인 명경 문인 광성 융희 정열 선휘 영덕 자헌 현륜 홍화 신운 수목 예성 홍정 순원 왕후(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宣徽英德慈獻顯倫洪化神運粹穆睿成弘定純元王后)는 숙황후(肅皇后)로 높였다.

아버지 익종대왕(翼宗大王)은 문조 체원 찬화 석극 정명 성헌 영철 예성 연경 융덕 순공 독휴 홍경 홍운 성열 선광 준상 요흠 순공 우근 탕정 계천 건통 신훈 숙모 건대 곤후 광업 영조 장의 장륜 행건 배녕 기태 수유 희범 창희 입경 형도 성헌 소장 치중 달화 계력 협기 돈문 현무 인의 효명 익황제(文祖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統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曆協紀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로, 어머니인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홍덕 순화 문광 원성 숙렬 명수 협천 융목 수녕 희강 현정 휘안 흠륜 홍경 태운 창복 희상 의모 경훈 철범 신정 왕후(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弘德純化文光元成肅烈明粹協天隆穆壽寧禧康顯定徽安欽倫洪慶泰運昌福熙祥懿謨景勳哲範神貞王后)는 익황후(翼皇后)로 높였다.

그리고 동지(冬至) 날인 20일에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삼가 제사를 지내면서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를 함께 제사지냈으니, 높일 사람을 높이고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짐의 정성을 표시하고, 우리 태조의 큰 업적과 왕업의 터전을 닦은 것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는 여섯 가지 기운에 회복되기 시작하는 때로, 크게 보답하는 의식을 대번에 거행하니 하늘의 도리에 비추어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인정을 참작해 보아도 부합되는 것이다. 짐의 기쁜 마음을 무어라고 형용하겠는가? 신하와 백성들이 다같은 심정인 만큼 감히 하늘의 은혜를 헤아려 큰 은전이 미치게 하고,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덕을 골고루 펴는데 사령(赦令) 조항을 아래에 열거한다. ...... (하략)

 

『순종실록』 순종 1년(1908년) 5월 11일 기사

 

장조 이후 진종, 헌종, 철종에 대한 제호(황제 칭호) 추숭 : 진종(眞宗, 진종소황제), 헌종(憲宗, 헌종성황제), 철종(哲宗, 철종장황제)

 

 

내각(內閣)에서 진종대왕(眞宗大王)의 제호(帝號)의 망통(望通)은, ‘소황제(昭皇帝)’【아름다운 명망이 차 넘침을 ‘소(昭)’라고 한다.】 ‘유황제(裕皇帝)’【학문에 힘쓰고 듣기를 좋아함을 ‘유(裕)’라고 한다.】 ‘안황제(安皇帝)’【만백성이 편안하고 덕택을 입음을 ‘안(安)’이라고 한다.】이고, 효순 황후(孝純皇后) 시호(諡號) 망통은 ‘소황후(昭皇后)’·‘유황후(裕皇后)’·‘안황후(安皇后)’이다.

헌종대왕(憲宗大王)의 제호의 망통은 ‘성황제(成皇帝)’【예법과 음악을 밝게 겸비함을 뜻에서 ‘성(成)’이라고 한다.】 ‘환황제(桓皇帝)’【공경을 다하고 백성을 위해 힘씀을 ‘환(桓)’이라고 한다.】 ‘희황제(熙皇帝)’【공경스러운 덕이 빛남을 ‘희(熙)’라고 한다.】로 효현 황후(孝顯皇后) 시호의 망통은 ‘성황후(成皇后)’·‘환황후(桓皇后)’·‘희황후(熙皇后)’이며, 효정 황후(孝定皇后) 시호의 망통은 ‘성황후(成皇后)’·‘환황후(桓皇后)’·‘희황후(熙皇后)’이다.

철종대왕(哲宗大王)의 제호의 망통은 ‘장황제(章皇帝)’【법도에 크게 밝음을 ‘장(章)’이라고 한다.】·‘정황제(靖皇帝)’【유순한 덕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을 ‘정(靖)’이라고 한다.】·‘강황제(康皇帝)’【안락하고 백성들을 돌봐줌을 ‘강(康)’이라고 한다.】이고, 철인 황후(哲仁皇后) 시호의 망통은 ‘장황후(章皇后)’·‘정황후(靖皇后)’·‘강황후(康皇后)’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의정(議定)하여 상주(上奏)하니, 모두 수망(首望)대로 하라고 하였다.

 

 

(정리 : 이순우, 2006.3.9, http://cafe.daum.net/distorted)

(보완 : 이순우, 2012.9.22, http://cafe.daum.net/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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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제자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9.22 한참 전에 관련자료를 정리하다가 만 것이 있음을 알고, 나머지 부분을 새로 보완하여 글을 마무리 정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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