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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역사

여흥 민(閔)씨 삼세칠효(三世七孝)의 자취와 孝와 우애 -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작성자조영연|작성시간14.11.20|조회수238 목록 댓글 2

 

여흥 민()씨 삼세칠효(三世七孝)의 자취, 우애

    

  요즘 가진 자들 혹은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도덕 해이가 사회에 충격을 주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여 심히 우려를 자아낸다.

  그런 속에서 최근 논산 노성 파평 윤씨 명재 윤증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보고 들은 내용과 대전의 명문가 여흥 민씨 삼세칠효비(三世七孝碑)를 보고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두 가문은 회덕(은진) 송씨, 광산 김씨 가문과 더불어 이 지방의 명문가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 두 가문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두 가문의 공통성은 소위 벼슬과 출세와 거리를 멀리하고, 실제 생활 속 실천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는 특히 나눔과 검소 등 실사(實事), 후자는 실천적인 효와 우애의 본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글에서는 여흥 민씨 가문 3세칠효비를 중심으로 초야에 묻혀 행동으로 제시한 효생활의 본보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연구단지 4거리에서 우성이산(현지인들은 으싱이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기록에는 의성산-義城山-으로도 되어 있음)으로 오르다 보면 대덕초등학교 교문 옆에 여흥 민씨 재실인 영호암(永護庵), 문중 교육을 위한 사교루(四敎樓), 민평(閔枰-호조정랑 추증)과 민환(閔桓-승지 추증) 형제의 쌍효자 정려, 민삼석의 효행 정려, 남양 홍씨(민병갑의 처)의 효열비가 있다.

  대덕군지의 기록에 의하면, 여흥 민씨 삼세칠효는 위에 든 민평, 민환을 위시하여 평의 아들 광신, 광민, 환의 아들 광경, 광신의 아들 경중, 광민의 아들 원중을 이른다(문중에서는 광신의 아들 응중까지 8효라 하기도 함).

본래 김포에 근거지를 두었던 여흥 민씨는 이곳 입향조로 보는 충원(冲源 1390-1440)이 현도의 보성 오씨 가에 장가를 들어 현도에 내려와 삼정동, 용호동 등 회덕지방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아버지 심언(審言)이 여산 송씨 전()의 딸과 결혼했던 까닭에 어머니와 그의 처 묘를 외가 근처 도룡동에 옮긴 것을 계기로 민씨들이 이곳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증손 제인(霽仁)은 위사공신으로 공을 세웠으나 문정왕후 수렴청정을 반대하다 공주에 유배되어 죽은 이후 그의 후손들이 우성이산을 배경으로 한 갑천임수의 땅 도룡동에 들어오고, 중시조인 민여검(閔汝儉)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집단 정착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여검은 인조 때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웠으며, 울산부사로 근무 중 정묘호란의 화의가 이뤄졌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 때문에 병사한 충의와 애민의 인물이었다. 평과 환은 그의 아들이고 7효 중 환을 제외하고는 모두 벼슬에 나아가지 않거나 요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과 환의 쌍효자 정려는 국가로부터 하사받아 세워졌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지만 효행의 실천이 알려져 국가로부터 증직(贈職) 혹은 복호(復戶)들을 받았다. 이들의 학문과 효는 김장생, 송시열 등의 예학에 바탕을 둔 것으로 주로 도학 실천이란 면에서 더 알려진 명문대가로 성장시킨 요인이 됐다.

  * 민 평 : 임진왜란 시 부모과 함께 산골짜기로 피난하면서 부모들은 마른 곳에 모시고 자기는 축축하고 낮은 곳에 지내 폐질에 걸려 불구의 몸이 되었으며, 평생 맛있는 음식은 부모가 맛보기 전에는 입에 대지 않았다. 부모 앞에서는 앓으면서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부모상을 당해서 묘소에 초막을 짓고 3년 시묘살이를 할 때에는 내려왔던 호랑이조차 침범하지 않고 달아났다고 전할 정도다. 부모가 데리고 있던 종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어 죽으면 예를 갖추어 묻어 줄 정도로 효행과 따뜻한 인간성을 지닌 인물로 김장생, 송시열 등도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다.

  * 민 환 : 광해군 때 사마시에 합격,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지만 이이첨의 모함을 받아 면직되었으며 인목대비 폐위, 영창대군 살해 사건을 보고 무도하고 불의에 찬 광해군 정치에 항의의 뜻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간장조차 먹지 않은 채 3년상을 치르고 곧이어 부친의 상사에도 그와 같이 하다 35세로 삼년상을 마치기 전에 죽었다. 불구의 몸인 형 평을 위해 집에서 말을 사육하여 형의 출입을 도울 정도로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했다.

  * 광신광민

제가 함께 40년을 같은 집에서 살면서 중증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위해서 헌신하고. 부모 상중에는 예법대로 상을 치뤄 효성과 우애를 보인 본보기였다. 광신은 효행으로 국가에서 참봉에 천거됐으나 사양, 학문과 효행에 전념하였다. 광민은 한때 양구 현감을 지내기도 했으나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늘 곁에서 모시고 멀리 놀러가지 않았다. 아버지 모심에 용모를 단정히 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보살펴 드렸다. 부모 돌아가신 뒤에는 형 받들기를 부모 대하듯 했다.

  * 경중원중응중

형제들이 한 집에 살면서 가족간 화목을 실천하였으며, 생전에 성심으로 부모들을 섬기고 맛있는 음식과 의복으로 성심껏 봉양했다. 모두 모친 병환에는 손가락을 짓찧어 진혈함은 물론(만환, 민평도 실천) 상사 시에는 주자가례에 따라 예의를 다 갖추어 행함으로써 효행의 본보기가 됐다. 원중, 경중 등은 효행으로 벼슬에 천거됐으나 나아가지 않고 효제(孝悌)의 유교 이념을 실천했다.

  * 용중의 처 창녕 성씨의 효행과 이들의 후손으로 민삼석, 남양 홍씨(민병갑의 처)의 효행이 뒤에 이어진다.

  이상에서 여흥 민씨 집안의 효행 내력을 대강 살펴보았는데 그들은 대체적으로 벼슬의 욕심보다는 효제의 유교 정신을 진작하고 행동으로 실천한 귀감들이었다. 효도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알지만 실천하는 자는 많지 않은 오늘날,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행동과 정신은 후세인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효는 머리나 입으로 드러내는 지식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손가락을 잘라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한 것이라든지 삼년 간의 시묘살이, 6형제가 한 집에서 사는 일 등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들도 있지만 평소에 부모 모시기를 꺼리거나 금전 문제 따위 작은 일로 형제간에 다투는 사례가 빈번한 요즘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 진정한 효행과 형제간 우애가 무엇인지 반성하게 한다.

  뒤에 인현왕후, 명성왕후 등도 이 집안에서 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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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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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안여종 | 작성시간 14.11.21 효는 실천이다. 형제간의 우애 등을 생각하는 글입니다. 조영연 이사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김용미 | 작성시간 14.11.25 존경스럽습니다~ 항상 배우고자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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