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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위대한 통치자, 샤를마뉴에 대한 모든 것!

작성자로버트 박|작성시간23.03.01|조회수245 목록 댓글 0

유럽의 위대한 통치자, 샤를마뉴에 대한 모든 것!

©Getty Images

유럽의 위대한 통치자, 샤를마뉴에 대한 모든 것!

유럽 역사에서 샤를마뉴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랑크족의 전사-왕 지도자로서의 수십 년간의 정복은 대 로마 제국 이래로

 유럽이 본 가장 큰 제국의 창조로 이어졌다.

 샤를마뉴 대제는 그의 철권 통치 하에 영토를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의 열렬한 동맹으로서 수십만 명의 유럽 이교도들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샤를마뉴와 권력과 패권에 대한 그의 끝없는 갈증이 없었다면 

유럽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오늘날 유럽의 아버지로 알려진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샤를마뉴 대제와 그의 유럽 통일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우려면 계속해서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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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의 유럽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 

300여 년이 지난 8세기 유럽은

 종족, 왕국, 국가가 서로 싸우는 혼란에 휩싸였다. 

동방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여전히 번영하고

 가톨릭 교황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가와 정치의 세계는 대부분 끊임없이 경계가 이동하는 

작은 국가들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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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인들

중세 초기에 이 문화들 중에서 특히 강력한 것은 

프랑크인들의 고향인 게르만족 국가인 프랑키아였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점차 두각을 나타냈고, 

한때 위대한 문명의 직접적인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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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핀

샤를마뉴는 왕과 통치자의 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피핀 1세는 왕자의 아들로 태어나 

프랑크 왕국의 왕 킬데리히 3세 밑에서 궁전의 시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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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인들의 첫 왕

8세기 중반, 프랑크 왕국의 왕의 지위는 제한적이었고,

 왕국의 문제에 관한 진짜 권위를 가진 사람은 궁전의 시장이었다. 

751년, 피핀 1세는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킬데리크 3세를 폐위시키는 데 교황 자카리에게 지지를 호소하였다.

 킬데리크 3세의 몰락과 피핀 1세의 총권력 상승은 수세기에 걸친 

메로빙거 왕조의 종말과 카롤링거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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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와 카를로만

피핀 1세는 두 아들을 두었다. 오늘날 세계가 

샤를마뉴로 알고 있는 찰스는 747년 4월 2일에 태어났다

.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은 751년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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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만의 죽음

768년 피핀 1세가 사망한 후, 프랑크 왕국의 왕권은

 샤를마뉴와 카를로만에게 넘어갔고,

 카를로만은 프랑크 왕국을 함께 통치했다. 

그러나 이 공동 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를로만은 771년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이는 자연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어린 샤를마뉴가 

그의 동생의 죽음에 관여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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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 통치의 시작

카를로만의 죽음으로 샤를마뉴는 

프랑키아의 왕좌에 홀로 남게 되었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샤를마뉴는 엄청난 힘과 가능성을 지닌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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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시데라타와의 결혼

샤를마뉴의 정치적 정복 생활은 770년 롬바르디아 공주 

데시데라타와 결혼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혼인은 프랑크 왕국과 롬바르디아 왕국 사이에 

잠정적인 법적 동맹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결혼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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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츠가우의 힐데가드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샤를마뉴는 빈츠가우의 힐데가드를 

좋아하여 롬바르디아 공주와 이혼했다. 

같은 프랑크인 힐데가드는 

샤를마뉴 대제와의 사이에서 9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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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디아의 정복

샤를마뉴가 데시데라타와 갑작스럽게 이혼함으로써 

그의 왕국과 롬바르디아의 법적 동맹은 끝났을 뿐만 아니라

 데시데라타의 아버지이자 롬바르디아의 왕인 타실로 3세에게 불명예를 안겼다. 

샤를마뉴는 이때 새로 선출된 교황 아드리안 1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프랑크 군대를 이끌고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땅으로 들어갔다. 

774년 여름, 샤를마뉴는 롬바르디아의 수도 파비아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교황 아드리안에 의해 롬바르디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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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슨 전쟁

샤를마뉴 대제가 이끈 가장 길고 영향력 있는 전투는 색슨 전쟁으로,

30년의 대부분 동안 어떤 형태로든 확장되었다. 

프랑크족과 색슨족 사이의 경쟁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었지만, 

샤를마뉴의 권력욕은 경쟁을 새롭게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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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슨 전쟁

496년 클로비스 1세가 개종한 이후 가톨릭과 연대해온 프랑크족은 

정치적 힘뿐만 아니라 영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쟁을 벌였다. 

기독교가 발흥한 이래로 자신들의 토착 신앙을 맹렬히 고수했던 색슨족은 

샤를마뉴의 손에 의해 강렬하고 용서할 수 없는 처벌과 약탈,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영토가 함락되면서, 샤를마뉴는 

색슨족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고 세례를 받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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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정복

8세기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 남쪽에서 영토의 안전을 위협하는 

우마이야 왕조와의 전쟁으로 수많은 도시 국가들이 묶여

 무슬림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군사적 지원의 대가로 충성을 약속한 스페인의 무어인 통치자들은 

778년에 샤를마뉴와 그의 군대를 환영했다.

 다소 순진하게도, 샤를마뉴는 스페인 전역을 정복하려고 시도했고, 

처음에는 무어인과 바스크인에게 심하게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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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정복

781년 샤를마뉴는 그의 세 살배기 아들 

루이의 통치하에 아키텐 왕국을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크군은 성공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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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샤를마뉴

샤를마뉴는 거의 평생 동안 지중해의 이탈리아 해안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동쪽 대부분의 지중해 해역은 사라센 해적들에 의해 통제되었고, 

그들은 프랑크군을 육지에 남겨두었다.

 

©Public Domain

바바리아를 차지하다

샤를마뉴는 이베리아 반도와 서유럽과 남부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직후 동유럽을 목표로 삼았다.

 바이에른 공국은 789년에 프랑크군에게 함락되었고, 

이후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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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샤를마뉴

바이에른 이후, 샤를마뉴는 다시 이교 세력과 영토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790년대의 동부와 슬라브 전역은 거의 힘들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슬라브족부터 세르비아인에 이르기까지, 프랑크인들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은 크로아티아인들을 제외한 많은 동유럽 문화들은 항복했고,

 별다른 싸움 없이 기독교 개종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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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 제국

8세기 말엽,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과 그 속국들은 

서대서양 해안에서 동방의 슬라브 국가들까지 확장되었다. 

그것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유럽에서 

단일 통치자의 권한 아래 통합된 가장 큰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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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와 교황 레오 3세

8세기 말까지 유럽에는 샤를마뉴보다 더 강력한 인물이 단 한 명 있었다. 

그것은 교황 레오 3세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들에게 통일된 기독교 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잃던

 레오 3세는 799년 로마에서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로마의 본거지가 프랑크 제국의 보호 아래 있던 교황 레오 3세는 

보호를 받기 위해 충성스러운 기독교인 샤를마뉴에게 피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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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의 대관식

샤를마뉴 대제는 레오 3세가 로마로 돌아가는 것을 도왔고

 섬세한 외교를 통해 이탈리아 교황령의 질서를 회복시켰다. 

서기 800년 12월 25일 샤를마뉴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미사에 참석했다. 

베드로 대성당은 교황 레오 3세가 로마의 황제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의 대관식을 거행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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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새 시대

당시의 문서들은 샤를마뉴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의심한다.

 확실히 샤를마뉴를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이후 

최초의 로마 황제로 임명한 것은 

레오 3세와 샤를마뉴 자신이 내린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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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된 유럽

프랑크인들이 로마 제국의 유일한 진정한 후손이라는 

오래된 주장은 이제 새로운 삶을 얻었고, 

샤를마뉴의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크게 받아들여졌다. 

샤를마뉴가 즉위하기 전 몇 년 동안, 통일의 새로운 브랜드, 

제국, 기독교 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 새로 개종한 사람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 모두에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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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

로마와 기독교의 새로운 패권이 성공적으로 확립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했고, 

샤를마뉴가 신성 로마 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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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의 유산

서기 800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설립된 것은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서유럽의 정치적, 정신적 힘은 비잔티움 제국의 

동쪽 힘에 대한 가치 있는 상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광범위하고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유럽의 

그림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샤를마뉴의 정복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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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휩쓸다

샤를마뉴의 군사적 정복은 신성로마제국 수립 이후 주춤했지만, 

현장에서의 그의 행동은 사회 전반에 메아리를 계속 보냈다.

 9세기 첫 해 동안 많은 사회적, 구조적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대부분 법과 상업의 표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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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마뉴의 많은 아이들

샤를마뉴는 활동적인 아버지로 악명이 높았다.

 814년에 유럽이 멸망한 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유일한 아들인 루트비히 1세는 샤를마뉴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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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자손

샤를마뉴의 생애는 정치적,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계보적으로도 유럽의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샤를마뉴의 통치 이후에 세워진 거의 모든 유럽 귀족 가문들은 

그들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악명 높고 엄청나게 영향력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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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자손

샤를마뉴 대제를 그들의 조상으로 꼽는 또 다른 주목할 만한 가문은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회복력이 뛰어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카페 왕조이다.

 프랑스 왕가로도 알려진 카페 왕조는 987년부터 1792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48년까지 다시 프랑스를 통치했다. 

스페인 왕실을 포함한 부르봉-앙주 가문을 포함하여 

수 세기에 걸쳐 카페 왕조에서 갈라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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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폭군의 우상

유럽의 통일, 문화적 헤게모니, 종교적 순수성에 대한 생각과 

영원히 얽혀있는 유산을 가진 샤를마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서 아돌프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더 최근 제국주의적이고 패권을 희망하는 자들의 롤모델이 된 것은 당연하다.

 

출처: (History) (Britannica) (Mental Floss)

참조: History's most ruthless warri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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