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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마당

[김열] 참숯 젊음 강병철(김열 시인 발문)

작성자대전작가회의|작성시간13.01.22|조회수94 목록 댓글 0

강병철, 참숯 젊음
 
                                                    김 열(시인)

 언제 그를 처음 만났던가. 더듬더듬 그와 관계된 기억의 풀숲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얼큰한 겨울밤 한 장면이 선명하다. 대전충남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던 김흥수 시인이 충남 도고에 새로이 둥지를 틀면서 집들이하는 자리였다. 난 일군의 문인들과 좀 깊어졌다 싶은 밤에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집이라기보다는 놀이마당처럼 넓은 공간에 놀랐고 곧바로 그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 놀랐다.
 술상에 옹기종기 흩어져 이런저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마주치는, 그야말로 주흥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 밤이었다. 당시 내겐 면식 있는 문인이 별로 없어 다만 자리에 앉아 주는 술잔 받고 받은 술잔 도로 건네주며 여기저기 살피기에 바빴는데 갑자기 마른하늘에 천둥치듯 혹은 울부짖는 듯한 귀곡성이 귓전을 때렸다.

 소리가 울려온 곳을 봤더니 글쟁이라기보다는 꼭 씨름꾼이나 싸움판에서 주먹깨나 쓰는 사람처럼 생긴 이가 벌떡 일어나 있었다. 락커 마냥 샤우트한 음성을 뱉어내고 있었다. 자기음역의 한계를 넘어 좌중을 향해 웅변(?)하는 내용을 듣고 보니 연설하는 것은 아니고 즉석 사회를 보고 있던 것. 그 때 난 대전충남민족작가회의의 분위기가 본래 이러한가, 내심 아연하면서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술기운 번지는 조명 아래서 사회를 보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봤다. 나이 불문, 강직하고 투박하고 대범해 보이는, 마른 장작 같은 사내였다. 불의에 맞서 불꽃처럼 일어날 기세등등한 사람, 바로 강병철이었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강병철에 대한 내 첫인상은 뭔가 큰일을 저지를 사내처럼 그렇게 나타났다.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그와 난 별다른 인연 없이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그와 나는 작가회의 회장 강병철과 작가회의 사무국장 김열의 신분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부터 문학 관련 행사와 사무로 자주 통화하고 머리 맞대고 술을 마시는 조직적 관계로 급전된 것이다. 함께 ‘청소년 문학캠프’나 ‘산악시화전’ 각종 출판기념회 등 여러 행사를 동행 기획하게 되었다. 근거리에서 살핀 그의 사정은 첫인상과는 대조적으로 여리고 섬세한 사내의 모습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되었다. 조금은 실망하고 조금은 안심하면서 그에 대한 말을 아꼈다. 그렇게 그와 일하면서 2년 세월이 흘렀다.

 그가 시집을 낸다고 발문 청탁을 주문하면서 원고뭉치를 보내왔을 때 난감하면서 한편 난 궁금했다. 강병철, 그가 제대로 녹아 있을까. 의문을 품은 채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시, <꽃샘눈>을 읽었다. 솔직함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이랄까. 수식 없이, 그가 그처럼 살아 있어 반가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씽크대 틈새기로 빠져버린 참기름 병뚜껑 그 사소함에 온 세상 우지끈 뒤집어지는 것이 문제다 동굴 속에 안주하던 온갖 잡동사니들 '틈입자 빗자루'와 맞붙으며 아우성이다 먼저 썩은 행주 조각이 모서리에 발목 묶은 채 안 된다 안 된다 살려달라며 이를 옹문다 이번에는 식칼로 바닥 긁기다 사이다병 뚜껑이 뽀얀 먼지 뒤집어쓴 채 '아아 형광등은 너무 눈이 시려요' 옷고름 부여잡고 얼굴 붉힌다. 마지막으로 효자손 갈퀴질이다 찌그러진 볼따구 지줏대 삼아 치켜 올린 둔부가 끙끙 수치심에 떤다 모가지 힘줄 때마다 우두둑 구기며 이를 갈지만 녹슨 젓가락 하나 토해냈을 뿐 딸깍딸깍 밀려만 가는 병뚜껑

동트는 새벽, 출근길 밥고리 찾아 허발나게 달리자 삼월 아침 하늘 뚜껑이 열려 대설주의보가 내렸던 날이다
-<꽃샘눈> 전문

 '씽크대 틈새기로 빠져버린 참기름 병뚜껑'과 '주방 창살'(「새벽 설거지」)이 새벽 출근길의 바쁜 발목을 움켜잡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큰 사건이 터졌다. 참기름 병뚜껑이 손에서 빠져나가면서 신새벽 고요한 일상이 흔들리고 '사소함에 온 세상 우지끈 뒤집어'진다. 주방의 세사까지 단속하는 가장이자 맞벌이 생활인으로서의 안간힘이 환하게 드러난다. 불꽃으로 치자면 이것은 마른 장작에서 불연히 솟구치는 불꽃이 아니라 가스레인지 미세한 불구멍 하나에서 파랗게 올라오는, 마치 뱀눈 같은 불꽃이다. 평소 전혀 드러나지 않던 생활인으로서의 자세, 소심하다 할 만한 세심함은 아파트 앞 채마밭을 일구는 공간으로 옮겨진다.

아파트 입주 시초부터 할머니들이
공터에 금을 긋고 있었다 긋는 대로
채마밭 소유주가 되기에 그도 재빨리 점령군 되어
호미날 파헤치는 출석 점검 시작되었다
아내의 산타모가 비디오 가게 들리다가
쓰레기통 박살낸 날 그 와중에
김기덕의 '악어'와 '해안선'을 반납하고
으깨진 라이트 힐끗 흘겼을 뿐
스치노풀 화분으로 밑거름 날랐다
그는 확실히 맛이 갔다 파랗게 질리지 않고
오물덩이 채우면서 넉넉해진 안도감이여
-<텃밭 입문기> 부분

 금을 긋고 채마밭을 '점령'하는 일은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영역을 확보하는 일을 연상시킨다. '그 년들 푸른 알몸‘이 ’나를 미치게 만들'(텃밭 입문기)기까지엔 새롭게 확보한 영역에 대한 집착과 '비 오는 날도 물 주러 뛰어다니는(아파트 남새밭)' 잰걸음이 먼저 자리함을 읽어낼 수 있다. '손바닥 남새밭/ 오이 호박 옥수수 아욱 쑥갓 일반고추/ 청양고추 피망고추 도합 열아홉 가지/ 도무지 한 뼘도 버릴 수가 없는' 시간 쪼개기와 할 일 완료에 대한 안도감이 숨어 있다. 시계추를 되돌리면 서울에서 자취하던 어린 시절 '소금밥 비볐다 연탄불 꺼지면/ 사춘기 삼남매 모두 세 끼 당연히 굶은'(밥) 배고픈 기억도 도사리고 있다. 식솔들에 대한 집착은 생활인 강병철에게 '강박증 둘'과 '강박증 셋'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버지의 글은 풀냄새가 없어요
술에 찌든 잉크 자국 핵심 찌르던
딸아이가 늦는구나 참을 수 없는 소심증으로
안절부절 거리의 사내로 돌입한다
-강박증 둘 부분

아들놈 입시 비탈길
그니의 몸이 내 갈빗대임을 절감했다
마이너스 수능 통지표
가스렌지 오징어처럼 찌그러진 이후
아주 예민한 입시전문가가 되었다
-강박증 셋 부분

 '강박증 하나'는 그의 두 번째 시집 ‘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를 찾는다(2001)’에 있지만 혹시 '보리 이삭 같은 여자'(머리통 큰 집안 내력)나 아니면 '갈라진 몸으로'(칠판2) 신음소리 흘리는 그녀 역시 강박증의 연작이 아닐까, 싶다. '나는 오늘 젊은 관료와 수세적으로 싸우고 나서/ 바라보는 식솔들 눈을 맞출 수 없었다'(「비둘기 소묘」)는 부지런한 생활인 강병철도 관계와 인정에는 여린 면모를 노정한다.

팔 잘린 그니 달마다 찾아오면 배춧잎 몇 장씩 쥐어주었다 월수 돈 챙기듯 17년째다 불시에 교무실 찾아온 그니 막국수 한 그릇에 '컵 떼기' 소주 두 병 뚝딱 해치우더니 빳빳한 지폐 몇 장씩 쑤셔 넣고 줄달음쳤다가 또 나타났다 딸아이가 병실에 갇혀 있다며 비상사태 선포한 날 현금카드로 다시 오십 만원 찔러주다 그를 만나러 뛰어가다가 노트북 액정에 손바닥 자국내고 사십만 원 가불하다 신호위반으로 칠만 원 딱지 뗀 채 이제 마주치면 죄인처럼 고개 숙인다 집문서 열쇠 채우며, 그냥 지나쳐주세요 전화벨만 울려도 아파트가 무너진다구요 숨죽이며 구두코만 바라보는 것이다
-<업> 전문

 자투리 없는 일상의 기운을 이번 시집 곳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니'가 찾아오면 별 수 없이 그의 얇은 지갑은 열리고 만다(내가 아는 한 그의 지갑은 두껍지 않다. 그 날 쓸 돈만을 지갑이 아닌 바지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만지작거린다. 그 한계 안에서 그는 자유롭다.). '그니'와 불편하게 17년을 관계하고 왕래했다는 고백 그대로 그는 전형적으로 관계에 약한 사람이다. 이젠 '집문서 열쇠 채우며, 그냥 지나쳐달라'고 통사정하고 싶지만 '그니'가 불시에 찾아오면 그의 마지막 손가락은 어느새 주머니 속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지회장 시절 그가, 우환에 닥친 문인이나 누군가를 떠올리며 '아' 하는 장음의 탄성을 내지르고는 '어떡하지?' 하며 자문하는 듯한 모습이 겹쳐진다. 그는 낯가림이 심하지만 일단 맺어진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모종의 채무감을 느끼는 '그니' 말고도 그의 산문과 시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이 줄줄이 호명된다. 그 이름 중에서 고인이 된 '윤중호' 시인은 그에게 각별하다.

독하게 울지 않던 어깨에 수없이 기댔다
헤어지기 위해 모인 이 자리
네가 없는 술과 노래 우리끼리 감당하라는구나
너는 구천에서 걀걀걀 술타령으로 비 뿌리고
나머지 지렁이끼리 가늘게 젖어있겠구나
-<구천에서 내리는 비> 부분

 강병철은 생활인으로도 부지런하며 문학인으로도 억척스럽다. 그는 이미 여덟 권의 창작집을 생산했다. 시집 ‘유년일기(1995)’ ‘하이에나는 썩은 고기를 찾는다(2001)’와 소설집 ‘비늘눈(1995)’ ‘엄마의 장롱(2002)’ ‘닭니(2003)’ ‘꽃 피는 부지깽이(2007)’ 그리고 산문집 ‘선생님 울지 마세요(2006)’ ‘쓰뭉 선생의 좌충우돌기(2008)’가 그것이다. 전교조 교사이기도 한 그의 바쁜 행보를 감안한다면 다산의 작가임에 분명하다. 지금도 그는 시간이 있으면, 아니 시간을 아껴 남으면 주저없이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멘다. 부랴부랴 대학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지긋지긋한 형광불빛으로 안착해야 안심하는 강박증 사내'(「시인 김백겸」)다. 책상 위에 풀어 놓은 가방엔 노트북컴퓨터와 손때 묻은 원고뭉치가 들었을 것이다. 나이 어린 학생들 틈에 껴 그는 부단히 책을 읽고 산문과 시를 쓴다. 그러다 이따금 도서관을 빠져 나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담배연기를 뿜는다.

가물게 오래 크려는 사내
신새벽 대학도서관 모퉁이에서 바위가 되려 한다
-<지천명의 책 보기> 부분

 '보양식처럼 아득아득 활자 씹는다 절대로 밀릴 수 없다'(「지천명의 책 보기」)는 언명은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어떠한지 깨닫게 한다. 스타급 명망가가 된 후배 문인들의 대열에서 지천명의 그는 굴하지 않고 '가물게 오래 크려'한다. '스크럼으로 버티던 다른 이빨들 도미노로 무너지면서/ 한 사내의 혈기에 작별을 고'(잘 가라 내 이빨)하며 한스러워하기도 하고 장년의 평교사로서 '쪼그려 뛰기'(평교사, 장년의 봄)하면서 봄을 맞는 그지만 그의 펜촉에는 날로 양질의 근육이 붙는 중이다. 그리곤 문학판 후배들 사이에서 묵묵히 특유의 뻣뻣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는 그다. 대전충남작가회의 수문장처럼.

'당숙네 변소에서'라는 시를 썼다 엉덩이 깐 채
땀방울이 튀김닭 신문지로 국솥처럼 쏟아지는데
웅크린 채 글을 썼다 시인이 될 것이다
-<똥 누며 시를 쓰던> 부분

 문청 시절,「당숙네 변소에서」라는 제목으로 똥 누면서 시를 쓰던 아련한 추억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문학에 대한 열정을 현재화시키고 상징화시키려는 노력이다. 행간을 읽으면 진땀이 흐른다. '시인이 될 것이다'라고 '튀김닭 신문지'에 활자가 또렷이 맺히는 듯하다. 그가 '나이를 먹을수록 싸움을 잘 하는 세상은 없는가'(「새벽 설거지」)라고 묻는 것은 자신만의 길을 열고자 자신에게 투사하는 호소로 읽힌다. 자신을 샌드백 삼아 지속적으로 좌우훅과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방식이랄까. 잽처럼.

섣달그믐, 부지런하다 아직도 밥고리 놓치지 않고
한 해를 버텼구나 기지개 펴며
다시 의자를 당긴다 글이 곧 일용할 양식이므로
멈출 수 없다
-<겨울 밤 , 명화극장이 끝나면> 부분

 '글이 곧 일용할 양식이므로' 생활과 문학 사이엔 간극이 없다. 밥이 글이 되고 글이 밥이 된다. 그에게 생활과 문학은 이처럼 서로를 긴장시키며 강화시키는 구체적 실체로써 기능한다. 관념이 아닌 현실로써. 그래서 생활과 문학은 비로소 적극적인 일체의 징후를 드러낸다.

면허증 핸드폰 화투패 당구큣대 쌍둥 자르고 글과 술로 돌진하며, 행복해요
쓸쓸해요 간살떠는데 느닷없이 심장을 쑤시는 그 단어 '하염없이'.
아, 관념과 구체성이 순간적으로 일치하는 서늘함.
-<그 '하염없음'에 대하여> 부분

 그 서늘한 징후를 스스로 알아챘는지 그는 '눈발들 작업실로 쏟아지는 꿈에 젖는 것이다' (그 '하염없음'에 대하여). 하염없이. 무슨 술(術)처럼. 전언에 의하면 추모시와 축시, 그리고 행사시를 포함해서 기념시만 무려 60 편 이상 써서 그 모음만으로도 시집 한 권 분량이 된다고 한다. 시인이라면 불편하게 여기는 기념시류(類)를 사양하지 않고 끈질기게 일삼아 써 왔다는 얘기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이 지점에서 얼큰한 밤의 그 첫인상이 다시금 살아남을 느낀다. 꼭 큰일을 저지를 것 같던 사내, 강병철이 새로운 의미로 온전히 되살아난다. 똥을 누며 시를 쓴 이후 '이십오 년 솔직히 나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똥 누며 시를 쓰던)는 장담이 허세로 읽히지 않는다. 그가 닫힌 세계에서의 싸움이 아닌 열린 세계로의 한 판 진검승부를 원하고 있음이 시편 곳곳에서 감지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싸움을 잘 하는 세상은 없는가'하고 자신에게 호소함은, 아울러 그가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자신과의 강직하고 담백한 싸움이자 자신이 관계하는 세계와의 열린 싸움이다. 졸렬함이 횡행하는 싸움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초월한 최선의 싸움이다. 이 싸움을 그가 삶의 건강성과 긍정성으로 끌어올리고 고수하는 한 그는 끝내 문학(생활)에 지치지 않을 것이다. 술심인 듯 질긴 샅바를 놓지 않으리라. '가물게 오래 크며' 싸움은 지속되리라. 천명(天命)처럼 ‘하염없이’.

 글을 마치려니 주어진 시간의 긴박함이 못내 아쉽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순수한 감정선을 잘 그려낸 시의 일부를 전문처럼 소개하면서 게임소리 가득하고 담배연기 자욱한 PC방에서  조악한 글을 맺을까 한다. 아직 세상에 시가 있어 고맙다.

어미도 차갑게 밀어내는 바람에
혼자서 이 풍진 세상 감당해야 했다
잠깐이면 된다, 참아야 한다 부엉이 소리
문고리 젖혀진다 후엉후엉
솟구친 초승달 개구리처럼 폴짝폴짝대는데
살려주세요, 그 말이 튀어나오지 않아 오래도록
다행이었다 사금파리 조각 '툭' 튕겼을 뿐이다
이상하다 댓잎 바람 받으며 갸우뚱한다
아프지 않았어 증말이야
-<이빨뽑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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