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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에 나타난 7가지 복

작성자복의근원정태경|작성시간10.06.29|조회수3,528 목록 댓글 0

5. 요한계시록에 약속된 7가지 복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7가지 축복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한결 같이 영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비록 불가시적일지라도 실제적이며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인해 본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잠시 소유했다가 사라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의 내용들이 아닙니다. 현세지향적인 요소들과 관련된 복은 실제로 참 된 의미의 복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현재의 삶을 부요하고 윤택하게 해 주며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할지라도 한시적인 것으로 인해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락 밥에 물마시고 팔  베개를 베고 잠을 청할지라도 참 된 행복과 즐거움이 거기에 있다’는 풍유가락이나, 비록 ‘초가삼간이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임금의 궁궐보다 더 부요하다’는 노랫말은 애써 자신의 빈곤한 처지를 합리화시키려는 작위적인 처사가 아닙니다. 부유한 가운데서도 다툼과 불화가 있을 수 있고, 가난한 중에도 웃음과 즐거움과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세적인 축복의 요소들은 그 자체로 복의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마 16:26). 온 천하가 목숨보다 중요할 수 없기에 매사에 목숨의 보존이 우선돼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이는 신앙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아 위선과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비유적인 말씀입니다(마 16:1-3). 본문에서 ‘온 천하’란 인간이 지상의 전 생애를 통해 추구하는 온갖 복과 필요의 총화일 수 있습니다. 설령 온 천하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막강한 권세를 업고 권좌에 올랐을지라도 정작 죽음이 찾아오면 그 모든 영광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부귀영화의 삶은 일장춘몽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복중의 복이요 복의 본질이란 다름 아닌 목숨의 영원한 보장,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영생의 삶의 보장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요 5:24, 시 133:3). 이처럼 ‘온 천하’는 목숨을 위해 존재하는 방편일 뿐, 목숨이 온 천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으로 수단과 방편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현세적 축복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영속적입니다. 성도는 현재는 보이지 않으나 믿음으로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고후 4:18). 더구나 세상에 속한 것은 본질상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요 사단에 속한 것으로 성경은 선언합니다(요일 2:15-17).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된 복을 소유해 누린다는 것은 복의 본질인 생명의 문제를 보장받음으로 죄와 죽음과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해방돼 천상적인 구원의 기쁨을 여기서부터 앞서 만끽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제시하고 있는 7가지 복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첫째,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둘째,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셋째,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6:15). 넷째,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19:9). 다섯째,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20:6). 여섯째,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22:7). 일곱째,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22:14).

  ① 첫 번째 복은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천명합니다(계 1:3). 본문에서 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이 복이 되는 이유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집행될 최후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돼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관점은 행함의 구원을 지지하는 발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선(先) 구원의 은혜를 입었기에, 후(後) 순종하는 삶을 통한 종말론적인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관점입니다(약 2:22, 요 5:28-29).

  나아가 이런 종말론적 구원의 날이 ‘반드시 그리고 속히 될 일’이기 때문에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속히’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 빨리라는 의미라기보다 앞의 ‘반드시’라는 부사적 용어와 더불어 ‘될 일’에 대한 성취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용법입니다. 우리는 계시록에 예언된 말씀들이 ‘반드시 그리고 속히 될 일’들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으로 성취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는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구약에 배경을 두었던 각종 예언과 약속과 모형적 계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역을 통해 철저하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무엇보다 본질상 구속사의 발원(發源)이랄 수 있는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공생애 사역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재림을 통해 남은 구속사의 경륜이 완벽하게 성취될 것에 대한 보증으로 기능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일련의 보증적 사건들이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인 표현들을 통해 계시록 안에 수록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아무런 노력과 수고와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으로 말미암는 전인적이고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제아무리 복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무관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림의 떡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런 사실들을 철저하게 주지해서 본 계시록의 말씀들을 집중해 읽고 듣고 지켜 행함으로 약속의 복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본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때가 가깝다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과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이 동시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반드시 성취될 것에 대한 확증의 표현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작정의 시간을 좇아 세상 역사 속에서 당신의 뜻을 틀림없이 성취시키십니다. 성경의 과거 역사가 이를 확고하게 증명해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 침묵합니다. 다만 다양한 징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으로 인한 초림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종말론적 성취를 향해 진행되고 있음을 성경은 명백히 시사합니다(마 12:28, 눅 17:20-21). 이런 관점에서 초림은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입니다(히 1:2, 약 5:3, 딤후 3:1-5, 4:1-4, 고전 10:11, 마 24-25장). 말하자면 오늘의 교회시대는 언제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된 상태의 시대임을 시사합니다. 돌발적으로 오실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마 24:36-44). 성도들이 늘 말씀 안에 깨어서 기도하며 근신하는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연유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재림이 갖는 특징은 영광과 위엄으로 가득 찬 왕적인 재림입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표현 속에 이런 사실이 내포돼 있습니다. 이는 단 7:13 말씀의 채용입니다. 다니엘은 그의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나라를 인수받아 존귀와 영광을 받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서 인자의 재림과 관련해 나타나는 구름은 다름 아닌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세를 포괄적으로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어린양이 ‘유다지파의 사자’의 신분으로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창 49:9, 계 5:5). 구약의 성전계시와 관련해 성막과 성전을 덮었던 구름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으로 설명되곤 했습니다(출 40:34-35, 왕상 8:11).

  이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은 인격적인 재림입니다. 이를 가견(可見, visible))적인 재림 또는 육체적인 재림이라고도 부릅니다(마 24:30, 행 1:11, 살후 1:10). 각인의 눈이 그의 오심을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요한은 재림의 모습을 기술합니다(계 1;7).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공개적으로 오심을 뜻합니다. 초림 때에는 은밀한 중에 비공식적으로 소수의 무리들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재림 시는 다릅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새롭게 갱신된 새 창조(계 21:1)의 질서 속에서 만국의 만백성이 그의 오심을 동시적으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구속사의 종말론적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완성을 통한 교회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불신자들에게는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집행하시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 5:27-29입니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계 20: 11-15에서는 최후의 심판 광경을 좀 더 근접해서 설명해 줍니다. 악인의 결국은 불못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의인 곧 성도들은 구원의 실질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계 21-22장에서 새 예루살렘의 상징과 환상을 통해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천상적 축복을 향유하는 내용을 다양한 묵시적인 표현을 통해 기술하고 있음이 이런 사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 해 줍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창 1-2장의 에덴의 종말론적 회복(계 22:1-5) 및 성전계시의 완성(계 21:3, 22절)과 맥을 같이 합니다. 성도의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가 이런 종말론적 보장에 근거해 절실히 요구됩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 22:7)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종말론적 축복의 수여가 적극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계 21:5-7).

  ② 두 번째 복은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계 14:13)는 선언입니다.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필연적입니다(히 9:27). 그러나 주님 안에서의 죽음과 주님 밖의 죽음은 하늘과 땅만큼의 극단적인 차별을 가져옵니다. 전자는 영생이요 후자는 영벌에 처해진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마 25:46). 기독교 신앙의 역설이 이에 있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본질상 구원의 완성에 참여하는 것이며, 영생과 부활의 생명을 실질로 소유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부활을 실질로 경험하는 절호의 기회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영생과 부활의 생명에 연합되는 관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 모든 영적 상급과 복을 이미 소유한 자들입니다. 사망을 향해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담대히 외칠 수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 안에서 사망의 쏘는 것, 곧 죄와 율법이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5:55-58). 성도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와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및 충만의 역사하심이 이 모든 육신의 연약함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본문은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을 설명하면서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이라고 기술합니다. 여기서 쉰다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슨 수고를 마치고 안식을 취한다는 것일까요. 계 14:4에서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수를144,000명이란 상징적인 숫자로 표기합니다. 이들의 이마에는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임을 시사합니다. 4절에는 이들의 차별화된 삶의 태도를 설명하면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들이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구속받은 처음 익은 열매들이며, 동시에 그 입에 거짓말과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 이들의 수고란 것이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롬 12:2), 말씀에 순종하며 적극 진리를 좇는 삶(요삼 4절), 사단의 미혹과 핍박에 대처해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인내로 참고 견디는 삶을 일관되게 추구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모든 핍박과 고난과 미혹에도 굴하지 않고 온갖 손해와 희생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시종 진리 안에서 복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자들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의 죽음은 이런 모든 종류의 지상의 수고와 희생과 애통과 아픔 및 눈물을 일순간에 끝내게 합니다(계 21:4). 죽음으로 처음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상대적으로 주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통해 주시는 천상의 기쁨과 위로와 평강과 영생의 안식이 복과 상급으로 보장됩니다. 딤후 4:7-8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주 안에서 성도의 죽음이 참 된 복이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③ 세 번째 복은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계 16:15). 본문의 말씀은 12절에서 여섯째 천사가 유브라데 강에 대접을 쏟음으로 시작되는 소위 아마겟돈 전쟁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아마겟돈의 보다 정확한 히브리어 음역을 번역하면 ‘므깃도 산’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므깃도(아마겟돈)는 종종 격렬했던 전쟁터로 이용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격전지의 대명사로 불리곤 했습니다(왕하 9:27, 23:29=대하 35:22). 그러나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쏟음으로 발생하게 되는 본 아마겟돈 전쟁사건은 환상인 사실로 인해 그 안에 담긴 영적진리를 발견해야지 문자적인 전쟁기사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묵시(黙示)를 현실(reality)로 오해할 때 저자의 본의는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마겟돈 전쟁환상 사건에 담긴 영적 본의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거짓 선지자들의 사술(邪術)과 교훈을 경계하고 미혹당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계 16:13을 보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새끼 양으로 위장한 거짓선지자(땅에서 올라온 짐승, 13:11)의 입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를 총체적으로 귀신의 영이라고 규명합니다. 귀신의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는 표현은 귀신의 영의 실체가 사단적인 ‘말’ 곧 거짓교훈과 깊이 관련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듯이 사단의 세력도 거짓 진리로 미혹함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에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의 어용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거짓 예언케 해 줍니다(왕상 22:19-23).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믿고 승리감에 도취돼 출전한 아합은 도리어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거짓 영의 미혹을 받은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종말에는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과 기사를 통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 24:24). 사도 바울역시 악한 자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것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영의 역사를 허락하셔서 진리에 대한 반응 여부를 확인함으로 스스로 멸망과 심판을 받게 하십니다(살후 2:9-12, 롬 1:28-32).

  이상의 사실로 인해 아마겟돈 전쟁환상은 사단의 세력을 반영하고 있는 귀신의 영이 악의 삼두체제로부터 비롯된 거짓 가르침으로 만국을 미혹해서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대규모적인 공세를 취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묵시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습니다(계 11:9, 20:3하). 왜냐하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나타나셔서 악의 세력을 진멸하시기 때문입니다(계 16:15상, 17-19, 19:11, 20:7-10).

  이런 사실에 근거해 성경에서 아마겟돈 전쟁이라 함은 악의 세력이 큰 권세와 능력으로 대적해 올지라도 하나님의 더 크신 능력과 권세로 마침내 패배시키시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신다는 영적 진리를 교훈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역사상 가장 큰 아마겟돈 전쟁은 갈보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이미 성취된 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승리는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속에 예언된 뱀의 후손(사단)의 머리가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치명상을 당해 본질상 패배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는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사단을 패배시킨 사건(계 5:5)으로서 구속사의 남은 과정 속에서 일어나게 될 제반 마귀의 세력들과의 영적 전투를 승리로 장식할 것에 대한 대전제와 보증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눅 11:21-22)고 하신 말씀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은 이미 갈보리에서 발발(勃發)했고, 이제도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장차 종말론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어떤 성격을 띤 아마겟돈 전쟁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 안에서 최후의 승리가 이미 보장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1-37). 이 넉넉한 이김은 오직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상 여섯 번째 대접재앙과 관련된 아마겟돈 전쟁의 위기 속에서 본문의 세 번째 복이 성도들에게 삽입구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본문은 마 24:42-44과도 병행을 이룹니다. 따라서 ‘깨어서, 옷을 벌거벗지 말고, 부끄러움을 보이지 말라’는 것은 이처럼 종말의 시대에, 마귀의 궤계에 직면한 현 위기의 상황을 직시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음으로 사단의 유혹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가운데 끝까지 충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권면의 말씀인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 안에서 교회의 승리 또한 철저하게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④ 네 번째 복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의 복”(계 19:9)에 관한 약속입니다. 본문에서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란 어린양의 신부를 가리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공동체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엡 5:31-32, 계 21:9). 그렇다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이 왜 복이 되는 것일까요. 본 혼인잔치 기사는 계 17-18장에 걸쳐 기술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의 멸망이라는 상징적 환상사건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본문에서 어린양과 성도들과의 혼인잔치 환상은 사단의 총체적인 세력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의 멸망에 바로 뒤이어 기술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어린양과 신부된 교회와의 혼인잔치 비유는 사단의 세력이 총체적으로 패배한 사실에 근거해 하늘의 진정한 평안과 안식이 도래했으며, 이로 인해 언약의 핵심사상인 임마누엘의 최종완성, 곧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치와 연합의 사건이 마침내 실현되었음을 선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계 21:3, 22절). 결과적으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등장하는 승리하는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전 구속사의 경륜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된 주인공 신부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21:2, 9-10절). 하나님은 이들의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며, 죄로 비롯된 사망과 애통과 아픔과 각종 질고는 사라질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만물을 새롭게 하심으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21:4-5). 혼인잔치 비유 속에 담긴 영적 본의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한편 혼인잔치에로의 초대가 끝난 직후 본문기사는 백마 탄 자의 출현과 사단의 세력들과의 전투장면을 재차 기술합니다(19:11-21). 이는 17-18장에서 소개된 사단세력의 총체적인 멸망기사를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구체화시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로 보건대 어린양의 혼인잔치 사건도 본질상 이중 구조적으로 구성돼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이중성을 띠고서 말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갈보리 구속사역의 성취의 결과로 이 땅 위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돼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시사합니다(고전 3:16, 고전 12:13, 엡 5:30-32). 그러므로 지상에 교회의 출현은 그 자체로 이미 주님과의 혼인잔치가 영적인 관점에서 현재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의미합니다(눅 6:5, 마 12:6-8). 그러나 아직 최종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에 근거한 미래적인 성취의 시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까지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사단의 잔존세력들과의 적대적인 투쟁의 관계가 불가피합니다. 계 19장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뒤이어 성도들이 백마 탄자와 한 편을 이루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들과의 전투에 임하는 장면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미래의 혼인잔치 또한 안전하게 보장돼 있습니다(롬 8:37-39).  
              
  이러므로 어린양과의 혼인잔치는 신부된 교회공동체에게 복중의 복이요 상급 중의 상급으로 기능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의 성격을 띠고 고난 중에도 기뻐하고 환란과 핍박 중에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감사할 수 있음은 종말론적 혼인잔치가 오늘도 여전히 교회 앞에 큰 확신과 소망과 바람으로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⑤ 다섯 번째 복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보장된 복입니다(계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펴봅니다. 20:4에서 이들의 정체를 밝혀줍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로 구속함을 받고 하늘의 보좌에 앉힌바 돼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을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행사하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이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목 베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영혼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로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한 자들로 하늘 보좌에 앉힌바 된 자들입니다. 본질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입니다. 곧 교회공동체를 총체적으로 대변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들은 하늘에 거하는 자들로 제한됩니다. 이들이 살아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고 설명합니다. 불신자들은 이 무리들로부터 제외됩니다. 한편 본문은 계 5:9하-10의 말씀과 병행을 이룹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소유된 백성으로 거듭나 인침을 받은 순간부터 이미 땅에서 왕 노릇하는 자들로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계 5:9하-10, 벧전 2:9). 그런 의미에서 땅의 교회는 동시에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계시록의 관점입니다. 따라서 계 20: 4, 6절에서 왕과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은 예수님의 초림사역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계 1:6, 4:4, 5:10에 나타난 교회의 왕 노릇과 20: 4,6절의 왕 노릇은 사실상 동일한 상태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이 왕 노릇하는 천년의 기간은 사단이 결박당해 무저갱에 갇혀있는 기간과 동일한 기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전 기간 말입니다. 이런 관점은 본문 속에 언급된 천년기간의 성격이 삽입구식으로 처리되어 문자적 천년이 아닌 상징적 표현임이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다시 말해 계 20:1-3에 언급된 용의 무저갱 감금시점부터 7-10절까지의 잠시 놓임과 이내 불못에 던져지는 기간까지의 전 기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관점 말입니다. 동시에 이 기간은 표현은 다르지만 교회가 광야에서 양육과 보호를 받는 한 때, 두 때, 반 때(12:14) 및 1 260일(12:6), 두 짐승에 의해 교회가 핍박당하는 42달(13:5)과 삼일 반(11:10-11)의 표현과도 본질상 동일한 기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기간을 내용의 성격의 따라 달리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살아있는 땅의 성도들(계 5:9하-10, 엡 2:1, 4-6절)과 죽어서 이미 하늘 보좌에 앉힌바 된 자들 공히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관점은 본문의 천년기간이 문자적 천년이 아닌 상징적 표현임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계 20:1-3에 언급된 용의 무저갱 감금시점부터 7-10절까지의 잠시 놓임과 이내 불못에 던져지는 기간까지의 전 기간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의 실질은 무엇일까요. 계 20:6 본문에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이들은 둘째 사망과 무관합니다. 계 20:14에 의하면 불못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모든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심판을 받아 들어갈 형벌의 장소, 곧 지옥의 다른 용어입니다(마 25:31-33). 성경은 이 불못에 들어갈 자들을 사단과 두 짐승과 그의 졸개들 및 불신자들로 제한시켜 기술합니다(계 20:10, 20:20, 20:15, 마 25:41). 무저갱은 사단이 한시적으로 거처하는 형벌의 장소로서 감옥의 성격을 띠지만(계 20:1-3) 불못은 영벌의 장소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있는 하늘과 땅의 성도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자들로 심판에서 제외됩니다(요 5:24, 계 20:15).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영벌로부터 영생에로 옮겨진 사실이야말로 복 중의 복이요 상급 중의 상급이 아니겠는지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온 인류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날에 비로소 구원의 진가와 능력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합니다. 제사장은 구약의 배경 속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중보하는 자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의 신분으로 존재했습니다. 동일한 원리 속에서 신약의 성도들은 복음을 방편삼아 하나님의 택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중보적 사명을 감당하는 제사장의 신분으로 존재합니다. 성도의 복음증거가 단순히 책임과 의무의 범주를 넘어 영적 본성의 발로로 기능해야 함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이유로 복음증거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당위입니다. 셋째로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합니다. 성도의 왕 노릇은 제사장 직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자들로 예수님의 삼직(왕/제사장/선지자)수행과 불가피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임의 내용상 제사장의 직분이 상대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라면 왕적 직분은 세상과 보다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성격은 말씀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신분과 자격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요 16:33, 벧전 2:9).

  ⑥ 여섯 번째 복은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입니다(계 22:7). 여섯 번째의 복은 본질상 첫 번째 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표현에 있어서 여섯 번째 복에서는 첫 번째 약속한 복의 내용 중 ‘읽는 자와 듣는 자들’이란 용어가 생략되었을 뿐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계시록의 내용을 처음 회람용의 편지형식으로 받아 읽을 때는, 읽고 듣고 지키는 순서를 좇아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초림과 재림사이에 나타날 종말의 계시의 전모가 밝혀진 후인 계 22:7의 시점에서는, 읽고 듣는 것에 비해 지켜 행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따라서 사도요한은 1장에서 22장까지의 내용을 통해 초림과 재림 사이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 될 것인지를 소상하게 밝힌 후, 새롭게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심정으로 동일한 복의 내용을 ‘행함’에 무게를 실어서 재차 강조한 셈입니다. 당시 다양한 신앙적 위험과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던 일곱 교회들은 계시록을 회람하면서 자신들을 냉철하게 성찰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더욱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의 정절과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자 굳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결심과 각오는 복으로 약속된 보상을 받기에 필요충분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교회 성도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니 더욱 절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구원의 완성입니다(히 11:6). 그것은 사실상 계시록에서 약속하고 있는 일체의 복의 본질이며 실체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만큼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습니다(롬 13:11).  
  
  ⑦ 마지막 일곱 째 복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복입니다(계 22:14). 이들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동일한 상태를 다른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곧 영생을 얻게 될 것이며 하늘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특권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일까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들입니다(계 7:14).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입니다. 계시록에서 이들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두루마기) 옷을 입은 자들로 종종 묘사하는 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향유하는 자들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본문(계 22:14)에서 두루마기는 흰 옷(7:9, 13절)과 깨끗한 세마포(19:8, 14절) 등의 용어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러면 ‘두루마기를 빤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도의 옳은 행실을 가리킵니다(19: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온갖 박해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키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전심으로 좇았던 충성된 삶의 내용을 총칭합니다(계 14:4, 요 5:28-29, 13:10상). 무익한 종의 심정을 시종일관 견지하면서 말입니다(눅 17:17).
    
  이상 요한계시록에서 약속한 일곱 가지 영적 복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각각의 복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표현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본질상 구원, 영생,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기업에 참여, 왕적 통치에 동참, 심판에서 제외 등 천상적 삶의 상태와 깊이 연관돼 있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그러나 이상의 복의 내용들은 단지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새로운 창조질서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복으로만 한정돼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의 경우, 비록 온전치는 않을지라도 본질상 이미 도래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 속에서 위에서 언급한 복들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상).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교회는 이미 천상의 복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에 보다 완성된 복의 실질을 보장받은 자들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계시록이 약속하고 있는 복의 전모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전(全) 성경 계시사 속에서 진행되어져 나온 언약적 구속사의 진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점으로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구약에 소개된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 용법들을 채용하면서 기술합니다. 특별히 사도요한이 구약의 다양한 묵시적 내용들을 상당부분 인용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승리로 말미암는 교회공동체의 최후의 승리와 완성을 역사적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복의 연장선상에서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요한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 포로기 전후 선지자들에 의해 사용된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 기법을 그대로 반영시키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름 아닌 새 예루살렘 상징을 통해 묘사되고 있는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완성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교회의 출현은 미래지향적인 교회승리의 확실한 보증이며 전제로 기능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전 내용을 통해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어린양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흰 옷 입은 허다한 무리들이 천상환상의 도처에서 언급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계시록의 핵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에 성도들의 시선을 집중시킴으로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침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된다는 우주적 경륜의 완성에 모든 초점이 모아진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많은 하부 주제들은 모두 이 중심주제에 종속돼 있을 뿐입니다. 이 ‘크신 일’(행 2:11)을 이루신 ‘하나님의 열심’(사 9:7)을 찬양하며 경배 드립니다.

  빌 1:6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롬 11:36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8:18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33-34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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