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윤여선의토요단상

토요단상(土曜斷想) (2026.06.13.) {제 240회} _윤여선

작성자이영훈|작성시간26.06.13|조회수44 목록 댓글 0

토요단상(土曜斷想) (2026.06.13.) {제 240회}_윤여선

며칠 전, 지하방의 서고를 정리하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책장 아래 서랍 속에 보관돼 있던 사진들이지요. 성지순례와 관광 중에는 물론 외국에서 교육받으며 찍었던 사진들까지, 그 시절에는 무척 소중하게 여겼던 순간들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그대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현상소에서 찾아오던 날에는 곧 앨범에 정리해 보기 좋게 보관해 두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늘 그 순간뿐이었던 듯합니다. 바쁜 일상에 쫓기며 살다 보니 어느새 그 존재조차 잊어버렸고, 결국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사진들은 서랍의 어둠속에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진의 양이 워낙 많다보니 당장 모두 꺼내어 볼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차근차근 정리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만, 그 계획이 과연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예전에는 사진 한 장 찍는 일도 큰 행사와 같았습니다. 머리를 단정히 빗고,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는 등 몸차림 하나 하나에 정성을 들였습니다. 사진을 찍은 뒤에는 현상되어 나오기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했지요. 그 기다림 속에는 누구에게도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설렘과 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진 한 장 한 장이 더욱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휴대전화 셀카만으로도 수많은 사진을 손쉽게 찍을 수 있고, 찍는 즉시 화면으로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 나왔다 싶으면 곧바로 다시 찍을 수 있으니, 예전처럼 사진을 기다리던 설렘이나 기대감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요즘 사람들은 예전처럼 사진을 오래 간직하거나 애지중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진이 귀했던 시절에는 한 장마다 삶의 무게와 정성이 담겨 있었지만,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날에는 오히려 기억마저 가벼워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진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몇 장의 빛바랜 추억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어린 시절, 고향집 뜨락에 걸터 앉아 카메라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찍혔던 사진 한 장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었던 고모부가 찍어 주셨던 사진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에 전형적인 시골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사진은 유년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어느 때인가 결국 모르는 사이에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의 사진은 어머니와 큰고모님, 작은어머니 세 분이 대전 보문산 유원지 회전목마장 옆에서 찍으셨던 사진입니다. 사랑했던 분들이었지만, 세 분 모두 아픈 사연을 안고 계셨기 때문에 나란히 서서 찍으신 그 사진을 들여다볼 때마다 왠지 모를 애잔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 사진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시고, 작은어머니께서 갖고 계시던 원본을 주셨는데, 그 사진마저 어느 사이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분실을 대비해 복사해 두었던 프린트분 한 장만 남아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오면서 쌓아 온 기억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억이 추억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잊히지 않고, 문득문득 찾아와 가슴 한켠을 따뜻하게 적셔 주는 기억들만이 비로소 추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지요.


오래된 사진은 그러한 추억의 문을 열어주는 작은 열쇠와도 같습니다. 사진 속에는 사람의 얼굴과 풍경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햇살과 바람, 웃음소리와 인간적인 체온,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도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사진 속 인물보다도 그 시절을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사진 속에 담겨있는 인물들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지나가 버린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사진은 종이 위에 남아 있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그 사진이 불러오는 세월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책장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사진들을 모두 꺼내어 정리하게 될 날이 언제가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사진 몇 장이 아니라, 그 사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지난날의 시간들일 것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그의《밝은 방》에 "사진은 언제나 '그것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고 썼습니다. 사진 속 인물은 지금 곁에 없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시진에 찍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의미입니다.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한때 분명히 함께했던 존재들이 사진 속에서만큼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기에, 그 사진들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진을 간직하는 것은 지나간 시간을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간이 우리가 지나온 삶 어느 지점엔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월은 흘러가도 시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추억 속에서 그 시간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여선(다니엘)/관세사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