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두손으로 부여안고 중앙대 석박사과정을 다녔어
사람들은 내가 박사까지 대학원을 다녔으니 돈이 많은 집안일 것이라 단언한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물론 전남편의 도움을 받은 적도 없다. 순순히 내 손으로 내가 번 돈으로 집안 살림은 물론이거니와 석박사과정의 천문학적 학비를 충당하였다. 물론 그때 아르바이트로는 제일 많이 준다는 학원에 전임강사로 일을 했다. 이른바 종로학원, 대성학원이었다.
그중 대성학원의 강사생활은 신적인 수준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신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해오라는 숙제를 안해와서 교무실로 오라하면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심지어 내가 무슨 유식한 말을 하는 줄 알고 말귀를 못알아 듣기까지 했다. 얼굴이 벌게져서 잘 해오겠다고 벌벌 떨면서 말이다. 종로학원에서도 그랬다. 판서를 하기만 하면 그것을 혹시 지울까봐 아이들이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불나게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배가 불러와서 그만두었다. 배부른 여자가 대학원이 있는 건물을 오르내리니 다들 쳐다 봤다. 선배와 후배들이 같이 수업을 듣다가 쉬는 시간에 다가와서 말했다. 아, 선배님, 후배님, 임신 9개월차에도 학교를 다닐 수가 있네요. 선생님 때문에 용기를 얻었어요. 헉! 그런데, 배가 남산이예요.
그랬다. 흑석동에서 대학원 건물은 제일 꼭대기에 있고. 그 건물에 남산을 부여안고 오르내렸다. 이걸 장인정신이라 해야하나, 아님 열혈학도라 해야하나, 아님 미친 열공정신이라 해야하나, 그때 남산은 너무나 무거웠다. 두손으로 받쳐야만 했다. 그 겨울의 끝자락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그렇게 첫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입덫도 심하고 우유도 파스퇴르로만 먹어대던-어느날 어떤 애가 계단에 배달된 우유를 훔쳐가서 난리가 나기도 하던...무엇보다 남현동의 길거리 쌀 떡뽂이만 먹으며 키운, 에효, 3.84kg이었다. 내 몸이 안 무너진 게 신통할 지경이었다.
삼성병원 의사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어머니, 노산이신데 수술도 안하고 자연분만하시겠다고요? ... 그래요. 해보죠. 아이가 거꾸로 있으니 바로 서는 운동을 날마다 하시구요, 다음주에 아이가 제대로 돌아와 있지 않으면 수술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24시간 진통 끝에 태어난 새카만 아이, 태어나자마자 아이는 작고 못생겼고 큰 소리로 울어댔다.
아니, 어머니, 그 나이에 3.84kg을... 장하십니다! 의사는 박수를 쳤다. 그녀는 내 얼굴을 여러번 바라보면서 자랑스러워했다. 이후에도 내 병실에 자주 드나들면서 나를 챙겨주었다.
요즘에도 나는 남산을 들고 다닌다. 이러저러한 일로 보따리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 여성시 해석>이라는 대작을 쓰고 있으니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한국도자재단 도자만권당 도서관은 프린터가 없어 아예 프린터를 하나 갖다 놓았다. 바로 바로 출력하여 확인할 수 있기 위함이고, 자료의 정확성을 위해 프린트한 것으로 확인하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 언제 남산을 들고 다니면서 힘겨워할지 모르지만 남산을 들고 다니는 일은 무거워도 보람있는 일이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왜 이리 일을 잘 하시는 거예욤? 요즘엔 이런 말을 들으면서 또 짐짝을 남산만큼 들고 다닌다..에효 사실 내가 행정력이 좀 있고 문서를 잘 다루다 보니 일이 나를 쫓아다닌다...아니 내가 일을 쫓아 다니는지, 나비가 꿈인지, 꿈에 나비가 나인지...
김신영 시인, 평론가
중앙대 문학박사, 대학강사 역임, 《동서문학》 ’94 등단,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문학과지성사, ‘96) 외 저서 다수, 세계 유수 앤솔로지 “봄에게 미안하다” 수록, 현,중앙대문인회 편집주간, 경기문화재단・한국연구재단 수혜 작가, 심산재단 시문학상 등 수상, 중소출판사 도약부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