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
송보영
너에게 간다
심장 네근을 나눠들고
헛부런 소리 다 집어치고
좋다고 말하려 간다
너처럼 눈도 귀도 멀어
내숭떠는 답답이여
네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좋다고 말하려 간다
산등성이에 생강꽃 피었다고
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네 두팔을 꼭 붙들고
네가 좋다고 말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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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극이 무뎌지고 싶어 -
송보영
네모 세모 갈아
동글동글 유선형 만든다
칼 무뎌지고
끌 닳아지니
그제서야 끌림이 줄어들고
미간에 널 가두고
발 뒤꿈치 들고 달리기만 몇 해
빛 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먼 어제를 기억한다
숨 멎을 것 같던 모서리진 앙칼.
목 조여오는 행복한 너의 자력.
너에게만 N극이고 싶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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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법상 부부”
수진은 타이레놀과 활명수를 완전히 끊었다. 끈질기게 괴롭히던 원인 모를 두통과 소화불량 증세가 사라졌다. 깊숙한 소파에 몸을 동글게 말아 집어넣고,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나른한 오후 햇살이 고흐의 그림처럼 실타래를 풀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라디오에서 곡명을 알 수 없는 클래식이 흘러나온다. 지금 수진은 온통 <미스터선샤인>의 ‘구동매’ 생각뿐이다.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고, 게다가 피 맛를 즐기는 못된 남자. 그러나 사랑을 절절히 아파하는 남자. 거의 한 달을 넷플릭스에 빠져 그동안 못 보던 드라마를 보았다. 여느 여자들처럼 울기도 하고 깔깔거리기도 하며 시간을 즐긴다. 연애 10년, 결혼 20년, 총 30년을 함께한 현우가 누군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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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극성을 부려, 한 상에서 네 명 이상 밥을 못 먹던 시절이었다.
부동산을 하는 영혜가 현우를 찾아간 것은, 오후 여섯 시가 지날 때였다.
막 테이블에 앉은 영혜는, 가슴골이 드러나는 파란색 상의와 수건으로 무릎을 덮어야만 할 듯한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손톱은 아무렇게나 빨갛게 칠해 싸구려 느낌이 났다. 네일아트를 제대로 받은 것이 아니라, 노점에서나 산 듯한 것을 대충 바르고, 입술도 진빨강으로 파란 셔츠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자기야” 영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현우를 불렀다.
“조심해. 사무실에서는 조심 해야지. 수진이라도 와 있으면 어쩌려구.” 현우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즐기듯 영혜를 나무랐다.
“피. 난 자기가 그러는 게 더 싫어”
뽀로퉁한 입술을 빼물고 영혜는 현우를 노려보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애써 태연한 척 안색을 바꾼 영혜는 급한 마음을 감추며, 현우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야. 푼돈으로 살 만한 땅이 하나 있는데 살래? 지금은 2차선 도로에 붙어있지만, 곧 4차선으로 바뀐다는 소문이 있어. 4차선으로 바뀌면 땅값이 배로 뛰는 건 알지? 나보다 선수니까. 1억 1천 달라고 하는데 1억이면 살 수 있을 거 같아. 대신 수수료는 많이 줘야 해. 내가 사려고 했는데, 올가을 큰딸 시집을 보내야 해서 돈이 없어. 솔직히 딴 사람에게 팔기는 아깝고.”
영혜는 오른쪽 눈을 껌뻑이며, 아주 아까운 것을 거저 주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틱장애를 가지고 있는 껌뻑임이 어떤 때는 모사꾼처럼 보였지만, 오늘은 정말 현우를 위해 그 땅을 사라고 권하는 윙크 같았다.
“자기야. 3년만 가지고 있으면 두 배는 받을 수 있을 거야. 내가 팔아 줄게. 만약 못 팔면 내가 도로 살게. 이자 쳐서 주면 되지?”
영혜는 큰소릴 땅땅 치며 계약을 부추겼다.
현우는 망설이다 영혜의 권유를 못 이기는 체하며 백 평 남짓한 땅을 샀다. 땅 모양은 형편없었다. 삼각형 한 꼭지가 여인의 눈썹처럼 길게 뻗었고, 큰 도로보다는 3m가량이나 낮아 실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현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계약서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4차선이 되면 보상받는다. 그때까지만 저축한 셈 치고. 그래 영혜도 수수료라도 벌고. 좋아 사자. 그때까지는 잊고 있어야겠다는 심사였다.
다음 날, 수진은 서재를 청소하던 중 조금 열린 서랍 사이로 삐죽이 보이는 서류봉투를 보았다. 겉면에 ‘금빛부동산’이라고 쓰여있다. ‘이게 뭐지?’ 수진은 서류를 서랍에 넣고 뒤돌아 나오다가 멈칫 천천히 서류를 보았다. 어이가 없다. 영혜가 중개한 땅을 현우가 산 것이다. 영혜는 수진과 동갑이다. 예전 수진의 컴퓨터학원에서 데스크 일을 보던 직원이었다, 어느 날 영혜는 갑자기 말도 없이 학원을 그만둬서 애를 먹었었다. 그 당시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영혜의 질투심과 현우의 바람기가 딱 맞아떨어진 사건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현우의 다짐을 받고 눈감아 준 바람사건. 현우가 퇴근하며 학원으로 픽업 올 때마다 이유 없이 퉁퉁거리는 영혜를 수진은 혼자 사는 영혜의 질투심이었으리라 이해하면서. 그런데 요즘 둘이 뭔가 느낌이 싸하다. 영혜가 사무실을 현우 회사 근처에 차린 것도 그렇고, 아무리 가까이 사무실이 있다지만 동갑이라 그러는지 어떨 땐 아주 친한 친구처럼 보일 때도 있다. 요즘 부쩍 영혜 사무실에 현우가 놀러 가는 것도 못마땅하다. 공교롭게도 요즘 부쩍 현우가 자기 멋대로 하는 일이 잦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서로 의논하기로 했었는데 현우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현재 가지고 있는 부동산이 죄다 자기 이름으로 되었는데도 한마디 상의 없이 이 조그만 땅마저 습관처럼 당연하다는 듯 서류에 김현우라는 계약자 이름을 썼다.
이번엔 좀 따져야겠다. 저녁에 퇴근한 현우에게 수진은 감정을 삭이고, 침착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땅을 또 산 거야? 땅 모양이 좀 이상하던데. 당신답지 않게 무슨 그런 땅을 샀어?”
“4차선으로 확장된다고 해서 보상이라도 받으려고 샀어.” 현우는 대답했다.
“뭐야. 뒷집이 우리 땅을 밟고 다니잖아?”
현우는 수진의 대꾸에 흠칫 놀라며 그런 것도 아느냐는 듯이 말했다. 현우가 생각할 때 수진은 부동산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늘 자기에게 복종만 하는 착한 여자라고 느꼈다. 요즘 들어 조금씩 참견도 하고 따지는 것을 단순히 갱년기 증세라고 생각했다.
“응, 옛날부터 이 길을 이용해서 뒷집 사람들이 다녀서 지금은 주인이라도 길을 막을 수는 없대.”
수진은 무심히 대꾸하는 현우를 쳐다보다가 이번엔 한 소리 해야겠다고 말을 꺼냈다.
“영혜가 사라고 한 거야? 땅을 사려면 나하고 상의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수진은 끝장을 보고 싶을 걸 억지로 참았다.
‘야. 너희들 요새 이상해. 왜 갑자기 핸드폰은 잠가 놓은 거야? 처음 약속하고 틀리잖아. 너희들 무슨 또?’
침묵은 흘렀고 둘은 서로 소슬하게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현우는 말을 흐리며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피곤하게 하지 마. 나 혼자 잘 살자고 샀어? 그렇게 사사건건 따질 거면······.”
수진은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따질 거면 헤어지자고?’ 그 말을 줄였을 것이다.
마음속에서 거세게 파도가 출렁인다.
‘우린 늘 이 모양이라니까. 망망대해를 혼자 떠돌고 있는 느낌이야. 항해를 더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닻을 내릴 때가 된 것 같다. 습관처럼 오가는 일상 대화 외엔 어떤 감정의 교류도 갖질 못할 바엔 그만해야 한다. 너무 변한 현우를 탓할 게 아니라, 무의식으로 눈길조차 한 번 주지 않는 이런 결혼을 계속 이어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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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이나 지났을까. 삼각형 땅이 싸움의 발단이 되었다. 그 땅을 밟고 다니던 뒷집아저씨로부터 현우에게 전화가 왔다.
“김현우 사장님. 뒷집입니다. 땅 문제로 전화드렸습니다.”
덧붙여 말하길, “사실 아내가 암 판정을 받아서, 급하게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젠 힘이 들어서 농사도 지을 수 없을 거 같아요. 듣자니 길도 넓혀진다고 하는데 기다릴 수가 없어요.”
평소에 왕래가 있던 사이도 아니었고 가끔 농사지으러 올 때 우리 부부와 만나면 음료수나 커피를 한 잔씩 함께한 것이 전부였는데. 이 또한 무슨 꿍꿍일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현우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뒤땅을 사야 하나 무시해야 하나. 그렇지만 땅값이 너무 비싸다.
오후에 영혜가 현우를 찾아왔다. 뒷집 땅 주인이 자기에게 그 땅을 팔아달라고 내놓았단다.
“자기야. 어때? 그 땅 잘 샀지? 이것도 사두면 큰돈 될 거야.”
부동산을 하는 영혜는 어깨를 흔들며 콧소리를 낸다.
‘수수료를 얼마나 받길래 저러는 건지 원.’
현우는 영혜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번 떠 보는 건지. 진짜 사길 바라는 건지.’
현우는 영혜에게 말했다.
“두 배나 주고 사라고?”
“에이, 솔직히 말하면, 처음 자기가 산 땅을 내가 못 산 게 한이라니까. 어차피 자기가 샀으니까, 뒤땅도 사서 정리하면 큰돈이 될 것 같은데.” 현우는 영혜가 꼬박꼬박 뒷말을 잘라먹는 것이 맹랑했지만 한편 귀엽다고 생각했다.
영혜가 눈을 껌뻑이며 입에 침을 튀기며 열을 올렸다.
“사장님이야 워낙 땅 보는 눈이 뛰어나시니까요.”
영혜는 현우를 추어올리며 비위를 맞춘다.
영혜가 간다고 일어서면서, 슬쩍 현우를 곁눈질했다.
“그 땅 소분 공장 하는 유 사장도 관심 있던데?”라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영혜가 돌아간 후 현우는 다짐했다.
‘부동산의 농간에 놀아나지 말아야지. 자기가 얼마나 이 일을 했다고 벌써 물이 들었어?’
영악해지는 영혜가 안쓰럽다. 현우는 쓰디쓴 원두커피를 물도 안 타고 마셨다. 인생의 맛이 이렇게 몇 가지의 복선을 깐 커피 맛이구나.
현우는 이건 수진과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번에 말 안 하고 땅 샀다고 궁시렁대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현우의 말을 들은 수진은 ‘아, 이건 사야 한다.’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아버지의 땅이 머릿속에 스쳤다.
‘관습법상 도로’ 이런 일이 내게 다시 일어나다니. 이번에는 절대로 오빠처럼 당하지 말아야지. 오빠 때문에 뼈아픈 공부를 했는데 또 당하면 바보지.
오빠는 아버지의 땅을 담보로 사업한답시고 몽땅 날려 집안을 풍비박산 냈던 사람이었다. 약 삼십 년 전쯤 아버지는 지금과 비슷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 뒤땅은 아버지의 땅을 밟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땅이었고, 뒷집의 꼬임에 결국 아버지 몰래 그 땅을 담보로 내주고 사업자금을 얻었다. 오빠가 어려운 것을 알고 일부러 접근했던 뒷집 영감 때문에 헐값에 날아간 아버지 땅. 결국 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셨고 집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수진은 그날로 가장이 되어 하던 공부마저 그만두어야 했다. 10년 이상을 가장 노릇을 하면서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나마 시청에서 컴퓨터 강의를 청년들에게 열어주어 무료로 공부했던 것이 학원까지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뒤땅은 약 만 평쯤 되는 큰 땅이지만 길이 없고 농사도 짓는 둥 마는 둥 하여 거의 버려진 것처럼 보였지만, 수진은 알 수 있었다. 마침 현우에게는 상속받은 땅이 길로 편입되어 보상받은 돈도 있었고, 그 정도면 뒤땅을 살 수 있다고 수진이는 계산했다.
“뒤땅을 사 놓는 것이 어때?” 수진은 넌지시 현우에게 말했다.
“땅도 볼 줄 모르면서. 쯧쯧쯧. 그 까짓 거를 왜 사? 그리고 그럴만한 돈이 어디 있어?”라며 혀를 끌끌 차며, 현우는 잘라 말했다.
수진은 자기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말은 안 들으려는 것인지. 언제부터 현우가 날 저렇게 대놓고 무시했었는지. 언제나 제멋대로 하는 현우를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 고집불통. 버러지. 바보. 말미잘. 별별 욕을 씹었다. 고집불통 현우와 사는 것이 식욕 없어도 밥을 억지로 우걱우걱 먹어야 하는 무의식적인 생의 연장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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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가 막 퇴근하려는데 바지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보니 철민이였다. 철민이는 고등학교 친구로서 군대에 가서 왼쪽 검지를 훈련 사고로 잃었고 현재는 시청에 장애인 특채로 근무 중이다. 어쩌면 철민이가 지금 만나자는 것도 이 땅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현우와 철민은 가까운 호프집에서 만났다. 오백 한 잔씩을 들이키고 다시 오백을 시켰다. 잔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우가 마른오징어 다리를 투박하게 뜯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러냐.”
철민의 시선이 맥주 거품을 따라 가라앉았다. 그는 거품이 완전히 꺼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현우야. 너 그 땅 나한테 팔지 않을래? 값은 잘 쳐줄게.”
“헉. 왜 그 땅을 사려고 하는데? 나는 땅 내놓은 적 없는데?” 현우가 반문했다.
철민이는 부동산에서 뒤 땅 매물을 보고, 땅을 검토하던 중 길이 없어 개발이 어려울 것을 알았다고 했다. 철민이 아버지가 버섯 농장을 크게 하시는데, 농장을 더 크게 확장하려고 땅을 사러 다닌다고 한다.
‘철민이같이 똑똑한 친구가, 뒤땅을 사려는 걸 보면 지금 뒷집의 땅값이 싼 게 맞는가? 그렇다면 수진이 말을 듣는 것이 맞지 싶다. 그렇지만 지금 이것을 사면 철민이가 사려고 하는 것을 내가 사는 꼴이니 친구 사이에 그건 안 되겠고…….’
‘에라 모르겠다. 수진이가 그 땅을 좋아해서 못 판다고 말해야지.’
“철민아. 미안해 이 땅은 팔 수 없어. 수진이가 여길 좋아하고 수진이가 하는 학원과 가까워 거길 산 거야. 조그만 집이나 한 채 지어주려고 해.”
거짓말을 하다 보니, 현우는 자기도 모르게 소설을 쓰고 있었다.
철민이는 ‘그렇구나’를 연발하며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만둔다. 시킨 마른안주는 다 먹고 나서도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오징어 대가리까지 으적으적 씹었다. 미적거리며 안 일어나는 철민을 겨우 배웅하고 현우는 헤어졌다.
수진은 더는 뒤땅에 대해 모르는 척하며 묻지 않았지만, 현우는 매일 퇴근하고 그곳에 가서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땅 판 대금과 대출을 합하면 충분히 살 수 있다. 게다가 몇 년 잘 굴리면 큰돈을 만질 수도 있을 듯하다. 현우는 온통 머리에 땅을 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동산 영혜는 싱글벙글하며, 현우를 찾아왔다.
“좋은 일 있어?”
현우의 물음에 영혜는
“그 땅 뒤에 있는 거. 그거 팔렸어.”
“누가 샀어? 좀 비싼 거 같았는데. 얼마?”
“음…. 자기 그 땅 뒤에서 소분 공장 하는 유 사장 알지? 유 사장이 샀어. 120만 원으로 최종 흥정해서 계약서를 썼어.”
“잘했네. 수수료 많이 받았겠어? 양 타?” 현우가 물었다.
양 타란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모두 수수료를 줬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낸 저녁나절은 영 편하지 않았다. 현우는 그 땅을 사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아까울까. 배가 아픈 것인지 머리가 아픈 것인지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집에 오자마자 현우는 욕실에 들어가 샤워했다. 붉으락푸르락하는 표정을 수진이에게는 들키지 않으려고, 평소보다 더 빡빡 씻었다. 수진이가 저녁 먹으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씻었을 것이다. 수건으로 대충 물을 닦고 나와 식탁에 앉았지만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왜? 어디 안 좋아?”
“응. 점심 먹은 것이, 체한 것 같아.”
현우는 수저를 놓고 수진에게 뒤땅이 팔렸다고 짧게 한마디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통장에서 100억쯤 빠져나간 허탈감. 영혜가 한 번 더 권했다면 샀을지도 모르는데, 훌떡 소분 공장에 판 배신감. 뒤 땅 주인이 한 번이라도 더 하소연했다면 난 그 땅을 사줄 수도 있었는데 쪼르르 부동산에 내놓다니. 에이, 그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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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은 생각했다. 현우는 오빠 이야기를 모른다. 수진이 현우에게 오빠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결혼할 때, 현우에게 수진은‘우리 집은 아무도 없으니 나만 보고 좋으면 결혼해. 혹시 처가 집 식구나 형제 많은 것을 원하면 당장 헤어지자.’라고 으름장을 놓아 현우랑 결혼 했다. 그러나 현우와의 결혼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연애할 때 현우의 주도적인 모습이 좋았지만 결혼하고 나니 독선적이고 고집불통으로만 느껴졌다. 더구나 늘 아이를 원하는 현우를 아이가 생기지 않는 수진은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삼십 년을 함께한 현우가 늘 낯설게 느껴졌다. 그냥 습관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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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은 결심했다. 이렇게 살면 더는 안 된다고.
수진은 현우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들리게 넌지시 말했다.
“그 땅 내 앞으로 해 주면 안 돼?”
“왜?”
“땅은 뭐 하게?”
“응. 나 온실 하나 지으려고”
수진은 그렇게 에둘러 말하고는 현우의 눈치를 봤다.
“그냥, 지으면 되지, 명의를 바꿔야 해?”
수진은 현우를 확실하게 설득하려고 말을 덧붙였다.
“응, 지주가 온실을 지으면 시에서 원예업 시설 보조를 80%나 해 준다고 해. 나 학원은 오래 할 수가 없을 거 같아서 화원이나 해보려고. 요즘 원생이 반으로 줄었어. 직원도 내보내고 혼자 하려니 힘들어.”
“그래? 그 작은 땅에? 하던 거나 하지. 갑자기 무슨 화원?”
“내가 워낙 화초를 잘 키우는 것은 현우 씨도 잘 알잖아? 나이가 드니 슬슬 꽃이 더 좋아지네. 학원 쉬는 시간에 꽃꽂이 자격증도 따 놓은걸.”
한참을 생각하다가 현우는 말한다.
“그 대신 나 끌어들이지 말고. 네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 알지?”
현우는 수진이의 말에 마지못해 승낙했다. 현우는 어차피 수진의 수입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소일거리를 하는 것이고, 길이 확장될 때까지 명의를 수진에게 옮겨놓는 것이니 나쁘지 않다.
‘그 돈이 어디 가겠어?’ 현우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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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현우는 ‘땅도 팔린 마당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구시렁거리며 호프집으로 향했다.
“어 현우야. 여기”
철민이는 벌써 오백 한잔을 반쯤 비우고 있었다.
“현우야. 내가 너에게 미안해서 술 한잔 사려고.”
철민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이야? 그게?”
“현우야. 사실 얼마 전 내가 네 땅 팔지 않겠냐고 물었지? 그때 시청 내부에서는 4차선 확장 계획과 도시계획에서 결정된 내용이 있었어. 네 땅 주변을 모두 농업 구역에서 자연녹지지역으로 풀 계획이었거든. 자연녹지로 풀리면 땅값이 열 배는 오를 거야. 그래서 내가 그 땅을 사려고 했었어. 그런데 네가 그 땅을 팔지 않는다고 해서 뒤땅을 사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덜컥 다른 사람이 샀다고 하더라. 차라리 그런 계획을 미리 네게 알려 줬으면 네가 샀을 텐데. 넌 돈도 있잖아. 내 욕심이 과했어. 잠시나마 내가 욕심을 부려 미안해.”
현우는 철민이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정보를 알았다면 당연히 그 땅을 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있었겠냐고. 철민이한테도 한 턱 떼어 주었을 것이다. 조금은 잊고 있었는데 철민이를 만나서 속앓이가 도졌다. 더구나 수진이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수진이가 사자고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않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수진이에게는 철민이를 만났다는 말을 결국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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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은 일단 유리온실 허가를 해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공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뒤 소분 공장은 앞 땅에 유리온실 짓는다는 말을 들으면 이 땅을 사려고 급히 서두를 것이다. 만약 온실을 짓고 나면 건축비까지 추가해 이 땅을 사야 하니까. 화원 한다는 말을 부녀회장에게 했기 때문에, 소분 공장 유 사장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다. 유 사장은 부동산을 통해 현우 씨와 흥정하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소유가 바뀌었으니 현우 씨 마음대로는 팔 수 없다.
부동산 영혜가 현우를 찾아온 것은 유리온실 허가를 내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자기야, 드디어 기회가 왔어. 그 땅 2배 받고 팔아 줄게. ”
“누가 필요하다고 해? 그 땅, 내 것 아니야. 우리 마나님이 달라고 해서, 줬어. 나 권한 없어.” 현우는 차를 마시다 말고 영혜를 쳐다보았다.
“그러지 말고 이참에 파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실, 소 분장 유 사장이 길로 사용승인서 받아주면 천만 원 준다고 했는데 그러기에는 자기한테 받은 돈이 있어 미안하고. 그래서 그 땅을 아예 사라고 했어. 두 배 정도 주면 팔지 않을까? 라고. 자기야. 나중에 도로로 보상받아도 그 정도 이상은 안 되니까 못 이기는 체하고 팔지?”
부동산 영혜는 애원하듯 현우에게 말한다.
“집에 가서 상의해 볼게. 아마 안 판다고 그럴걸.”
“꼭 좀 성사되게 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영혜는 손까지 비비며 어리광을 떤다.
‘수수료가 천만 원 이상 되나? 왜 저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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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아. 그 땅 말이야.”
수진이는 이미 현우가 어떤 말을 할지 알았다는 듯이
“왜? 영혜가 그 땅 팔라고 해?”
“어떻게 알았어? 수진아. 너한테 전화 왔어?”
“아니, 자기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거든? 그럼, 자기는 팔고 싶다는 거야?”
현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수진이가 욕심을 내서 온실을 지어 달라고 한 땅이고, 그 땅을 팔아야 할 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두 배를 준다니까 솔직히 던지고 싶었다. 단기간에 버는 돈치고는 나쁘지 않고 영혜의 말대로 도로 보상을 받아도 언제 될지 기약이 없으니 말이다.
“그 땅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면 안 돼? 자기는 다른 땅 많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
“뭐? 뭘 알아서 한다는 거야? 에이.”
현우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지만 수진이가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또한 여태 알던 수진이는 땅을 요리할 만큼 부동산 지식에 밝지 않다. 이번 일을 진행하는 것을 보니,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들은 계속 변하고 강해져 가는구나. 어떻게 한다는 거야? 이번이 기회가 좋은데. 이 땅을 두 배로 팔아서 더 큰 땅에 온실을 지으면 좋을 텐데. 현우는 고집을 부리는 수진이가 바보 같았다.
“저. 기억하세요? 천 영혜입니다. 현우 씨한테 전화했더니 원장님한테 전화하라고 해서요.”
“응. 그런데?”
“현우씨 말로는 그 땅이 원장님 명의로 되어 있어서 원장님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해서요. 그 땅을 파시라고 전화를 드렸어요.”
수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영혜 씨. 나 그 땅을 팔 생각이 없어. 거기에 유리온실을 지으려고 허가도 받아 놨어. 안 팔아”
수진은 팔더라도 영혜에게 득이 되고 싶지는 않다. 결코. 둘 사이를 몰라서 참는 것도 아니고. 아쉽기는 하나 보네. 퇴사 후 처음 원장님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아. 네 알겠습니다” 떨떠름하게 전화를 끊은 영혜는 냉큼 현우에게 전화했다.
“자기야, 어떻게 해줘. 수진이가 막무가내로 안 판다고 하니, 세배 준다고 해봐”
현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 이건 뭐지? 세 배? 수진이?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수진이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나?’
수진이가 땅을 보러 갔을 때는 이미 굴착기로 땅을 정리하고 있었다. 굴삭기를 하는 기사에게 슬쩍 물어보니, 공장을 지을 예정인데 허가가 늦어져서 정리만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도로를 막고 있는데 허가가 나겠냐고. 예전에 오빠는 어이없이 당했지만 난 절대 안 당한다고.’
수진은 두 가지 방안을 고안했다. 첫째, 도로로 사용승인을 해 달라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할 것이다. 현우라면 어쩌면 영혜의 술 한 잔에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소유권을 바꾼 것이니까. 둘째, 유 사장이 땅을 산다고 한다면, 10억을 달라고 할 것이다. 이 땅을 사서 길이 뚫리면 유 사장은 200억짜리 땅이 될 것이다. 이 땅을 10억을 받아도, 만평이나 산 유 사장은 평당 10만 원 정도 더 준 것이다. 그래, 10억이면 터무니없는 값이다. 안다. 그러나 유 사장 입장으로는 이 땅을 사는 게 맞다.
수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다짐했다. ‘여기서 10억을 손에 쥔다면 시골에 있는 아버지의 땅을 꼭 다시 찾으리라. 몇 대째 내려오던 땅을 한숨에 날려버려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그 땅문서를 아버지 묘소에 바치고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큰 땅이 있는 당당함을 현우에게 보여주리라.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꼭 다시 찾아 드릴게요.’
수진은 다짐하며 학원으로 향했다.
끽--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가 났다. 짧은 머리에 까만 양복을 입은 사십 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수진이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험악한 표정과 복장이다.
“박 수진 씨?”
“왜 그러는데요? 누구?”
대답하는 내내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얼핏 보니, 차 안에 비슷한 복장의 남자가 둘이나 더 있었다.
“수진 씨. 그 땅 파는 것이 좋을 거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 주 여기서 우리를 또 보게 될 것이요. 그땐 그냥 가지 않겠죠?”
그러면서 차가 붕붕 소리를 내며 가 버린다.
수진은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큰 게임을 하고 있나. 간신히 학원에 도착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이젠 조폭까지 풀어 협박하는구나.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냥 팔아야 하나? 아냐. 내 목표는 10억이야. 그래야 아버지 땅을 찾을 수 있어. 이런 일을 현우 씨에게 말하면, 당장 팔라고 할 것이다. 일주일 동안 고민을 했다. 하루는 그냥 팔자, 하루는 안 돼, 반복하다가 결론을 냈다.
조폭이 보자고 한 날, 수진이는 직접 소분 공장 유 사장을 만나러 갔다.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이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런 방법을 쓰다니 이판사판 팔더라도 낯짝이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협박이 오히려 큰 용기를 주었다.
공장 입구는 겉은 지저분했는데, 내부는 의외로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여직원이 나오길래 유 사장을 만나러 왔다니까 유 사장 방으로 안내했다.
유 사장은 생각보다 젊고 반듯해 보인다. ‘그럼, 누가 깡패까지 동원해서 땅을 팔라고 협박한 것인지?’ 유 사장은 아닌 듯싶다.
“앉으시지요. 수진 씨라고요? 부동산에서 연락받은 것은 없는데,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네, 제가 요즘 협박을 받고 있어서요. 유 대표님이 시킨 것인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사모님, 절대 아닙니다. 제가 그 땅이 꼭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런 방법으로 땅을 살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 누가?”
수진은 대꾸는 했지만, 그럴 만큼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어찌하였든지 그 땅에 대해서 결론을 말씀드리러 직접 왔습니다.”
수진은 말하는 내내 단호한 표정으로 똑바로 유 사장을 바라보았다.
유 사장은 침착하게 답변했다.
“네, 차 드시고,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 아니, 제가 먼저 제안할게요. 저는 그 땅이 꼭 필요합니다. 가능하다면 제게 파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수출 건으로 공장 확장이 필요해서 공장 이전을 생각했는데 다행히 여기 사 놓은 땅이 자연녹지지역으로 바뀌어서 여기에 짓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다 보니 길 문제가 있어, 이 땅을 중계했던 부동산사무소에 입구 땅을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협박을?”
‘아하! 영혜의 농간이구나.’ 수진은 고개를 주억였다. 직접 와 보지 않았다면 유 사장이 보낸 사람으로 오해할 뻔했다.
수진은 유 사장이 먼저 저렇게 나오니 10억은 조금 과하게 부르는 게 아닌가. 어쩔까 갈등이 생겼다.
유 사장은 말을 이어 나갔다.
“사모님, 제가 필요해서 그 땅을 달라고 하는 것이니 10억에 제게 파십시오. 저는 땅을 130억 주고 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대신 개울가에 이 200평을 드리겠습니다. 그곳에 온실을 지으시면 서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듯합니다. 사모님이 오늘이라도 승낙해 주시면 저희는 당장 허가받을 수 있고 수출 날짜도 맞출 수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유 사장은 정중하고도 침착하게 협상을 주도했다.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정확한 판단력이 뛰어나다 할까. 단숨에 수진이의 속내를 알아냈다.
수진은 유 사장과 내일 법무사사무실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우에게는 아무 말 안 하고 다음 날 등기까지 마쳤다. 100평 남짓한 땅을 주고, 200평의 땅과 10억을 통장으로 받았다.
그 길로 수진은 시골로 내려가서 8억 하는 아버지 땅을 샀다. 결국 아버지의 땅을 찾았다.
이제는 수진은 현우에게 기대지 않는다. 그동안 학원이 어려워 직원 급여까지 현우에게 손 빌리던 일. 그때마다 ‘그 따위로 하려면, 당장 때려치워’ 그러던 말. 이제는 듣지 않으리라. 아이를 못 갖는다고 시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눈치를 받던 일. 한 번도 수진을 감싸주지 않고 나 몰라라 방관했던 현우. 영혜와 바람을 피우면서도 너무도 당당한 나쁜 놈. 이제는 영원히 안 보고 싶다.
수진은 현우에게 전화했다.
“나 아버지 산소에 다녀올게.”
“뭐? 어디?”
현우는 결혼해서 한 번도 가지 않은 친정아버지 산소를 다녀온다고 하는 소리를 잘못 들었나 했다.
“김현우. 나 그 땅 팔았어. 직접 소분 공장 유 사장과 계약했어.”
현우가 수진의 달라진 말투에 깜짝 놀라며 더듬거리며 물었다.
“뭐? 김현우? 그리고 뭘 팔아?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한마디 상의도 없이. 너 너 얼마를 받은 거야?”
수진은 목소리 톤을 아주 낮게 깔고, 천천히 아무 일 없다는 듯 대답한다.
“자기도 나랑 상의한 적 없잖아? 계약은 유 사장과 직접 법무사사무실에서 작성했어. 영혜와는 상·관·없·이· 그래서 수수료는 안 냈어. 한·푼·도·”
현우가 ‘수진이가 왜 ‘영혜와 상관없다’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거지? 우리 관계를 알았나?’ 생각하는 동안.
수진은 현우에게 그동안 수없이 연습한 한마디를 결국 마저 했다.
“김현우. 잘 들어. 그동안 자기와 살면서 매일 매일 망망대해를 나 혼자 떠도는 느낌이었어. 나 이제 그만할래.”
‘뚜뚜……’
“수진아. 수진아…….”
수진은 현우가 생각할 틈도 안 주고,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를 툭 끊어 버렸다.
******
그렇게 수진이 떠난 지 벌써 5개월이 넘어간다.
손만 뻗으면 옆에 있었기에,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수진을 자기의 소유물처럼 드나들던 현우.
엄연한 사유지를 ‘관습법상 도로’라 하며 감사함을 모르고 사용했던 것처럼.
현우는 속이 쓰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타이레놀 한 알과 활명수를 입속에 털어 넣고 잠을 청해 본다.
하지만 귀에 쟁쟁 울리는 단 한마디가 떠나질 않는다.
“나 이제 그만할래.”
“나 이제 그만할래.”
현우는 텅 빈 집안을 혼자 서성거렸다.
문득 냉장고 문에 수진이가 붙여둔 빛바랜 노란 메모가 눈에 띈다.
‘살 것: 타이레놀, 활명수, 미역, 라면.’
창밖엔 매지구름이 까맣게 몰려온다. 끝.
송보영
이천문인협회 정회원
건축사 공학박사.
2024년 이천문학상 전국 공모전에서 시부문 신인상 수상,
현재 사이버대 문예창작학과 학부 재학 중.
2025<모서리의 온도>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