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 ◇
/고명재
비 오는 날 거대한 나무들이 가지를 낮추는 부드러운 모습이 좋다
콧등에서 갑자기 튀어오르는 빗방울의 탄성도 좋다
청개구리의 촉촉한 도약이 좋다
탄로綻露라는 한자에 뚫린 구멍이 좋다
물방울의 총성이 울리면 여름이 된다
나무가 흔들리고 열심히 앞으로 젖은 채 달리고
병원으로 향하는 좁은 언덕에 작은 꽃집이 희망처럼 있는 게 좋다
모두가 평등하게 비를 맞는 모습이 좋다
장화를 신으면 청개구리의 리듬이 오는 게 좋다
아이의 무릎이 내 무릎 속에 있는 게 좋다
달리기 말고 힘차게 뛰어오르는
새싹의 미래가
내 안에 있는 게 좋다
물웅덩이를 보면 간지러운 발바닥이 좋다
튀어오르는 흙탕물에 개의치 않고 사랑에게 달려가는 정강이가 좋다
베란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둔 금귤을 보는 게 좋다
귤 말고 금귤의 덩치가 좋다
금관악기에 매달리는 빛의 손자국이 좋다
약조보다는 약속을
가장 여린 손가락을
서로가 서로에게 거는 게 좋다
복숭아와 봉숭아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막을 수 없는 친근감도 숨 막히게 좋다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 떠난 사람이 캄캄하게 보고 싶어서
가슴속의 복숭아를 반으로 가르는
과육의 슬픔도 과도도 향기도 모두가 좋다
유품을 만지는 걸 멈출 수 없다
이렇게 비가 오고 전화기가 잠잠해질 때
사랑이 으깨져 사랑의 맨살이 짓물러갈 때
내 속에는 사랑의 장대비가 맨살을 때리고 여름을 흔들고 저 높은 나무의 푸름을 두드려
거리에 천막에 장화에 새싹에 청개구리에
아무렇게나 금귤처럼 반짝이면서
함부로 칠해둔 당신의 낯빛이 좋았다
물러서는 사람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폐가 터지도록 달려서 봤던 마지막 얼굴이 내 남은 여름을 후회로부터 지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