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철학 에세이】
산수국이 활짝 웃으니 무화과가 움찔했다
― 공존 공생 철학적 변장술에 능한 화단의 두 꽃나무
윤승원 수필가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
무화과가 움찔했다. 하지만 산수국은 밝게 웃었다. 여기저기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산수국은 지난해 세입자가 화단에 심었다. 무화과는 수년 전 아내가 심었다. 무화과는 지난해 많이도 열렸다.
▲ 우리집 화단에 활짝 핀 산수국 - 꽃 모양과 색깔이 특이하다.(사진=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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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가 심은 산수국은 낯선 존재다. 작은 화단에 두 꽃나무를 보면서 싸우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과연 공존 공생이 가능할까 조심스럽게 지켜봤다. 산수국은 일반 수국보다 특이한 점이 많다.
여름에 백자색으로 피는 꽃은 야성적이면서도 청초한 느낌을 준다. 꽃 모양이 특이하다.
▲ 꽃 모양을 자세히 보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사진=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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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는 작은 꽃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고 가장자리에만 나비처럼 생긴 큰 꽃잎이 장식처럼 둘러싸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꽃잎이라고 생각하는 바깥쪽 큰 꽃은 사실 곤충을 유인하기 위한 장식꽃이고, 실제 씨앗을 맺는 꽃은 가운데 모여 있는 작은 꽃들이라고 한다.
꽃말은 변덕, 진심, 인내, 겸손한 사랑이라고 한다. 일본에는 오래전부터 산수국을 둘러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한 승려가 사랑하는 부모를 위해 부처님께 기도했는데,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아 산길에 보랏빛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산수국은 ‘감사의 꽃’, ‘은혜를 잊지 않는 꽃’으로도 여겨진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부모님께 감사하는 뜻으로 산수국을 선물하는 풍습도 있다고 한다.
▲ 세입자는 왜 이 꽃을 주인집 화단에 심었을까?(사진=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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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의 관심은 세입자가 심은 꽃이라는 점이다. 보통 세입자는 언젠가 떠날 사람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머무는 공간에 꽃나무를 심고 가꾼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떠날 사람이 주인집 화단에 꽃을 심는 이유는 뭔가? 꽃은 자기 것이 아닌 땅에서 뿌리를 내렸고, 사람은 자기 것이 아닌 집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자연은 철학자다. 부처님 마음도 들어 있고, 예수님 사랑도 들어 있다.
▲ 무화과 나무와 산수국 꽃을 바라보면서 공존 공생의 철학을 배우다.(삽화=AI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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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무화과가 움찔했던 것을 나는 이해한다. 산수국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자 다소 충격을 받은 듯 놀라움을 나타냈다.
우리 집 화단에선 무화과나무가 터줏대감이다. 그렇다고 텃세를 하지는 않는다. 잎이 큰 무화과는 말없이 조용하지만, 생명력이 강하다.
넓은 잎을 펼쳐 햇빛을 차지하며 성큼성큼 자라는 나무다. 반면 산수국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늘도 잘 견디고,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수줍고 겸손한 식물이다.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식물이 한 공간에서 만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산수국이 활짝 꽃을 피우니 무화과가 약간 놀란 듯 움찔하면서 중얼거렸다.
“화려한 자태로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겠다는 거냐?”
산수국은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
“형님, 키도 크고 잎도 크고 마음도 바다처럼 넓으신 형님, 형님 곁에서 세상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고 싶어요.”
그러자 무화과가 웃었다.
“겸손하긴… 예쁘게 생겼지만 오만하지 않구나. 불경을 공부한 티가 나는구나. 같은 공간에서 정을 나눌 만 하구나.”
숲에 가 보면 큰 나무와 작은 풀, 덩굴식물과 야생화가 함께 살아간다.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욕심을 내면 균형이 깨지지만,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면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진다.
우리 집 작은 화단도 그렇다. 내가 감탄한다.
“오,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여러 세입자가 가족처럼 인사하고 따뜻한 정을 주는 것처럼 얘들도 공존 방식을 제대로 아는구나!”
두 꽃나무를 보면서 단순한 화단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야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화과는 집주인이 심은 나무이고, 산수국은 세입자가 심은 꽃이지만, 서로의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
누가 집주인인지, 누가 세입자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저 같은 흙을 밟고, 같은 비를 맞고, 같은 햇빛을 나누어 받으며 살아갈 뿐이다.
같은 지붕 아래 산다는 것은 같은 주소를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연의 공존, 이웃 간의 정,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 양보와 배려, 다양성이 만드는 아름다움.
이 같은 주제가 함께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무화과나무는 수필가요, 산수국꽃은 시인이다.
만약, 화단에 무화과만 존재한다면 풍성한 열매 이야기만으로 그칠 수 있다. 반대로 산수국만 존재한다면 아름다운 꽃 이야기로 끝날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두 식물이 한 화단에서 만나면서 이야기가 풍요로워졌다.
▲ 무화과나무는 수필가, 산수국꽃은 시인이다.(삽화=AI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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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는 열매를 맺어 먹거리를 제공하는 실용적인 나무다. 산수국은 아름다운 꽃을 피워 눈을 즐겁게 하는 관상수다.
하나는 유용함의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처럼 실질적인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산수국처럼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서로 다른 존재가 함께 있을 때 공동체는 더 풍요로워진다.
산수국이 보랏빛 꽃을 활짝 피우자 무화과도 잠시 긴장한 듯 보였다. 그렇다. 긴장 관계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선의의 경쟁은 건강한 삶의 방식이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한 화단을 아름답게 만드는 두 식물.
사람 사는 세상도 이 화단처럼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또 있다.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리 찾아도 꽃을 볼 수 없다.
무화과를 따보면 열매처럼 생겼지만 사실 속의 먹는 부분이 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열매껍질은 사실 꽃받침이며, 내부의 붉은 것이 꽃이라고 한다.
무화과의 과즙 또한 엄밀히 말하자면 무화과꽃의 꿀이다. 그러므로 ‘꽃이 없는 과일(無花果)’이라는 명칭의 어원은 틀렸다.
산수국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꽃잎이라고 생각하는 바깥쪽 큰 꽃은 사실 곤충을 유인하기 위한 장식꽃이고, 실제 씨앗을 맺는 꽃은 가운데 모여 있는 작은 꽃들이다.
‘변장술’에 능한 두 식물이 한 화단에서 ‘공생’을 주제로 집주인을 웃긴다. 수필을 쓰는 집주인을 철학적인 만담으로 우롱하고 있다. ♣
■ 사찰 경내에 산수국을 심는 이유 :
산수국은 꽃말이 ‘진심’ 등으로 소개되며, 사찰 주변에 자주 심어지는 식물군(수국과 함께)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나무위키)
마곡사에서도 산수국을 즐길 수 있는 코스가 있습니다.
※ 6월 산수국 최적 추천 루트: 태화천 따라 마곡사까지 7~8분 도보 → 경내 구경 후 마곡천 계곡 징검다리 산수국 감상(네이버 여행 정보 자료)
2026. 6월
윤승원, 화단의 두 꽃나무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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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윤승원 수필가의 「산수국이 활짝 웃으니 무화과가 움찔했다」는 작은 화단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인간 사회의 공존과 공생, 다양성과 상생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매우 흥미로운 우화적(寓話的) 수필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연 관찰, 식물학적 사실, 유머, 철학, 인간사에 대한 성찰이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1. 산수국과 무화과의 ‘이중 변장’'을 발견한 독창성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문학적 장치는 마지막 부분에 드러나는 반전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화단 속 두 식물의 공존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결말에 이르러 독자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산수국은 꽃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 꽃이 아니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과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열매 속이 꽃이다.
즉 두 식물 모두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작가는 여기서 단순한 식물 이야기를 넘어 인간 사회를 비춥니다.
세상에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사람이 실제로는 겸손하고,
조용해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깊은 능력을 품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변장술’은 단순한 식물학적 특징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은유가 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
“수필을 쓰는 집주인을 철학적인 만담으로 우롱하고 있다.”
이 표현은 매우 유쾌합니다.
작가가 자연을 관찰하는 주체에서 어느 순간 자연에게 한 수 배우는 객체로 전환됩니다.
자연이 철학자이고 인간이 학생이 되는 순간입니다.
2.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현대적 소재의 활용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산수국을 단순히 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계속해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세입자가 심은 꽃”
이 설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꽃만 보지만,
작가는 꽃을 심은 사람의 마음을 먼저 봅니다.
이 부분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따뜻한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입자는 언젠가 떠날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것이 아닌 공간에 꽃을 심었습니다.
이 장면은 불교의 무소유 정신,
기독교의 사랑 실천,
공동체 정신을 동시에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산수국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배려, 감사, 나눔, 선의를 상징하는 존재가 됩니다.
3. 윤승원 수필 특유의 ‘대화 수법’
작가님의 작품에는 자주 등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물을 의인화하여 대화를 시키는 방식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무화과와 산수국이 직접 대화합니다.
특히 이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형님, 키도 크고 잎도 크고 마음도 바다처럼 넓으신 형님...”
산수국이 후배처럼 말하고,
“불경을 공부한 티가 나는구나.”
무화과가 큰형님처럼 답합니다.
이 장면은 독자에게 웃음을 줍니다.
그러면서도 경쟁과 질투를 화해와 존중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윤승원 수필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교훈을 직접 설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신 식물들이 대신 이야기하게 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부담 없이 철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4. 실용성과 아름다움의 공존
작품 후반부는 매우 수준 높은 사회 철학으로 확장됩니다.
무화과는 열매, 생산성, 실용성을 상징합니다.
산수국은 꽃 감성,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작가는 여기서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세상은 흔히 생산성과 효율만 중시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과 감동도 필요합니다.
무화과만 있는 화단도,
산수국만 있는 화단도
어딘가 부족합니다.
둘이 함께 있을 때 화단은 풍요로워집니다.
이는 곧 과학과 예술, 경제와 문화, 기술과 인문학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5. 자연 속에서 발견한 불교 철학
작품 곳곳에는 불교적 사유가 흐릅니다.
특히 “같은 흙을 밟고, 같은 비를 맞고, 같은 햇빛을 나누어 받으며 살아갈 뿐이다.”
라는 부분은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Dependent Origination(연기)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무화과도 혼자 살 수 없고, 산수국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은 자연을 통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6. 수필가 윤승원의 창작 기법
이 작품에는 윤승원 수필의 대표적 특징들이 거의 모두 들어 있습니다.
① 작은 일상에서 출발한다
거대한 사건이 아닙니다.
집 앞 작은 화단입니다.
② 관찰에서 철학으로 발전한다
꽃을 본다.
↓꽃의 특징을 조사한다.
↓꽃말을 생각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로 확장한다.
↓사회 철학으로 발전한다.
이 과정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③ 웃음과 교훈을 함께 담는다
무화과가 움찔하고,
산수국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불경 공부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은 유머입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공존, 배려, 다양성, 상생이라는 진지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 종합 평가
이 작품은 겉으로는 산수국과 무화과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말하는 철학 수필입니다.
특히 작품의 백미는 산수국과 무화과가 모두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한 대목입니다.
그 순간 독자는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메시지를 얻게 됩니다.
“아름다움과 유용함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공존 관계다.”
윤 작가는 작은 화단을 무대로 하여 자연의 철학, 인간관계의 윤리, 공동체의 가치, 그리고 다양성의 미학까지 담아냈습니다.
무화과가 수필가라면 산수국은 시인이라는 결론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두 존재가 한 화단에서 만나 한 편의 작품을 완성했듯이, 이 수필 역시 자연과 인간이 함께 쓴 아름다운 공생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덧붙이는 말
이 작품을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작가님께서 단순히 ‘꽃이 예쁘다’거나 ‘식물이 함께 자란다’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작은 화단을 하나의 사회로 확장시켰다는 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산수국의 꽃을 보거나 무화과 열매를 봅니다. 그러나 수필가는 그 너머를 봅니다.
산수국을 심은 세입자의 마음을 보고, 무화과를 심은 아내의 정성을 보고, 서로 다른 두 식물의 성격을 보고, 거기에서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를 발견합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는 윤 작가님이 자주 강조하시는 생활철학인 "안분지족(安分知足)"과 "지족상락(知足常樂)"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습니다.
무화과는 무화과대로, 산수국은 산수국대로, 자기 역할에 충실합니다.
무화과가 산수국처럼 꽃을 피우려고 하지 않고, 산수국이 무화과처럼 열매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도 상대를 인정하는 모습은 안분지족의 철학과 맞닿아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작품 속에서 무화과가 잠시 “움찔”하는 장면입니다.
만약 무화과가 끝까지 질투했다면 이야기는 갈등 수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가님은 그 긴장을 유머로 바꾸고 화해로 이끕니다.
이는 윤 작가님의 작품 세계에 자주 등장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경쟁의 시각보다 화해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대립보다 공존을 선택하며, 비판보다 이해를 우선하는 태도 말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작품을 읽고 난 뒤 무거운 교훈보다 따뜻한 미소를 먼저 얻게 됩니다.
또한, 마지막의 “변장술”은 매우 수준 높은 수필적 발견입니다.
산수국도 겉모습과 실제가 다르고, 무화과도 이름과 실체가 다릅니다.
결국 작가님은 식물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사람도 함부로 판단하지 마세요.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 한 문장이 작품 전체에 숨어 있는 철학적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단은 작지만, 작품 속 세계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집 앞 작은 화단에서 출발하여 자연 철학, 공동체 철학, 인간관계의 윤리, 다양성의 가치까지 담아낸 점에서 매우 윤승원다운 수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화과와 산수국은 화단의 두 식물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마치 두 명의 현자가 되어 윤 작가님과 독자에게 “함께 살아가는 법”을 조용히 가르쳐 주고 있는 듯합니다. 참 정겹고도 사색적인 작품입니다. ♣
(雲峰, 윤승원 수필 전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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