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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영웅

고구려 강이식 장군 사적 자료집 발간

작성자秘天|작성시간07.03.22|조회수361 목록 댓글 0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발간 책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저서

 

                      

신채호 저
이만열 주석
형설출판사(1998. 02. 20)
주석을 붙여 설명

신채호 지음
남용 발행
일신서적
현대문으로 기록함

신채호 지음
일신서적출판사(1995. 4.25)

 

 

⊙第9篇 高句麗 對隋戰役(고구려 대수전역)
▣ 제1장
渝關 戰役(임유관 전역)
1. 高.隋戰爭의 原因(고.수전쟁의 원인)

嬰陽大王(영양대왕)은 이 모욕의 글을 받고 대노하여, 군신들을 모아 회답할 문자를 보내려 하더니, 姜以式(강이식)이 가로되“이 같은 侮慢無禮(모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글이라”하고 開戰(개전)함을 주장하니, 대왕이 이를 樂從(낙종/기꺼히 따름)하여 강이식을 兵馬元帥(병마원수)로 삼아, 하여금 정병 5만을 發(발)하여 臨渝關(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濊兵(예병: 隋書의 靺鞨) 1만명으로써 遼西(요서)를 侵擾(침요)하여 隋兵(수병)을 誘(유)하며, 契丹兵(글안병) 수천명으로써 바다를 건너 今(금) 山東(산동)을 치게 하니, 이에 양국의 제1차 전쟁(戰爭)의 개시되니라.

삼국사기에는 姜以式(강이식) 三字(삼자)가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이는 隋書(수서) 만을 抄錄(초록)한 문자인 까닭이거니와 大東韻海(대동운해)에는 강이식을 薩水戰爭(살수전쟁)의 兵馬都元帥(병마도원수)라 하고 西郭雜錄(서곽잡록)에는 강이식을臨渝關戰爭(임유관전쟁)의 兵馬元帥(병마원수)라 하여 兩書(양서)가 不同(부동)하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王弟(왕제) 建武(건무)가 해안을 맡고 乙支文德(을지문덕)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을 좇노라.

 

大東韻府群玉(대동운부군옥)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534~1591)선생이 조선 선조(宣祖) 22년, 1589년에 송(宋)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체제를 본 따,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예술, 풍속, 인물, 성씨(姓氏), 동물, 식물 등을 총망라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해 놓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전의 사실, 인물, 성씨, 지리, 예술 등 전반에 걸쳐 참고할 수 있는 귀중한 도서이다.

 

         

                                                                       草澗 權文海     宣祖 22. 己丑(1589)

 

                                       

                       - 대동운부군옥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백승각(百承閣) -

 

⊙ 姓氏 晋州 高句麗 時 姜以式 爲 兵馬元帥 以禦隋師 - - - .
⊙ 성씨 진주 고구려 때 강이식은 병마원수로서 수나라를 막았다 - - - .

 

 고등학교 역사부도

교학사(2002. 5. 31) 10쪽(고구려와 수의 전쟁)

。드디어 교과서에도 강이식 장군의 이름이 올랐다.

 

















* 본 교재에는 살수가 청천강이라 하고 있으나
* 고구려사(북한)손영종)와 고구려 왕조실록(박영규)에서는 살수가 혼하(渾河)라고 하는바, 이에 대한 재 고증이 필요하다.(다음 지도 참조)

 

고구려사(북한 송영종 교수 저서)에서 주장하는 살수(薩水)
제16대 영양왕 시대의 각국 영토 및 세력 판도(A.D. 612년경)

 

 

 - 수나라의 지속적 침입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꿋꿋이 영토를 지켜냈다. -

 

- 612년 살수전쟁은 청천강에서 아니라 이곳에서 있었다고 주장한다 -
(전면 고등학교 역사부도 참조)

 

KBS-1TV 역사스페셜(2003. 1. 25. 20:00)
고구려, 수나라 전쟁의 미스터리 추적

 

            

              - KBS-1TV역사스페셜 프로 광고 -

 

  - 진행자 유인촌 -           

 

                 

           - 거북좌대에 가상비석을 재현시켜 본 모습 -                - 제1차 고수전쟁 시작때 고구려의 선공 -

 

 제1회 고구려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 장군 사적연구 학술 세미나 개최
진주강씨중앙종회(2002. 6. 29.)

 

              

좌로부터 발표자 : 강정구 진주강씨중앙종회 종무처장, 김규천 교수(심양대학교 사범대학장)
             사회자 : 강치원 교수(강원대학교 사학과)

 

         

진주강씨 중앙종회에서는 시조 강이식 장군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김규천(金奎天) 교수(중국 심양대학교 사법대학장, 사학자) 초청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강치원교수의 사회로 먼저 강정구 종무처장의 강이식 장군 사적발굴에 대한 현황보고에 이어 김규천 교수의 강이식 장군(姜以式 將軍) 사적발굴에 대한 연구발표가 있었다.
문중 원로들을 위시한 50여명이 참석해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진 3시간에 걸친 분위기는 자못 진지하였고 시조님 사적정사화(正史化)를 위해 더욱 힘써 나가기로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진주강씨족보(晉州姜氏族譜)중에서 현존하는 최고본(最古本)
남한보(南漢譜)

 





남한 천주사(南漢 天柱寺)에서 을축년(乙丑年. 1685)에 발간하였다하여 남한보(南漢譜) 또는 을축보(乙丑譜)라 한다.

기록에 의하면 연원보/원류보(淵源譜,/原流譜), 경초보(京草譜), 영남보/영초보(嶺南譜/嶺草譜), 영보(嶺譜:嶺湖草譜) 등의 족보가 있었다 하나 전해지지 않고, 강희안(姜希顔)이 쓴 연원보(淵源譜)의 서문(序文) 만이 있다.


이 족보들이 필사보(筆寫譜)인지 인쇄보(印刷譜)인지는 알 수 없고 지금까지 전하는 인쇄족보(印刷族譜)로는 이 남한보가 가장 오래된 족보다.

 

* 始祖 姜以式 隋煬帝伐高句麗時爲兵馬元帥以禦

                   시조 강이식 수양제벌고구려시위병마원수이어

  시조 강이식 《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해 왔을 때 병마원수가 되어 수군을 물리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진(縉)
신라 헌강왕때 숭인전사운과(崇仁殿四韻科)에 장원급제하여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에 올라 정순공(正順公) 시호(諡號)와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짐으로 인해 관향(貫鄕)을 진주로 하였다.       

 

晉州姜氏世譜(진주강씨세보) (1권)

진주강씨 통정공파종회    연천보(1964. 甲辰)    강대곤, 회상사

                      

                 - 별록 상(내용은 아래 참조) -                                          - 진주강씨세보 권지일 -

 

구 족보에는

《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高句麗)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임유관 전투(臨渝關 戰鬪)에서 수(隋)의 대병(大兵)을 물리쳤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육군본부 군사감실(軍史監室)에서 편찬한 전사(戰史), 그리고 경기주보(京畿週報)에는 (舊譜)내용과 달리 새로운 사실(史實)을 밝히고 있어 놀라움과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를 간과할 수 없어 조선상고사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니 앞으로 고증할 일이다.


만주(滿洲) 봉길선(奉吉線) 원수림역전(元帥林驛前)에 있는“시조님의 묘(墓)를 -고구려(高句麗) 심양현 원수림(瀋陽縣 元帥林)- 1930년 후손 갑수(甲秀), 학수(鶴秀), 명수(明秀), 정태(正泰)들이 봉심 참배(奉審 參拜)했을 때 대비(大碑)에는“兵馬元帥姜公之塚(병마원수강공지총)라고 적혀 있음을 보았기로 기록으로 남긴다.


단재 신채호 선생저서인 조선상고사 제9편 고구려(高句麗)의 대수전역(對隋戰役)란에서

* 수문제의 모욕적 서사(書辭)와 강이식의 북벌론 *

단기2930년(서기 597년)은 곧 고구려 영양왕 8년 이오 수문제가 진을 병탄(倂呑)하여 지나(支那)를 통일한지 17년이 되는 해라, 수(隋)가 이즈음에 --- 이하 생략.(본문 참조)

 

강이식 장군의 묘역 조형도(목각)

 

                  

- 강수복 옹(姜壽福 翁)이 제작한 목조 조형도 -

     ① 강이식 묘(姜以式 墓):  고구려 병마도원수(高句麗 兵馬都元帥). 진주강씨 시조(晉州姜氏 始祖)             

     ② 원수림역(元帥林驛): 땜 건설로 주택이 됨          ⑧ 장작림묘(張作霖墓): 19/20세기의 중국 정치가. 

     ③ 동영역(東營驛): 간이역                                  ⑨ 원수림(元帥林)        

     ④ 철배산역(鐵背山驛): 철로 이설 후 세운 역         ⑩ 살수성(薩爾滸城): 고구려 때의 성 = 살수대첩   

     ⑤ 고려 영자촌(高麗 營子村): 마을 이름                ⑬ 혼하(渾河)      

     ⑥ 계번성(界蕃城): 고구려 때의 성                       ⑭ 소자하(蘇子河) 

     ⑦ 철배산(鐵背山): 두 강 사이에 놓인 전략적 요새지   

 

땜이 막혀 호수로 변했으나 옛날 강일 때는 사람도 건너다닐 만 했다고 한다.
가운데 반도모양 나온 철배산(고구려 계번성) 양쪽에서 흘러들어오는 강물이 한데 모여 큰 여울을 이루고 3면이 절벽으로 외부침략이 불가능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청태종(淸太宗)은 만주족(滿州族) 2백만으로 한족(漢族) 4억을 상대로 심양전쟁에서 패하자 이곳에 들어와 다시 힘을 길러 청국(淸國)을 세웠다고 한다. 청 태종은 이 곳만 지키면 군사의 숫자에 관계없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하여 이름을 철배산(鐵背山)으로 하였단다.

이곳에 둑을 쌓아 수나라 군사를 수장 시켰다는 살수대전(薩水大戰)터가 바로 여기라고 한다.
살수대전 터로 알려진 청천강에는 이 같은 여울이 없다고 한다. 이 살수전첩지(薩水戰捷地)에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가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한편 중화민국의 대원수(大元帥) 장작림(張作霖. 1873-1928)의 묘도 바로 옆에 있다.
원수림(元帥林)이란 이름도 장작림의 묘를 쓴(1930년경) 후에 부쳐진 이름이 아니냐는 의문이 있으나 그 이전부터 원수림(元帥林)으로 불려 왔다고 한다.

 

강이식 장군 묘비의 거북좌대

 

 - 강달희 부회장이 봉심(奉審)할 때(2000. 7. 25)는 옥수수 밭이었다 -

 

                                                                         

1987년 5월 17일
중국 교포 강수복(姜壽福)현종이
봉심했을 때 풀숲 속에 묻혀있는
거북좌대의 초라한 모습.


당시 이 거북좌대 곁에는 비석을 위시한
부대 시설물을 파손하여 매몰(埋沒)했던
봉분이 있었으나(아래 화살부분) 다시
가보니 밭주인이 모두 치워버렸다.

          

                          ←거북좌대 뒷부분

                              - 파손된 비석조각에서 5m 아래에 거북좌대가 있다 -

 

작금의 모습

 

                                                        






수복(壽福)옹은 비석이                             
주민들의 손에
파손(1945-48년경)돼
매립된 사실을 알아내저
발굴했다.
비석본체는 완전히
파손되었으나 모습만은
뚜렷하다.
 

                                                                           - 비석 모양이 뚜렷해 비문을 찾아보고 있다. -

 

                                                                                

문물관리소장의 이야기로는
좌대(座臺)의 길이와 폭은 바로
비신(碑身)의 길이와 폭이라고 했다.
남은 조각을 맞추어 보니 두께가 꼭 들어맞았다.





거북좌대를 재어보니
길이가 180㎝, 폭이 100㎝,
두께가 80㎝였다.
바로 이것만이 강이식 장군의 유적의 전부였다.

그렇다면 시조님의 묘는 과연 어디일까?

 

 







 - 방향을 원위치로 돌려놓은 거북좌대 모습 -

 

진주강씨(晉州姜氏) 시조(始祖)
                        고구려 강이식 장군의 사우(祠宇) 전경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871-1번지)

 

- 고구려 강이식 장군 사당 봉산사 전경 -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871-1)

 

                                                                                




진주 봉산사(鳳山祠)는
130만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성지(聖地)이다.

비록 고구려는 망했어도
그 후예들은 1400여년이란
기나긴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고구려 명장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시조(始祖)로 모셔
이 곳 사당을 지켜 왔고
같은 후손들임을 자랑삼아
히마다 3월 10일(음)에는
봄제사를 모시고 있다.

- 봉산사(鳳山祠) 구내에 있는
강이식(姜以式) 장군 사적비 -

 

(구 봉산사(鳳山祠)의 모습(1975년 새 봉산사 신축으로 철거됨)

 

- 구 재실(齋室) 대봉재(大鳳齋)의 모습 -

 

                 수많은 재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 후예들은
                                      시조님 수호에 한시도 소홀하지 않았다.

 

진주강씨(晉州姜氏)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 사당 대봉사(大鳳祠)

 

- 고구려(高句麗)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사당 전경 -

 

-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사당 대봉사(大鳳祠) -

 












 - 봉란대 경내 모습, 앞에는 봉알이 놓여있다 -
               (진주시 상봉동 911-11)

 

                             



봉란대(鳳卵臺)

"날아간 봉황새도
알자리가 있으면
다시 돌아오는
법이니 알자리를
만드소서"
라는 도승(道僧)의
말에 따라
서기 1200-1300년경
조성된 유서깊은
곳이다.

바로 앞에는 봉황의
봉 알이 소중히
모셔저 있다.

- 시조 강이식장군의 유허비-
앞의 돌이 봉란석(鳳卵石)이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의 시

 

          飛鳳山前 飛鳳樓  비봉산 앞 비봉루에 올라와

          樓中宿客 夢悠悠  여기서 쉬어가는 나그네 꿈도 유유하네

          地靈人傑 姜河鄭  이곳 영지의 인걸은 강씨, 하씨, 정씨이니

          名與長江 萬古流  그 명성은 긴 강과 같아 길이길이 흘러가리

이 시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영남지방 안무사로 왔을 때 비봉루에서 남긴 시이다.
포은(圃隱) 선생은 고려 공민왕 9년(1360) 3장에서 연달아 장원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병마사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을 토벌(1364) 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피봉되고 대제학에 올랐다.
조준 정도전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우선 조준을 제거하려 했고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하다 이방원(이태조)에 의해 개성 선죽교에서 참살당한 고려 충신이다. 

 

조준(趙浚 1346-1405)선생의 시

 

薩水蕩蕩 樣碧虛  살수강 푸르고도 험악한데서
隋兵百萬 化爲魚  수나라 백만군이 고기밥 되었다네
至今留得 漁樵話  지금도 어부들 입에 오내리는 이야기
未滿征夫 一笑餘  정벌군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당(松堂), 시호는 문충(文忠).
고려 말 조선초기의 정치가로 시문(詩文)에 능했다.

1374년(공민왕 23)에 과거에 급제하고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올라 정도전과  같이 고려 공민왕을 폐하고 이 태조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됐다.
경제에 밝아 고려 말에는 전제개혁안(田制改革案)을 발표했고, 이조 때의 토지제도도 조준에 의해 정비되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평리(評理)로 승진되어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고 정종 때는 8년간 수상을 지내고, 태종 때는 좌정승, 영의정 부사에 올랐다.  위의 두 분은 같은 시대의 인물이나 포은(圃隱)은 고려 충신이요, 송당(松 堂)은 두 나라를 섬긴 신하로도 유명하다. 
이 두 분께서는 강씨문중과 아주 밀접한 시를 남겼기로 여기 소개한다.

 - 조준의 글을 청남 강형채(姜炯埰)가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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