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자료는 이사무의 Soft한 해군사(http://home.paran.com/grim1980/)에서 퍼온자료임을 밝힙니다.
1.프롤로그 - 독일해군의 재생
1차대전 패전은 사실상 독일해군에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영광의 대해함대(Hochsee Flotte)는 스카파플로에서 모두 자침하였고, 나머지 살아남은 함선들은 연합국에 배상함으로 넘겨져 폭격실험 대상이 되거나 고철로 해체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해군 그 자체에도 패배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패전후 맺어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해군은 구형전함을 비롯해 20척 전후의 함선만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제한조치에 발목을 잡혀야만 했습니다. 이제는 전처럼 대해함대를 이끌고 당당한 해상 결전을 벌여본다는 것은 한마디로 꿈같은 일이 돼버리고만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와중에도 한편에서는 장래를 위해 독일해군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34년에 독일 해군성은 크루프사에 15인치 및 8인치 포와 그에 맞는 두 형태의 포탑 제조를 위한 계약을 맺었는데, 이것이 장래의 비스마르크급 전함과 히퍼급 중순양함 계획을 위한 첫 시작이었습니다. 뒤이어 1935년 6월 18일에 영-독 해군협정이 체결되면서 독일 해군은 이제 정식으로 영국 해군의 35%에 달하는 함의 보유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신생 독일 대양함대가 드디어 시작되려 하고있었던 것입니다.

[프린츠 오이겐의 진수식]
영-독 해군협정에 따라, 독일은 중순양함 분야에서 영국 해군의 146,800톤에 대해 합계 51,380톤의 한도 내에서 중순양함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워싱턴 조약의 제한에 따른 최대 무장 8인치, 기준배수량 1만톤 이내의 중순양함을 5척 정도 건조할 수 있게된 것입니다. 1935년 7월 9일 독일 정부는 2척의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6,000톤의 배수량과 11인치의 주포를 갖춘), 16척의 구축함과 28척의 잠수함, 그리고 2척의 중순양함을 포함한 건함계획을 발표했습니다. 2척의 중순양함은 앞서 1934년부터 해군성과 크루프사에 의해 진행되오던 일련의 계획에 따라 설계되었는데, 최초에는 단순히 넘버 G와 H라 불리다가 후에 정식으로 히퍼(A.Hipper)와 블뤼허(Blucher)라는 함명을 부여받았습니다. 히퍼는 1935년에 기공되어 1937년 2월 6일에 진수되었고 자매함 블뤼허는 1936년에 시작되어 1937년 6월 8일에 진수되었습니다.
2. 탄생과 활약
1936년 가을, 크루프 게르마니아 조선소는 세 번째 중순양함 (넘버J)의 건조에 착수하여 1938년 8월 22일에 진수식을 거행했습니다. 진수된 함은 본래는 오스트리아 해군제독의 이름을 이어받아 테게토프(Tegetthof)라고 명명될 예정이었지만, 독일의 우방국인 이탈리아가 느낄 불쾌감을 고려하여 대신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이라는 이름이 선택됐습니다.
(*주 : 이탈리아 해군은 1866년의 리사 해전에서, 테게토프 제독이 이끄는 소수의 오스트리아 함대에 크게 패배하여 말 그대로 "망신"을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순조롭게 건조되는 것처럼 보이던 프린츠 오이겐의 운명도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쟁 직전인 1939년 8월에 "이미 개전이 코앞인데도 히퍼급 중순양함 3∼5번 함은 완공되기까지 까마득한 시간이 걸리므로, 차라리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에 매각하여 양국간에 우호를 다지는데 쓰자"라는 제안이 나왔던 것이죠. 8월경부터 연말까지 다양한 교섭이 오고갔으며 한때는 프린츠 오이겐의 운명도 위태로워질 뻔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히틀러가 여기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열렸습니다. 히틀러는 장래에 소련을 침공할 마음을 갖고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해군력이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결국 4번함인 뤼초프(Lutzow)만을 매각하라고 지시했던거죠.

[좌 : 프린츠 오이겐의 취역식 / 우 : 프린츠 오이겐에서 본 비스마르크]
드디어 1940년 8월 1일에 프린츠 오이겐은 오랜 고난을 견뎌내고 정식으로 취역해서 훈련에 들어갑니다. 훈련 도중 기뢰에 접촉하여 손상을 받는 등 어려움도 많았지만 다음해인 1941년 5월에는 같은 신조함인 비스마르크와 함께 팀을 짜서 정식으로 대서양 방면의 통상파괴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대서양 항해 중이던 5월 24일,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양함의 대서양 방면 출항 소식을 접하고 급히 출격한 영국의 순양전함 후드와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교전하게됩니다. 독일측은 최초에 후드를 향하여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프린츠 오이겐은 이 교전의 첫번째 명중을 기록했고, 다음의 5번은 비스마르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영국측은 처음엔 프린츠 오이겐을 비스마르크로 착각해서 그쪽에 포화를 집중시키다가 나중에야 실수를 깨닫고 허겁지겁 목표를 수정합니다.

사족입니다만,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은 멀리서 보면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2연장 포탑을 전후 2문씩 배치한 것이나, 연돌을 1개로 단일화한 점, 독일 대형함 특유의 우람한 상부 구조물 등 여러 면에서 닮아 있는데 아마도 1934년부터 동시에 계획이 진행되었다는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하튼, 교전이 시작된지 얼마 후 탄약고 유폭으로 후드가 격침됐고, 이후 P.웨일즈에 포화가 집중되는 바람에 P.웨일즈는 황급히 전장을 이탈했습니다. 첫 교전은 이렇게 독일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비스마르크는 P.웨일즈와의 교전에서 연료탱크를 손상당해서 통상파괴 임무를 속행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함대 사령관 뤼첸스 제독은 비스마르크를 프랑스의 브레스트 항으로 회항시키기로 마음먹고, 프린츠 오이겐에게는 비스마르크와 분리하여 대서양에서 통상파괴 임무를 계속할 것을 지시합니다.

[좌 : 브레스트 입항 / 우 : 브레스트 항에서 계류중에 위장을 한 모습]
5월 26일, 프린츠 오이겐은 보급선 Spichern으로부터 연료를 공급받은 후 29일까지 대서양을 초계했지만 상선이라곤 한척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프린츠 오이겐은 프랑스로 회항하여 1941년 6월 1일에 브레스트 항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들은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무사히 브레스트로 회항했을 것으로 생각했던 비스마르크는 영국함대와 교전 끝에 침몰했다는 것이었죠. 비록 통상파괴에서는 소득이 없었지만 프린츠 오이겐은 첫 항해에서 영국이 자랑하던 후드를 격침시키고 신예전함 P.웨일즈에 손상을 입혔다는 대전과를 올린 것이었고, 승무원 누구나 "돌아가면 반드시 비스마르크의 승무원들과 함께 다같이 승리를 기념하는 파티가 열릴 것이다"라고 들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무참한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한때의 기쁨은 사라지고 함내에는 순식간에 함장부터 말단수병에 이르기까지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습니다.
1941년 동안에 프린츠 오이겐은 샤른호르스트 및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내내 브레스트 항에 계류되어 있었으며 그동안 영국 공군의 정기 폭격으로 가벼운 손상을 입고 약간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는 그의 수상함대가 이토록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참지 못했고, 결국 1942년 1월 12일에 전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와 프린츠 오이겐에게 도버해협을 돌파하여 노르웨이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죠.

[도버해협 돌파 작전중의 프린츠 오이겐]
그리하여 1942년 2월 11일 23시 45분에 독일 함대는 브레스트를 출항했습니다. 항해 도중 영국 공군에 발각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독일 전투기대의 호위가 이뤄졌던 것과 발각시점이 일몰시각에 가까워 항공기가 오랫동안 활동할 수 없었던 점도 있어서 그럭저럭 무사히 항해할 수 있었습니다. 피해는 오히려 항공기보다도 기뢰에 의한 경우가 더 심해서, 샤른호르스트는 2차례나 기뢰를 건드린 탓에 거의 침몰직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항해에서 프린츠 오이겐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고 2월 13일에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엘베강 하구에 도착했습니다.

[함미에 맞은 어뢰로 인해 키와 함미부를 상실함]
이후 프린츠 오이겐은 장갑함 셰어와 팀을 이뤄 북해 및 노르웨이 방면에서 초계임무에 종사하도록 조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임무를 맞게돼 숨을 돌린 것도 잠시뿐, 프린츠 오이겐에게 또다시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1942년 2월 23일에 프린츠 오이겐은 드론트헤임 피요르드 앞바다에서 영국 잠수함 트라이덴트(Trident)의 어뢰를 맞았고, 그 결과 후부구역 일부와 그 밑의 방향타가 떨어져나가서 임시 방향타를 달지 않고선 항해가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게된 것입니다. 프린츠 오이겐은 임시로 근처의 항구에 수용되었다가 5월 16일경에 킬 군항으로 옮겨져서, 10월까지 또다시 부두에 계류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943년에 들어서 다시 노르웨이 방면에서 활동하던 프린츠 오이겐은 동부전선의 전황이 급박해짐에 따라 발트해 방면으로 전속됩니다. 1944년 8월 20일에는 장갑합 뤼초프 및 구축함 전대와 팀을 짜서 리가 만을 포격하기도 했으며, 9월 15일에는 핀란드의 항복 때문에 랩랜드 방면군이 철수해오는 것을 호위하였고, 10월 15일 경에는 메멜 근처에서 육군을 위해 포격 지원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상 : 라이프치히와 충돌한 직후 / 좌 : 손상을 입은 프린츠 오이겐의 함수 / 우 : 라이프치히의 심각한 손상]
이처럼 프린츠 오이겐은 발트해로 전속하면서 대서양 시절보다 훨씬 더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부두에 계류되어 한없이 출진할 날만을 기다릴 때보다는 더 행복했다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프린츠 오이겐에게 편할 날은 없었는지 또다시 사고가 찾아왔습니다. 10월 15일 육상지원을 마치고 후퇴하던 중, 프린츠 오이겐은 경순양함 라이프치히를 들이받고 만 것입니다. 두 배는 서로 연결하여 14시간이나 버티고 있다가 예인선이 도착하고 나서야 다시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린츠 오이겐 자체도 피해를 입었지만 라이프치히의 경우는 이 일로 인해 자력 항해가 완전히 불가능해졌고 결국 라이프치히는 전쟁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하에서 제대로 된 수리도 받지 못한채 고텐하펜 항의 부두에 계류되어 있다가 항구에 소련군이 밀려들자 자침해버리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수리가 완료된 후에 그녀는 육군의 철수를 돕거나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에서 소련군으로부터 탈출하고 있던 난민을 원조하는 등의 임무에 종사했습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남아있던 대형함들이 잇따라 공습을 받아 침몰하거나 자침하던 상황에서 프린츠 오이겐은 유일하게 상처없이 행동가능한 최후의 대형함이었으나, 5월경에 프린츠 오이겐은 경순양함 뉘른베르크와 함께 코펜하겐으로 향했고 거기에서 종전을 맞았습니다.
프린츠 오이겐은 적함을 격침시킨 전과도 없으며 대전기간 동안 여러 차례 불운한 일들을 겪었습니다만, 다른 함선들에 비하면 특별히 불행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전쟁 말기에는 오히려 다른 함선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무사했던 「행운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좋은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다고 하던가요? 프린츠 오이겐은 특별한 행운 때문에, 혹은 유달리 악운에 강했기 때문에 살아서 종전을 맞을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 그녀의 앞에 닥쳐올 운명은 그렇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게 할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3. 잔혹한 운명 - 비키니의 핵실험

[1945년 5월경 무장해제를 위해 포탄들을 하역중]
1945년 5월 9일, 프린츠 오이겐은 영국의 통제하에 놓이고, 5월 27일에는 영국함의 감시아래 뉘른베르크와 함께 빌헬름스하펜으로 옮겨집니다. 그후 한동안 할 일 없이 부두에 계류돼 있다가 12월 13일에 다시 미국의 통제하로 이관되어 베저뮌데로 옮겨져서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하게 되었습니다.
한달 후인 1946년 1월 13일, 드디어 프린츠 오이겐을 미국의 보스턴으로 이동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오게 됩니다. 종전 이후에도 함의 승무원들은 사실상 함과 함께 억류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독일의 항구를 전전하다 이제는 미국에까지 끌려간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 승무원들이 많았습니다만, 일부 대담한 승무원들은 어차피 포로 수용소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전쟁 때처럼 내내 부두에 계류된 상태로 죽치고 있는 것보다는 통제된 상태라 하더라도 아직 자력으로 함을 운영할 수 있고 다시 항해에 나설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좌 : 보스턴항 도착후 하선하는 승조원들의 점호 장면 / 우 : 테스트를 위해 1번 주포를 제거함]
그리하여 1946년 1월 22일에 프린츠 오이겐은 미국 동부의 보스턴 항에 도착했고 여기서 절반 정도의 승무원을 하선시키고 대신 미국인 승무원을 태웠습니다. 승자와 패자의 기묘한 동거라면 뭔가 충돌이라도 일어날 법하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독일인과 미국인 승무원들 사이에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 별도의 테스트를 위해 1번 포탑의 8인치 포 2문이 제거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항해에 나선 프린츠 오이겐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여 미국 서부의 샌디에이고에 기항하여 이곳에서 나머지 독일인 승무원들을 모두 하선시키고 순수히 미국인 승무원만으로 항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프린츠 오이겐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그녀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태평양의 마셜 군도 인근의 비키니 환초였습니다.

[좌 : 파나마 운하를 통과한 직후 / 우 : 마침내 비키니 환초에 도착함]
1945년 7월 16일, 프린츠 오이겐이 종전을 맞은지 얼마 안될 때쯤, 미국 중부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2개의 폭탄은 전쟁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버렸습니다. 역사이래 인류가 갖게된 가장 무서운 병기, 이 궁극의 무기의 굉장한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해상의 함선에 대한 원자 폭탄의 효과를 차례로 검증하기 위해서 미국은 마셜 군도의 비키니 환초에서 일련의 핵실험을 계획했습니다.
이 실험의 주된 목적은,
① 핵시대에 있어서 함선의 디자인
② 해상에서의 전술상 최적의 진형형성
③ 해군 기지와 수리 도크의 적절한 수와 위치 등의 가능한 변화
...에 관한 자료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 부차적인 목적으로는 항공기에서 투하한 원자 폭탄의 효과, 항공기 디자인 변경의 필요성 여부, 가지각색의 무기와 장비 및 생물에 대한 원자폭탄의 효과, 원자폭탄의 폭발에 수반하는 과학적인 현상에 관한 정보 등을 수집하는 것 등이 있었죠.
원래, 비키니의 핵실험(오퍼레이션 크로스로드)은 3번의 핵폭발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① 「Able」 Test - 공중 폭발실험
② 「Baker」 Test - 얕은 수중에서의 폭발
③ 「Charlie」 Test - 깊은 수중에서의 폭발
첫번째 실험은 1945년 5월 15일로 예정되었지만, 3월 23일에 트루먼 대통령이 의회측 인사들의 참석을 위해 7월 1일로 첫번째 실험의 날짜를 연기했습니다. 한편 비키니 환초에 도착한 프린츠 오이겐은 작업 그룹 1.2.1에 속하게 되었는데, 거기엔 5척의 전함과 4척의 순양함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6월 동안 핵실험에 대한 준비가 서서히 완료되었고 모든 표적함은 계획대로 정위치에 정박되었습니다. B-29 폭격기의 표적이 될 전함 네바다는 표적함대 정 중앙에 정박되었고 폭격기의 승무원들이 관측하기 쉽도록 오렌지색으로 칠해졌습니다. 그리고 또한 각종 계측장비들이 설치 완료되었고, 점검되었으며 다수의 사전 연습이 개최되었습니다. 최종적인 사전 연습은 6월 24일에 개최되었는데, 더미 폭탄 (500파운드 통상폭탄)은 오전 9시 14분에 투하되어 성공적으로 폭발했습니다.
1) 1946년 7월 1일 : 「Able Day」
A실험 당일, 표적함대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릴 육군의 B-29가 오전 5시 55분에 퀘제린 환초의 활주로에서 이륙했습니다. 약 3시간 후 B-29는 시속 480km로 비행하여 표적으로부터 10,000m 상공에 도달한 다음 원자 폭탄 (나가사키에서 쓰인 Fat Man타입)을 투하했고, 48.1초 후 폭탄은 표적함대 위에서 폭발했습니다.

당시 실험의 기술 보고서에 따르면 :
「B-29로부터 투하된 폭탄은 수면위로부터 170m 상공에서 현지시각 오전 9시에 폭발했다. 기온은 30.0 C, 상대습도는 68%였으며 풍속은 약 11노트였다. 폭발은 최초 2초 내에 불타는 공 모양으로 성장했고, 그 다음 응축 구름에 의해 가려졌다. 이것은 4초 이후 얇아지기 시작하고, 15초 후 완전하게 지나갔다. 구름은 최초 1분 동안 4,000m까지 올라갔다가 7분 이후에는 정상이 13,000m의 높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구름은 폭발 후 약 1시간 동안 시각적으로 확인될 수 있었다.」
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폭탄의 힘의 견적을 요약했다 :
「폭발에 의해 발생한 에너지 양은 나가사키 타입의 원자 폭탄으로는 정상적이었다. 합계 8.0×10∼20 ergs의 에너지가 방출되었는데, 이는 19.1킬로톤(=19,000톤)의 TNT를 폭발시킬 때에 방출되는 총 에너지 양과 동등한 것이다.」
A실험의 실제 시행에서는 한가지 실수가 있었는데, 폭탄이 배열의 중앙에 있었던 표적(오렌지 색으로 칠해진 전함 네바다)을 놓치고 약 640m를 벗어나서 폭발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원폭의 폭발 직후에, 작업 그룹의 인원은 손해를 평가하기 위해 표적 구역에 들어갈 준비를 했습니다. 승선 팀과 해난 구조 그룹은 폭발 후 4시간 내에 이동을 시작하고, 방사능과 기타 다른 안전 조건이 허용치 이내로 떨어지자 표적함에 접근하여 해난 구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시 30분까지 작업 팀들은 18척의 표적함에 승선하여 청소를 마무리했습니다.

[폭발 직후의 표적함대. 폭발의 충격으로 침수와 중유 유출이 시작됨]
프린츠 오이겐은 폭발 중심(폭심)으로부터 상대적으로 343도 방향에 1,100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정박해있었고, 실질적으로 그다지 손상을 받지 않았습니다. 단지 전방부 마스트가 쪼개지고 거리 측정기의 지붕이 검게 그을렸으며 함체에 칠해진 페인트가 벗겨진 정도였다고 합니다. 프린츠 오이겐이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폭발범위 내에서 적절한 위치에 정박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린츠 오이겐과 폭심 사이에는 수송함 2척이 정박해있었기 때문에 두 함이 폭심 방향으로부터의 돌풍을 막아주었던 것이죠.
수송함중 1척은 폭심으로부터 겨우 45m 정도 떨어져 있었으며 폭발이 있은지 1분 이내에 가라앉았고, 540m 떨어져 있었던 다른 한척은 「군사적 효용성 측면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었으며 함체에 대규모적인 수리 없이는 수송함으로써 가동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손실 보고서에 따르면, 프린츠 오이겐은 Able Day 당일 18시에 해난 구조 그룹에 의해 가이거 계수기로 검사되었고 다음날 (7월 2일) 13시에 다시 점검한 결과 특별한 방사능 오염은 없다고 판명되었습니다.

[Baker 실험 당시의 함선 배치도]
Able Day에 폭탄이 잘못 투하된 것이 함선의 침몰과 피해에 대해 계획에서 어긋난 부정확한 결과를 초래했으므로, Baker 실험을 위해서는 표적함의 배열이 다시 고려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요한 수정은 A실험에서 가라앉은 함선의 위치에 대신 놓여질 배를 찾는 것, A실험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은 함선과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한 함의 자리를 바꾸는 것과 폭심으로부터 각 함선들이 놓이는 거리 및 각도 등을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정 결과, 프린츠 오이겐은 A실험 때보다 폭심으로부터 거의 2배의 거리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2) 1946년 7월 25일 : 「Baker Day」
폭탄은 바지선 LSM-60에 실려 수심 30m에 설치됐고 오전 8시 35분(Mike Hour)에 폭발했습니다. 수중에서의 핵폭발은 주변의 물의 엄청난 충격을 일으키고 인근 바다에 몇 십년은 갈 무시무시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습니다.

기술 보고서에 따르면 :
「폭탄 B는 1946년 7월 25일 8시 35분(현지 시간)에 비키니 환초의 수중 30m에서 폭발했다. 기온은 30.0 C, 상대 습도는 73%였으며, 풍속은 약 7노트였다. 방출된 에너지 양은 나가사키 타입의 원자 폭탄으로는 정상적이었으며, 에너지의 합계는 약 8.5×10∼20 ergs였다. 그것은 20.3킬로톤(=20,300톤)의 TNT를 폭발시킬 때에 방출되는 총 에너지 양과 같다. 수중의 핵폭발은 주위의 물에 무거운 충격을 일으키고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또 다른 공식 보고서는 다음 Baker 실험 세부사항을 이야기했다 :
「폭발로 인해 일어난 파도는 폭심으로부터 300m 거리에서 최대 34m의 높이였고, 4,000m 거리에서는 약 3m의 높이를 가졌다. 첫번째 파도는 시속 45노트(약 90km)의 속도로 덮쳐왔는데, 파도는 단지 폭발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의 1퍼센트 미만만을 드러냈다. 환초 바닥에 생성된 분화구는 깊이 8m였고, 폭발은 대기중 방사능과 지각 충격에 의해 아주 먼 거리 (예를 들면, 북미대륙)에서도 미미하게나마 측정될 수 있었다.」

한편 B실험의 방사능에 관한 보고서는 말하길 :
「표적함에 잔류한 방사능은 B실험 이후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달이 지나더라도 그것에 승선하는 사람에게 충분히 심각한 위험을 줄 수 있다. 오염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은 다양한 정도의 성과을 이뤘는데, 가장 쉬운 노력(느슨한 물질을 씻어내는 것을 포함하여)은 40%까지 방사능을 줄일 수 있었지만 이후의 노력은 더 작은 성과만을 거뒀다.」

[폭발후 표적함을 청소하는 수병들. 이들 대부분은 후에 심각한 피폭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B실험에서 프린츠 오이겐의 함수는 폭심에서 309도 방향으로 1800m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거리는 이 배가 비교적 손상을 받지 않게 하는데 충분했는데, 대조적으로 폭심으로부터 230m 밖에 떨어져있지 않던 전함 아칸소는 폭발후 2∼3 초 이내에 물보라와 증기에 가리워진 채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거대한 망치와도 같은 아래로부터의 엄청난 수압에 눌려 삽시간에 부숴져 버렸던 것입니다. 한편 폭탄을 싣고있던 LSM-60 역시 폭발 시에 붕괴됐는데, 파편은 대열의 몇 개 구역에 산산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실험 종결후 프린츠 오이겐을 대량의 물로 씻어내고 있다]
폭발 후 손실 보고서에 따르면 프린츠 오이겐은 해난 구조 그룹의 배가 8일 후(8월 2일)에 그녀를 고압의 물로 씻어내리기 시작했을 때까지 조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술감독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프린츠 오이겐이 입은 피해는 「군사적 효용성 측면에서 피해가 없거나 미미한」 정도였지만, 그와 동시에 그 보고서는 방향타 베어링과 배관 부분에서 「심각하게 침수가 시작되고 있다」고도 쓰고 있었습니다.
작업 그룹의 전문가들은 Charlie Test를 대비하여 8월 12일까지 표적함의 구난 작업과 세밀한 조사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C실험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9월경에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즉, C실험을 위한 사전 계획은 적어도 300∼700m의 깊은 수중 폭발을 상정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이었고 무엇보다 C실험에서 함선이 겪을 피해는 B실험에서 얻게 된 손실 자료의 정확성 때문에 계산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Charlie 실험에 대한 준비는 2일 후에 실험 사령부에 의해서 형식상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
살아남은 배 자체와 비키니 환초의 방사능 오염을 고려하여, 8월말에는 다시 승무원이 탈 수 없을 정도로 오염이 심하거나 물리적 파손이 심한 모든 배를 폐선시키기로 결정하고 그들을 모두 퀘제린 환초로 이송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동은 9월초에는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4. 프린츠 오이겐의 최후
퀘제린에 이송된 후, 1946년 12월 21일에 불완전한 밸브 때문에 갑자기 프린츠 오이겐의 후부 구역이 침수되기 시작했습니다. 함이 남쪽 출구에 가라앉아서 항로를 차단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환초의 책임자는 프린츠 오이겐을 남쪽의 에누부즈 섬으로 끌어다가 좌초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남아있던 유일한 해난 구조선이 얼마간 배를 끌어낼 수는 있었지만 피해 통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밤 동안 프린츠 오이겐은 우현으로 35도 이상 기울고 북풍에 의해 몰리면서 결국 암초에 걸린 후 전복해버렸습니다.

[전복되어버린 프린츠 오이겐]
프린츠 오이겐은 에누부즈 섬으로부터 약 156도의 방향으로 65m 정도 떨어진 수심 21m 지점에 가라앉았습니다. 그녀의 바닥, 선미, 방향타, 그리고 좌현 중앙부 스크류는 수면위로 노출되었고, 함수부 상갑판의 가장자리에서 수심은 36m였습니다. 가라앉은 프린츠 오이겐은 폐함 잔해의 가치를 알고 있던 모든 섬주민들을 유혹했으며, 1973년 말에는 해체 및 매각을 위해 잔해를 태평양 신탁 통치 제도의 신탁 통치령으로 옮기자는 청원서가 해군장관에게 제출되었습니다.
잔해의 주인으로서 미 해군은 배의 방사능 오염상태와 특별한 위험의 수위를 결정하기 위해 조사를 실시하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방사능 수치는 그다지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만약 잔해를 고철 시장에 내보내려면 저 레벨의 방사능조차도 용인될 수 없었습니다. 한층 더, 기존의 군함 시절에 라듐 등의 방사능 물질을 포함하는 장치를 사용했는지 여부도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잔해에서 라듐이 방출되고 있다면, 스크랩 처리를 해서 고철로 매각한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우선 프린츠 오이겐의 잔해로부터 라듐을 깨끗이 제거해야만 할테니까 그것도 참 큰 문제였죠.
조사작업은 1974년 4월초에 진주만으로부터 항구 정리 그룹이 파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조사기간 동안 좌현 부위 함체에 대규모의 피해가 (기관실 부근 현측장갑이 깨지고 상갑판으로부터 현측장갑에 걸쳐 수직&수평으로 여러 군데 금이 가있었다)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피해가 한번에 16m 이상에 걸치는 곳도 있는데다 13개의 주된 방수구획 중의 2개는 인양도중 명백히 심각한 침수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볼 때는 어떻게든 잔해를 바로 세우고 펌프로 물을 빼내 부력을 회복시켜서 인양할 수는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전혀 이득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먼 곳에서 배를 인양해서 적당한 해체장소까지 끌고가는데 드는 비용이 배 자체의 고철 가치보다 훨씬 더 많이 들었던 것이죠. 결국 프린츠 오이겐을 인양하여 고철로 해체한다는 계획은 백지화되고, 배는 다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