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기적 사이에 있는 사랑의 노래
-남호섭 청소년 시집 『이제 호랑이가 온다』 (창비, 2022)
유하정
상처는 만져야 덧나지 않는다
문학을 알수록 사람다워진다고 믿는다.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석진 곳들을 응시해야 하고 진실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대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면밀히 들여다보는 일을 기꺼이 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나쁜 어른들은 문학을 멀리하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문학에 대한 기능 따위를 새삼 떠올린 이유는 청소년 시집이 지닌 어정쩡한 위치 때문이다. 동시와 성인 시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나 자리를 잡은 것인지 잡을 것인지 갈수록 방향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고민한 적이 있다. 청소년 시집이란 타이틀을 달고 출간이 되어도 그런 장르의 존재 유무조차 알지 못하는 독자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오죽하면 대형 서점에서 청소년 시집을 청소년 소설 코너에 배치했을까. 여러모로 아직도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다. 하기야 시란 장르가 모호성의 대표적 갈래인 것을 굳이 따지고 들 필요가 있겠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호랑이가 온다』에서는 청소년 시집의 새로운 별자리를 만난 듯 하다. 오랜 시간 바늘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듯 시를 음미하다 보면 나태해진 감정들이 숨을 고르고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숲을 돌며 이야기를 읽고 듣다가 이야기 밖으로 날아가는 멧비둘기와(「봄 숲」) 지리산 불일폭포를 뛰어내리는 어린 물방울 형제(「먼 길」)처럼 ‘되돌아올 수 없는 먼길’을 떠난다. 시마다 재현된 현재의 사건과 장면은 시의 언어이지만 시대의 보고서 같기도 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의 파장이 넓다. 상처는 봉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져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시인의 목소리가 낮게 들리는 것도 같다.
2. 사라진 것들을 호명하면 일어나는 일
시를 읽다가 다시 되돌려 읽었다. 뒷장을 넘기다가 또 멈칫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사건일 일어난 뒤에 어떻게 되었던가. 사회적 문제는 개인의 문제다. 수전 손택은 “태어나는 모든 이들은 이중의 시민권을 갖는다. 건강한 이들의 왕국에서 하나, 병든 이들의 왕국에서 하나.”라고 하면서(『은유로의 질병』)적어도 얼마 동안은 이중의 시민권 사이에 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고 했다. 건강한 것은 무엇이든 좋다. 문제는 병든 이들의 왕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직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전에 사라져 간 생명들과 부당한 사회에 맞서야만 하는 어른들이 해결하지 못한 일을 나열하기도 벅차다. 이 시집은 그런 벅찬 슬픔을 겪는 사람들을 호명한다. 십 년을 싸우고도 버젓이 마을에 세워진 송전탑 밑에 살 수밖에 없었던 할배와 할매들의 삶은(「탑 밑에 사는 할배」) 아무죄 없이 죽어가던 세월호 아이들을 기억하도록 만든다. 슬픈 일들은 왜 이토록 긴밀한가. 비가 오는 날이면 송전탑을 내려치던 짐승같던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시의 언어로 투명한 지느러미를 움직여본다. 끝이 없는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일이 시의 일이라서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움직임만으로도 위안이 되기도 하니까.
고속 도로 휴게소
장애인 주차장에 조그마한 승용차
미끄러져 들어와 섭니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온
머리 희끗한 남자가 휴게소 층계 앞
보관함에서 휠체어를 꺼냅니다.
승용차 뒷문 앞으로 밀고 가
몸을 쑥 밀어 넣고
다 큰 언니를 가슴에 끌어안고 나옵니다
휠체어에 앉히고
화장실을 올라가는 오르막을
힘겹게 밀고 갑니다
같은 차에서 내린 여자가
여자 화장실 앞에서 휠체어 넘겨받아
안으로 들어갑니다.
남자는 여자 화장실 앞에서 기다립니다
누구는 구운 감자 한 접시
다 먹을 동안
누구는 호두과자 한 봉지
다 비울 동안
기다립니다.
-「기다립니다」 전문
위 시는 누군가 보통의 시간을 보내는 마지막 6, 7 연과 혼자서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불편한 ‘다 큰 언니’에게 시선을 둔 1연에서 5연까지가 대비된다. 시인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기다리는 행동을 얼마나 반복했을지 모를 ‘남자’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기다리는 행위와 사랑은 떼어놓은 채로 완성되지 못한다. 위 시에 등장하는 남자도 오르막을 지나 화장실 앞에 서 있다. 휠체어를 탄 사람 뿐만 아니라 휠체어를 밀고 나가야 하고 기다려야 하는 사람에게도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아마도 기다림의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선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같음이나 다름, 동일성과 이타성처럼 이분법적인 패러다임이 아니다. 보통의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구운 감자 한 접시와 호두과자 한 봉지를 다 비울 동안 ‘기다린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다림은 시간의 흐름을 무던히 견뎌야 하는 일이다. 수 많은 기다림은 사랑을 내포한다. 호들갑스럽지 않다.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하다. 그 평온함 속에 희생과 침묵이 있다. 침묵을 향해 묵묵히 가는 길의 더께가 굳은 살을 만들어 주길 바라게 된다. 우리는 그의 굳은 살이 되어 주지 못할테니까.
기다리는 일은 어떤 이에게는 영원 같은 시간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혹은 문득 슬픈 날이 생각난 이들)은 유독 4시 30분 무렵 눈이 떠질 때가 많다고 한다.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고 해는 아직 어둑하기 때문에 그대로 누워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사랑의 대상을 그린다. 기다리는 일은 시집 전체의 정서이기도 하다. 옐로스톤에서 데려온 늑대가 하늘의 독수리까지 불러들이지만(「늑대가 돌아오면」) 우리는 또 다른 늑대를 기다려야 하고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던 호랑이를 기다려야 한다(「망명1」). 일제 때 탄광 노동자로 끌려갔던 우리나라 사람 수만 명을 기다려야 하고 오호츠크해에서 성장한다는 한국계 귀신고래를 기다려야 한다.(「망명2」) 새끼를 품은 길고양이의 침묵을 기다려야 하고(「지붕3」), 할머니가 뒤란에 옮겨 심은 도라지꽃을 기다려야 한다(「도라지꽃」). 다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있어도 꼭 가야만 하는 길이 있어(「길」) 마음이 아파서 울면서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다른 길이 사랑이길 바라는 벵골 호랑이의 마음으로(「사랑」) ‘너른 영토 버리고/용맹도 다 버리고/제 발로 창살에 갇히고 싶은/호랑이를 위해’ ‘작은 비상구’가 열리기라도 하면 좋겠다.
3. 느릿느릿한 지구인의 벌레 건지기
「나는 느리다」에서 화자는 ‘말도 느리고/걸음도 느리고/생각도’ 느린 지구인이며 옥수수를 꼭 꼭 씹어 먹는 한 마리 벌레처럼 작은 존재라고 표기한다. 학생들의 실수를(「전설1」,(「전설2」) 오랜 동안 안아주며 위트있는 말로 웃어넘긴다. 『이제 호랑이가 온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를 면밀히 묘사하였다. 그런 묘사들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자주 울컥하고 가끔 멈칫하여 읽게 된다. 직접적인 비유가 제시되지 않아도 충분히 시적이다. 시적 언어란 사랑의 언어이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변용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유하정 jong4521@hanmail.net
2013년 《어린이와 문학》을 통해 등단. 동시집 『얼룩말 마법사』, 『구름 배꼽』, 시 그림책 『또또나무』와 동화책 『열두 살의 데이터(공저)』, 『슬이는 돌아올거래(공저)』를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