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시에 바란다>
자신 있는 사람이 바꾼다
김종헌
가장 듣기 싫었던 말
동시평론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고 그래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동심으로…, 어쩌다가 보니 당선되어…’ 등의 말이었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윤동주도 정지용도 동시를 썼다면서 유명 시인의 동시 창작 경력을 들먹이는 것이었다. 전자에서는 작가의 안일한 시작(詩作) 태도가 엿보이고 후자에서는 대가의 명성에 동시인의 지위를 얹어 스스로 위로받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시의 예술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문학적 치열함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콤플렉스를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으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동시에 대한 이러한 안일한 태도는 작가의 동심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진공의 공간에서 해석하는 작가의 주관적 동심이다. 순수함과 천진난만함 그리고 밝고 맑음의 관념적 동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태도이다. 둘째는 어른작가가 어린이독자를 의식하는 강박감이다. 애정과 집착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심 팬덤(fandom)현상에 도취되어 있다. 1세대 동시인은 소년문사로 출발하여 기성 시인으로 인정받았고, 2세대 동시인 대부분은 교사 출신으로 어린이 글짓기 교육을 병행하면서 한국 현대 동시문학을 이끌었다. 이런 영향으로 동시의 주된 정서는 교훈성과 모성을 기반으로 훈육과 계몽, 그리고 공동체 질서에 순응하는 순수함이 점철된 동심으로 획일화 되었다. 즉 동심은 어른 작가의 주관적 인식에 의한 사회적 산물이 되었다. 이런 탓에 동심은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어린이의 마음으로 이해되고, 이를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감은 동시의 예술성 시비를 낳았다.
2000년대 들어서 ‘해묵은 동시를 던져버리자’는 김이구의 주장 이후에 동시는 그 형식의 변화로 낡은 감각을 덮어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시적 대상이기도 하면서 독자인 어린이를 보는 작가의 경도된 시각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해묵은’ 관습을 ‘말놀이’의 재미로 응답한 담론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동시의 시적 승화를 기대하는 것은 결국 독자인 어린이에 대한 인식의 정도(적절한 거리두기)와 그에 따른 시어 운용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는 창작된 작품을 모든 어린이가 당연히 읽어주고 있을 것이라는 아름다운 착각에 매료되지 않아야하고, 또 동시 감상 능력의 측정을 과학적 연령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오래 된 비평을 들추어보게 한다. 즉 어린이독자의 연령과 감상 능력을 일치시키는 작가의 태도는 비판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린이 인정의 시적 대응
동심으로 대상을 표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동시를 ‘문학’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동(어린이)’에 대한 선험적이고 자의적 판단에서 형성된 ‘동심의 시’로 오해하는 문제를 초래했다. 동심은 동시 창작에 있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지만 또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하다. 여전히 동시 개념은 ‘시’의 정의보다는 ‘어린이를 위한 문학’에 초점이 맞추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시각은 사회적 산물인 동심을 도그마(dogma)처럼 이해하고 또 동심 팬덤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공통된 문법이나 고정적인 원칙처럼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동심의 랑그(Langue)에 갇혀 자유로운 파롤(Parole)을 구사하기 어렵게 만든다.
독자를 의식한 ‘동심’에서 그 답을 찾으려는 시 경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童)의 팬덤에 빠진 시’가 아니라 ‘시로써 동(童)의 정서가 표출된 작품’을 ‘동시’라 하면 좋겠다. 쉽지는 않겠지만, 동시의 문학성을 높일 수 있고 어린이독자를 지나치게 의식한 창작 경향을 줄일 수 있다면 충분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행 초등교과서(2015 개정)에는 이미 ‘시’로 통칭하여 어린이 운문 문학을 다루고 있다. 문학 교육현장에서 주 독자인 어린이를 대상으로 동시를 시로 가르치고 있는데, 굳이 문단에서만 시와 동시를 구분하여 창작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따라서 ‘어린이문학 안에서 시’를 정의하기보다는 ‘시문학에서 어린이의 정체성과 윤리적 진정성이 드러난 작품’을 고르는 것은 어떨까. 이를 위해서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동시의 대상이자 독자인 어린이를 ‘그들만의 세계’로 제한하여 이해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동심에 내재된 ‘보호’의 이미지를 버리고 그들의 생애 특징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정’의 이미지로 바꾸는 것이다. 보호는 신체적이나 정신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누군가가 그렇지 못한 누구의 불행이나 비행을 방지하고 그들이 건강하고 건전하게 지낼 수 있게 돕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하는 교도의 행위를 내포한(혹은 강요한) 용어이다. 어린이보호, 청소년보호, 노약자보호 등에 붙여 사용하는 것에서 보듯이 말이다. 이들 합성어에서 주체가 누구인가. 또 그 대상은 누구인가. 보호라는 말 앞에 오는 명사의 당사자는 그들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일방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보호의 시각으로 어린이를 보면 그들의 생애 특징은 공동체 질서를 배경으로 한 사회·문화적 산물로 획일화 된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 깨달음과 지혜 등의 기의로 그들을 강제하게 된다. 그러나 어린이를 성장하고 있는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공동체 질서 안에서 그들의 영역이 확보된다. 나이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생애 특징 그대로가 그들의 삶과 정서로 이해되며 개별성과 주체성을 얻게 된다. 이는 사회적 산물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을 확보하며 삶의 주체가 되고, 동시문학에서 세계에 대응하는 다양한 시적 화자로 재현될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된다.
다음으로 이러한 어린이 인정 태도는 ‘건강하고 건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그들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나아갈 수 있다. 동시문학에서 어린이를 인정하는 것은 곧 어린이 삶의 윤리적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진정성은 내면의 참된 자아실현을 삶의 가장 큰 미덕으로 삼는다. 이는 공동체가 외적으로 부과하는 도덕이 아니라 주체가 내면의 숙고를 통해서 도달하는 자아의 참된 목소리이다. 그래서 윤리적 진정성은 행위나 실천이 아니라 망설임, 주저, 때로는 실천적 무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신의 내면 목소리를 듣기 전에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윤리적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아는 참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사회적 억압이나 모순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과 태도는 자아와 세계가 변증법적으로 충돌하는 주체를 시적 화자로 세울 수 있게 된다. 이를 구현하는 방법은 시어 활용을 통한 파롤의 자유로움이다.
작가의 능력
문학이 독자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면서 삶의 진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면 ‘국민을 위한’이라는 정치인의 허사를 닮아가는 ‘어린이를 위한’의 외침은 사라져야 한다. 시를 이해하는 것은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어린이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주체가 세계에 대응하는 정서가 드러난 시를 동시로 선택하면 동심 팬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서 이런 화자를 주체로 세우는 것은 작가의 언어 운용 역량에 달려 있다. 시를 이해하는 것은 문자(기호)가 구현하는 언어적 물질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언어의 물질성은 문자가 의미를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힘으로 작동하는 기호적 층위이다. 이것은 문법에 맞게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흩어버림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생성되는 정서이자 심리다. 이렇게 시는 언어의 의미와 관념보다는 그 기표의 물질성을 전면화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문자가 가지는 물질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나타내는 문채라 할 수 있다. 시를 이렇게 단순하게만 정의할 수는 없지만, 이런 문학적 개념으로 동시에 접근하면 동심 도그마를 극복하는 동시의 파롤이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관념적 동심(랑그)에 구속되어 시어를 반복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언어 운용의 역량은 곧 작가의 능력이다.
이 글을 준비하는 동안 때마침 발표된 두 편의 글이 눈에 띄었다. 진주교대 교수 이지호는 ‘시로써 어린이를 위한 것’ 그리고 ‘어린이독자 감동 촉발을 꾀하는 것’을 동시로 규정하였다. 이는 동시가 어른 작가의 자기감정을 표출한 것이 많다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런가 하면 문학평론가 김준현은 ‘어린이 개념으로부터 발생하는 원심력에 대해 탐색해 나가는 과정은 그래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실패를 동반하는 모험이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하면서도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던 이 언어의 갱신을 위해 몸부림치는 힘’이 ‘어린이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저항하는 힘’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동시가 지나치게 독자를 염두에 둔 나머지 사회적 산물이 되어버린 동심에 얽매이는 것을 경계할 것과 문학성의 재고를 위한 언어 활용을 고민하는 목소리로 이해된다.
동시문학이 어린이 흉내 내기나 어른작가의 현관에서 어린이의 뜰을 바라보고 그들의 정서를 반영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공동체의 질서 안에 있는 어린이를 인정하고 그들의 윤리적 진정성을 형상화한 시를 창작하거나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정된 관념으로 획일화되고 사회적 산물이 되어버린 동심을 넘어서 세계를 표현하는 파롤의 자유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동시의 정의를 바꿀 수 있는, 즉 ‘동’을 떼어내는 것은 시인의 자신감이다. 자신 있는 사람만이 바꿀 수 있다. 지난 겨울호(16호)에서 김재복 평론가가 ‘여성 시인이 성숙한 여자아이를 생각하며 쓴 동시’에서 작가와 독자층의 연대 가능성을 본 것처럼, 어린이독자 거리두기와 시어 운용으로 또 다른 연대를 형성해 갔으면 한다.
동시인, 문학평론가,《동시발전소》편집주간. 동시집『뚝심』, 평론집『우리 아동문학의 탐색』,『포스트휴먼 시대 아동문학의 윤리』등. 이재철아동문학평론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