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만난 시집 _서평
자연과 인간의 거리에 대하여
-고영미 동시집 『신문 읽는 지구』(도토리숲, 2024)
김재복
알다시피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거리는 쉴 새 없이 지워졌다. 인간은 지적 호기심만을 넘어 자연을 망설임 없이 퍼가고 없애고 오염시킨다. 그런 행위를 보며 제 몸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온몸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영미 시인의 두 번째 동시집 『신문 읽는 지구』는 환경동시집이란 특별한 부제를 달았듯 인간과 자연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이 하는 일, 자연이 하는 일은 다르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사용가치에 있지 않다는 주장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이 독립적인 개별주체라는 인식, 일방적으로 파괴하거나 함부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된다.
나도
아기란다.
엄마 젖 먹으려고
까치발 들던
엄마 냄새 맡으려고
품에 폭 안기던
땅꼬마 아기란다.
밀렵꾼 총 맞아 엄마 잃고
우는 아기란다.
「아기코끼리의 눈물」 전문
코끼리의 언어를 모른다고 해서 엄마 잃은 아기의 울음을 번역 오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코끼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로서는 시인의 저 번역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밀렵꾼의 욕망과 아기코끼리의 절망은 다 자연(自然)하다. 다만 인간인 우리는 습관적으로 밀렵꾼의 욕망에 무관심한 것으로 동조했거나 인간을 구체적인 자연 동식물과 구별 짓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인간의 소유로만 봐 왔다. 그런 인간 중심적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상상은 그간 수많은 동시와 동화로 표현된 바다.
인간=밀렵꾼=어른의 사고는 아기코끼리의 눈물 같은 동시적 상상으로 깨트려야 하지만 이것은 거대한 바위가 흙이 되는 자연의 풍화 과정만큼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것이 동시 쓰는 시인이 해야 할 일이라면 그걸 할 뿐이다. “아프고 단단한 흙을 고슬고슬 포슬포슬 고와지고 순해지고 둥글어져 땅이 꿈틀”하고 살아날 때까지 “살곰살곰 일하는 지렁이”(「지렁이 의사」)처럼 말이다.
고영미의 동시들은 자연을 위협한 대가가 인간에게 해로운 일로 돌아온다고 위협하거나 경고하지 않는다. 대신 훼손된 자연의 상태를 재현하고 자연이 하는 일을 마주 놓는다. 자연을 훼손하는 게 결국 인간에게 나쁜 결과로 돌아오는 것은 맞지만, 그 순간에도 자연이 아닌 인간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고민했다면 이 역시 인간을 중심에 놓은 것이었으리라.
인간에게 인간의 일이 있다면 자연에는 자연의 일이 있다. 인간이 버린 폐수 때문에 물고기는 허리가 휘고(「텔레비전에 나온 물고기」) 고라니는 제 마을에 달려든 자동차가 느닷없어 도망도 못 가고 숨지도 못하고(「놀라면 정말 놀라면」) 이상기후 영향으로 허둥지둥 과일 등 재배지를 옮겨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힘센 날씨」에서처럼 제법 강경한 자연의 경고를 보여주긴 하나 대체로 그의 작품들은 고발하고 경고하는 대신 자연의 일을 보여주는 쪽이다. 이런 태도 때문에 메시지는 약해질지 모르지만 나는 그쪽의 힘을 더 믿어보기로 한 시인의 선택에 동의한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자연의 현상에도 어쩌면 나름의 질서가 있을지 모른다.
반짝이는 것
아름다운 것
다 있어도
해 달 별 비 눈 구름 노을 무지개 …….
한꺼번에 자랑하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마음 맞는 두엇
꺼내 놓을 뿐
「하늘 주머니」 전문
인간은 지구 생태계 질서 안에서 여타 존재들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받은 구성원이다. 이런 인식을 가질 때에야 지금과 같은 일방적인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생긴다. 생태계 최상위포식자가 된 인간이 마음을 쉽게 돌릴 것 같지는 않다. 생태계 역시 자연한 일이기에 어쩌면 인간과 자연의 거리에 대한 사유는 신념의 영역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기에 ‘훼손된 자연 생태계를 건강한 상태로 되돌린다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경우, 인간과 자연이 함께 잘 살 방법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누군가는 계속해서 던져야 한다. 이번 동시집을 읽으며 자연과 인간의 거리에 관한 생각의 시발점이 된 작품이 「바다거북이 장례식」이다.
코에 꽂힌 빨대
목에 감긴 고무
배에 가득한 쓰레기
실린 몸으로
제주 해안에 와
마지막 숨을 내려놓습니다.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파도가
모래 한 자락 가만히 덮어줍니다.
긴 날개로 눈물 닦던 갈매기
땅과 하늘 오가며 연락합니다.
낮달이 동그란 창으로
바다거북이 들어오라고
가만히 문을 엽니다.
「바다거북이 장례식」 전문
「바다거북이 장례식」은 인간이 버린 생활 쓰레기를 먹고 목숨을 잃은 바다거북이 사체가 해안가에 떠밀려 왔고 거북이와 거북이를 둘러싼 주변 풍경을 그대로 담았다.
고영미가 포착한 바다거북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닌 환경적 재앙으로 인한 타살이다. 바다거북은 인간에 의해 죽어가는 자연물을 대신하는 상징적 죽음이기도 하다. 당시 인간의 죽음도 애도할 시간이 부족한데 바다거북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이 소수의 관심사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우리가 이 동시를 읽는 그 잠깐의 시간을 내는 일만으로도 가치 있는 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이 재현하고 있는 시적 현실에 주목해 보면 이 동시에서 바다거북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에 인간의 자리라거나 역할은 없다. 이 동시의 특별함이 생기는 지점이다.
바다거북의 죽음의 원인 제공자는 인간이다. 플라스틱 빨대, 고무, 각종 쓰레기는 인간이 쓰고 버린 것이다. 그것이 바다거북의 죽음의 원인인데 이 동시에는 원인 규명이나 인간에 대한 원한이 없다. 파도, 모래 한 자락, 갈매기, 낮달이 참여해 땅의 죽음을 하늘로 불러들이는 일체의 장례식에 인간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게 자연의 일이라는 듯, 여태 인간이 자연을 배제하고 대상화했다면 이 동시에서는 역으로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배제되는 존재가 인간이다. 자연으로부터 배제당해 보는 이 마음의 상태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시인일까, 나일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거리를 두고 그들만의 장례식을 참관하는 것이 또한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장례식에 초대받지 못해 죽음을 애도할 권리조차 부여받지 못했으나 그래서 생긴 이 참관의 거리에서 비로소 이 사태를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바다거북은 어디선가 또 태어나고 자랄 것이다. 인간이 무슨 일을 하든 자연은 자연의 일을 할 것이다. 자연은 인간보다 힘이 세다고 나는 확신한다. 인간 중심의 오만한 마음을 구부려 자연의 가치를 깨닫는 것, 인간은 자연 생태계의 한 종으로서 지구 생태계에 깃들어 사는 존재라는 것, 자연스럽다는 것은 서로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때가 가장 평화로운 상태라는 것을 사유하는 일은 가치 있는 행위이다.
무더위로 푹푹 찌는 한여름에 『신문 읽는 지구』를 읽는다. 재래종과 외래종이 혼종의 삶을 조화롭게 사는 일을 도모하듯(「토박이 씨앗과 외국 씨앗」)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제안이었다.
김재복 kj-bok@hanmail.net
2018년에 《어린이와 문학》 신인평론가상과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평론)을 받으며 등단했다. 평론집 『다정의 세계』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