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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월호 산문

행복한 동시 이야기(이주영 시인) 2024년 봄호(25호)

작성자유화란|작성시간24.10.18|조회수30 목록 댓글 0

[행복한 동시 이야기]

 

그리운 증조할머니

 

증조할머니 공덕

 

이주영

 

 

키가

보통 남자들보다 크고

쌀 한 가미도 번쩍 들어 옮기고

고기를 못 드시면

배가 아프다고 하셨다는

 

6.25 전쟁 때

다친 국군 장교

한 달도 더 숨겨 주고

뒤떨어진 인민군 소년병은

옷 주고 밥 먹여서 보냈다는

 

그 어미한테는

다 귀하디귀한 자식인데

꼭 살아서 집으로 가게 해 주셨다는

 

전쟁터 나가서 소식 끊긴 손주도

제발 살아서 집으로 오게 해 달라고

새벽마다 샘물 한 그릇 떠 놓고

두 손 모아 빌고 비셨다는 증조할머니

 

중공군한테 잡혀서

압록강까지 끌려가셨던 아버지가

5년 만에 겨우겨우 살아오신 건

국군 한 명, 인민군 한 명

두 사람 목숨을 살려 준

증조할머니 공덕이라 한다.

 

얼굴도 못 본

증조할머니 덕으로

아버지가 살고

내가 태어나 살고

내 아이들이 태어나 살아간다.

 

『길에서 기린을 만난다면』 사계절, 2018

 

 

나는 어려서부터 증조할머니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한테 종종 들으면서 자랐다. 내가 장난꾸러기라 그렜는지

자주 다쳤고, 죽을 뻔 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너는 증조할머니 공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증조할머니가 돌봐주셔서 살아난 거라고 하셨다. 해마다 증조할머니 제삿날이이나 명절이면 집안 어른들 이야기에서 증조할머니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우선 보통 사람보다 키가 훨씬 큰데다 힘이 장사라고 하셨다. 장정도 들기 힘든 쌀가마니를 번쩍 번쩍 들어서 날랐다고 하신다. 식사도 머슴들보다 두 배는 드셨는데, 고기를 드시지 않으면 배가 아프다고 하셨고, 실제로 배를 곯으시는 소리가 옆에서도 크게 들렸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든 고기를 구해다 드리면 그렇게 맛있게 드셨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가 1920년대 물난리 때 돌아가셨고. 증조할머니 혼자서 농사를 지으면서 다섯 아들을 키우셨다고 한다. 아들 5형제도 증조할머니를 닮아서 모두 키가 크고 힘이 세셨다고 한다. 그런데 맏며느리로 들어온 할머니는 키가 아주 작으시고 힘도 약하셨다고 한다. 맏손주며느리로 시집오신 어머니도 몸이 작고 힘이 약하셨다. 그래서 며느리와 손주며느리가 있어도 집안 대소사나 힘든 일은 증조할머니가 다 챙기셨다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그런데 전쟁 중인 1951년 여름에 장티푸스로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세 분이 모두 한꺼번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어머니 고생이 시작되셨다고 한다.

 

1950년 여름 6.25 때는 맏손주인 아버지가 마을 자치대장인데도 피난을 못 가서 인민군을 피해 산에 숨어 다니다가 여러 차례 잡혀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중공군 남침으로 1.4후퇴를 해야 하자 동네 자치대원 일곱 명이 같이 군대에 입대해서 가평 쪽으로 배치되었다가 소식이 끊겼다. 같이 갔던 동네 친구가 고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교대하러 올라가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그날 밤에 고지가 중공군한테 포위가 되었다고 한다. 밑에 있던 부대만 빠져 나오고 고지에 올라가 있던 부대원들은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손주가 군대에 간 뒤로 증조할머니는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몇 시간씩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새벽에 후퇴하던 국군이 들어와 다리를 다친 장교를 부탁하자 두 말 없이 맡아서 숨겨주었다고 한다. 중공군이 들어와 있을 때는 마을 집집마다 크기에 따라 몇 명씩 숙식을 했는데, 우리 집은 커서 10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국군장교한테 한복을 입히고 머리에 수건을 씌워서 안방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두고, 중공군한테는 여동생 식구들이 폭격으로 다 죽고 혼자 살아왔는데 아파서 곧 죽을 것 같다고 속이면서 일주일 정도 아슬아슬하게 지냈다고 한다. 한 달 정도 숨겨서 치료해 주었더니 잘 나아서 남쪽으로 내려갔던 국군 장교가 다시 북진할 때 찾아와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렵에 이번에는 후퇴하는 인민군들이 많이 지나갔다고 한다. 그 중 다친 소년병을 또 며칠 숨겨서 치료해서 보냈다고 한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누가 볼까봐 무서워서 벌벌 떨었는데, 증조할머니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담대하게 하시더라고 했다.

 

아버지는 가평에서 포로가 되어서 만포까지 끌려가셨고, 중간에서 몇 번 탈출하다 잡혀서 죽도록 맞기도 여러 번 맞았다고 한다. 끌려가던 포로들이 굶주려서 반도 넘게 죽었는데, 아버지는 몇 차례나 길가에서 지나가던 북한 주민들이 몰래 건네준 옥수수나 감자나 주먹밥으로 허기를 겨우 면했다고 한다. 나중에 포로교환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이나 대구 형무소에서도 자칫 죽을 뻔 했는데, 그때마다 우연한 도움을 받아서 살았다고 한다. 포로교환으로 넘어오신 아버지가 간첩 혐의를 받아 대구형무소에 갇혀 있다는 연통을 받았다. 그것도 같이 갇혀 있다가 겨우 먼저 풀려나온 분이 아버지 부탁을 받아 몇 백리 길을 찾아와 알려준 거라고 했다. 어머니와 셋째 할아버지가 찾아가 아버지가 확실한 것을 확인하고, 살려준 국군 장교를 겨우 찾아서 보증인으로 세울 수 있어 풀려났다고 한다. 1954년 5월에 겨우 살아오셨는데, 1955년 3월 1일 내가 태어났으니 내가 태어난 것은 증조할머니 공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성묘 때나 차례 때나 제사 때면 빠지지 않고 해주 정씨 증조할머니가 즐겁게 되풀이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다. 증조할머니 드시게 닭고기 위에 젓가락 올려드려…. 육고기 없을 때는 물고기라도 드시면 배곯는 소리가 멈추셨다니까 조기에도 놓아드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증조할머니지만 이번 설에도 차례를 지내면서도, 형제들과 아이들하고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면서도, 다 아는 증조할머니 전설을 또 주고받으며 웃었다.

 

 

 

이주영 jy0301@hanmail.net

어린이문화연대 상임대표로 어린이날102주년•어한국창작동요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동시집과 동시그림책으로 『이래도 돼요?』 『바람아, 너 이름이 뭐니?』 『구름아 나랑 놀자』 동화책 『삐삐야 미안해』 『죽을 뻔 했던 이야기』 시집 『비나리시』, 수필집 『방정환과 어린이 해방 선언 이야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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