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키프리안
“만일 교회에서 죄를 짓는 사람이, 즉 중한 죄든 경한 죄든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고 되돌아오겠다면 용서하시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교수님은 질문을 갑자기 던지셨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문제는 교회론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론 논쟁은 곧 위의 질문의 해답을 준다는 것이지요. 교회론 문제, 즉 논쟁은 교부인 키프리안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키프리안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키프리안’이라는 이름을 흑판에 큰 글자로 쓰신 교수님은 강의하기를 시작하셨다.
“키프리안(200-258)은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법률가며 수사학 교사가 되었고, 246년 기독교인이 되어 248년 카르타고 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도시로 로마의 시실리 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지역이었기에 로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카르타고 하면 한니발이 기억날 것입니다. 218-201 B.C.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제2차 푸닉 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카르타고 장군은 한니발이었고 로마 장군은 룰리아누스였습니다. 카르타고를 한니발과 연계하여 생각하면, 그 주제가 그렇게 생소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코끼리들을 몰고 바다를 건너 로마까지 이르러 로마군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눈치를 보니 한니발의 이야기를 더 해줬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시는 것 같은데 절제합시다. 하하하. 다시 키프리안으로 되돌아옵시다” 교수님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시면서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고자 하신다.
“249년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 핍박이 시작되자 키프리안은 도피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곤 했지요. 그는 핍박이 종결되자 핍박 가운데 믿음을 포기했던 기독교인들을 의미하는 ‘배교자들’(lapsed)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큰 가르침을 줍니다. 키프리안은 그들에게 검증과 참회의 시간을 주고 난 후 완전한 성찬에 들어와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배교자들이 아무리 검증을 거친다 하더라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하는 노바투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와 안디옥에서 배교자들을 결코 교회로 들어오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반대자들, 즉 노바티안들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키프리안은 배교자들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로마감독과 입장을 같이 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가서 이단적 단체들이 행한 세례들을 교회에서 인준할 것인지 아니면 그런 단체에서 개종한 자들에게 재세례를 받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일어나자 키프리안은 다시 세례를 받도록 했으며 로마 감독인 스티븐은 반대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결과는 키프리안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처럼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바티안들과 구원이 보편교회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받아 들여야 한다고 하는 키프리안 간의 논쟁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에 어거스틴은 로마감독 스티븐처럼 재세례는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1.1.2. 배교자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계속하여 교수님께서 ‘배교자’ ‘배교자’라고 언급하셨는데요. 죄송하지만 그 배교자에 관해서만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생소한 단어이거든요”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느 학우가 질문을 던진다.
“참 좋은 질문입니다. ‘라비’(labi), ‘랍수스’(lapsus)라는 말은 ‘미끄러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배교자’라는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죠. 3세기 기독교 핍박으로 인해 이교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거나 배교적인 행위를 자행하는 것, 즉 기독교 신앙을 떠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흔히 우리는 배교자들을 세 가지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사크리피카티’(sacrificati)는 우상들에게 희생제를 실제로 드렸던 자들, 둘째, ‘투리피카티’(thurificati)는 신들의 제단에 향을 피웠던 자들, 그리고 셋째, ‘리벨라티키’(libellatici)는 위와 같은 배교적 행위를 행하지 않았지만 희생제를 드렸다고 하는 증서를 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의 칙령을 따랐던 신앙이 연약한 배교자들은 다시금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기를 소망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과 로마감독 코넬리우스 간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251년 지역 종교회의에서 키프리안의 견해가 받아들여졌고, 공개적 회개를 천명하는 자들을 교회 예배에 참여시키도록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황제 디오클레치안의 ‘대핍박’으로 인해 데시우스 시대에 있었던 노바티안 논쟁처럼 이번에는 도나티스트 논쟁, 즉 분파가 일어났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배교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306년 엘비라, 314년 아흘레와 앙키라, 그리고 325년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 결과 배교자들을 교회 예배에 받아들이도록 결정하였습니다”
1.1. 황제 발레리안
“몇년 후, 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안(Valerianus, 치리: 253-260)이 치리하던 시대에 키프리안은 카르타고에서 100km 떨어진 곳으로 추방을 당하고 감독직에서 은퇴했습니다. 다음 해에 자신이 순교당할 것을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참수형을 당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정말 바랐던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해 전파하면서 순교를 당하는 것이었는데 그 뜻대로 이뤄졌습니다”
“8번째 핍박을 시행한 황제 발레리안은 약 200년 경에 태어나서 시민적이고 군사적 경험이 풍부하여 원로원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 데시우스 시대에 매우 중요한 군사적 직위를 가졌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데시우스처럼 발레리안도 기독교인들을 매우 핍박했습니다. 황제 갈루스의 임무를 맡아 라에티아, 즉 지금의 스위스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갈루스가 살해를 당하자 원로원에 의해 황제직에 오른 자였습니다”
“황제직에 올랐지만 발레리안이 직면했던 첫번째 일은 늘 로마제국 변방 야만족의 침입과 위협이었습니다. 전체 로마제국 변방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발레리안은 직면했습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자신의 아들 갈리에누스(253-268)를 공동 황제로 임명해서 함께 로마제국을 다스렸습니다”
“발레리안이 직면했던 두 번째 일은 종교적인 일, 즉 영적인 일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종교생활에 항상 순응하지 않는 종교는 바로 기독교'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257년에 이르러 발레리안은 로마 신들을 더욱 더 신봉하는 자가 되면서 교회 성직자들에 반대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의 모든 예식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독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검거하여 죽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핍박을 통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계속하여 성장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첫번째 문제를 발레리안은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페르시안 왕 사포르 1세는 로마제국의 동방변방에 침입하여 안디옥을 포위했습니다. 이에 대해 256-257년 발레리안은 동방지역으로 갔지만 사포르에게 오히려 안디옥을 점령 당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발레리안은 고트족의 공격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들을 나누어 보냈습니다. 이제 얼마 되지 않는 군사들과 함께 하는 발레리안은 사포로에게 대패하고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포로는 말을 탈 때 발레리안의 등을 밟고 올라가기도 할 정도로 그에게 수치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사망하고 공동 황제였던 갈리에누스가 황제직에 올랐습니다. 이제 조금 쉬는 시간을 갖고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1.1. 황제 아우렐리안
교수님은 흑판 위에 위와 같은 커다란 지도를 걸어놓으신다. 초대교회를 이해하려면 로마제국을 이해하라는 말씀이 기억났다. 로마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지도를 통해 지명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성민도 여겨졌기에 걸어놓은 지도를 자세하게 쳐다보았다. 이윽고 교수님은 9번째 핍박 시기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이제 9번째 핍박을 가하는 로마제국 황제 아우렐리안(270-275)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황제 발레리안 아래서 집정관이었습니다. 아우렐리안은 고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다치아 지역을 그들에게 이양했고, 다뉴브 강 유역을 강화시켰습니다. 생소한 지역 이름이 나오면 연상이 되지 않으니까 안타까울 때가 있죠? 그러면 여기에 있는 지도를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오른쪽 중앙 지역의 길게 늘어난 곳이 다뉴브 강이고 그 강 북쪽이 다치아 지역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지역을 황제 아우렐리안이 고트족에게 이양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시작해서 독일, 네델란드, 폴란드, 체코 등지에서 살았던 부족이었습니다. 영토를 이양 받은 야만족들은 이제 라인 강 북쪽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우렐리안은 고올 지방, 즉 지금의 프랑스를 비롯한, 영국, 스페인,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강화시켰습니다. 당시 그는 부하들을 시켜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다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쉬는 시간을 갖고 계속하여 수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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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 |
“이 문제는 교회론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론 논쟁은 곧 위의 질문의 해답을 준다는 것이지요. 교회론 문제, 즉 논쟁은 교부인 키프리안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키프리안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키프리안’이라는 이름을 흑판에 큰 글자로 쓰신 교수님은 강의하기를 시작하셨다.
“키프리안(200-258)은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법률가며 수사학 교사가 되었고, 246년 기독교인이 되어 248년 카르타고 감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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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니발이 새겨진 동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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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끼리를 앞세우고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군대 |
“249년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 핍박이 시작되자 키프리안은 도피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곤 했지요. 그는 핍박이 종결되자 핍박 가운데 믿음을 포기했던 기독교인들을 의미하는 ‘배교자들’(lapsed)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큰 가르침을 줍니다. 키프리안은 그들에게 검증과 참회의 시간을 주고 난 후 완전한 성찬에 들어와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배교자들이 아무리 검증을 거친다 하더라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하는 노바투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와 안디옥에서 배교자들을 결코 교회로 들어오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반대자들, 즉 노바티안들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키프리안은 배교자들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로마감독과 입장을 같이 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가서 이단적 단체들이 행한 세례들을 교회에서 인준할 것인지 아니면 그런 단체에서 개종한 자들에게 재세례를 받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일어나자 키프리안은 다시 세례를 받도록 했으며 로마 감독인 스티븐은 반대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결과는 키프리안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금처럼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바티안들과 구원이 보편교회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받아 들여야 한다고 하는 키프리안 간의 논쟁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후에 어거스틴은 로마감독 스티븐처럼 재세례는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1.1.2. 배교자
“교수님, 질문이 있습니다. 계속하여 교수님께서 ‘배교자’ ‘배교자’라고 언급하셨는데요. 죄송하지만 그 배교자에 관해서만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생소한 단어이거든요”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느 학우가 질문을 던진다.
“참 좋은 질문입니다. ‘라비’(labi), ‘랍수스’(lapsus)라는 말은 ‘미끄러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배교자’라는 단어는 이러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죠. 3세기 기독교 핍박으로 인해 이교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거나 배교적인 행위를 자행하는 것, 즉 기독교 신앙을 떠나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흔히 우리는 배교자들을 세 가지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사크리피카티’(sacrificati)는 우상들에게 희생제를 실제로 드렸던 자들, 둘째, ‘투리피카티’(thurificati)는 신들의 제단에 향을 피웠던 자들, 그리고 셋째, ‘리벨라티키’(libellatici)는 위와 같은 배교적 행위를 행하지 않았지만 희생제를 드렸다고 하는 증서를 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의 칙령을 따랐던 신앙이 연약한 배교자들은 다시금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기를 소망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과 로마감독 코넬리우스 간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251년 지역 종교회의에서 키프리안의 견해가 받아들여졌고, 공개적 회개를 천명하는 자들을 교회 예배에 참여시키도록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황제 디오클레치안의 ‘대핍박’으로 인해 데시우스 시대에 있었던 노바티안 논쟁처럼 이번에는 도나티스트 논쟁, 즉 분파가 일어났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배교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306년 엘비라, 314년 아흘레와 앙키라, 그리고 325년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 결과 배교자들을 교회 예배에 받아들이도록 결정하였습니다”
1.1. 황제 발레리안
“몇년 후, 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안(Valerianus, 치리: 253-260)이 치리하던 시대에 키프리안은 카르타고에서 100km 떨어진 곳으로 추방을 당하고 감독직에서 은퇴했습니다. 다음 해에 자신이 순교당할 것을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참수형을 당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럴 때 그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정말 바랐던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해 전파하면서 순교를 당하는 것이었는데 그 뜻대로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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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 발레리안이 새겨진 금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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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 황제 갈리에누스 |
“발레리안이 직면했던 두 번째 일은 종교적인 일, 즉 영적인 일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종교생활에 항상 순응하지 않는 종교는 바로 기독교'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257년에 이르러 발레리안은 로마 신들을 더욱 더 신봉하는 자가 되면서 교회 성직자들에 반대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의 모든 예식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독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검거하여 죽였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핍박을 통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계속하여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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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치를 당하는 황제 발레리안 |
1.1. 황제 아우렐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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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세기의 로마제국 지도 |
“이제 9번째 핍박을 가하는 로마제국 황제 아우렐리안(270-275)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황제 발레리안 아래서 집정관이었습니다. 아우렐리안은 고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다치아 지역을 그들에게 이양했고, 다뉴브 강 유역을 강화시켰습니다. 생소한 지역 이름이 나오면 연상이 되지 않으니까 안타까울 때가 있죠? 그러면 여기에 있는 지도를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오른쪽 중앙 지역의 길게 늘어난 곳이 다뉴브 강이고 그 강 북쪽이 다치아 지역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지역을 황제 아우렐리안이 고트족에게 이양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고트족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시작해서 독일, 네델란드, 폴란드, 체코 등지에서 살았던 부족이었습니다. 영토를 이양 받은 야만족들은 이제 라인 강 북쪽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우렐리안은 고올 지방, 즉 지금의 프랑스를 비롯한, 영국, 스페인,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강화시켰습니다. 당시 그는 부하들을 시켜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다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쉬는 시간을 갖고 계속하여 수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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