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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돌 사랑 (138)

작성자~조흥제|작성시간26.06.06|조회수29 목록 댓글 0
                                  (138) 이영희의 돌 사랑


                                                                                  조 흥 제


  경주로 가면 으레 박물관을 찾는다. 잡초 몇 포기가 햇빛에 나부끼며 송송 자라고 있는 기와 지붕, 박물관이라는 호칭이 쑥스러운 작고 아담한 전시관이다.
여기에는, 옛 사람들의 고급 장식품보다는 시민들의 애환이 담긴 생활 기구들이 많아서 즐겁다. 에밀레종도 그 중의 한가지다. 이 대종을 자세히 훑어보면 군데군데 흠줄 같은 자국이 패였다. 구릿가루를 마시면 낙태한다는 설이 있어, 가난과 아기 낳기에 지친 옛 여인들이 밤마다 찾아와, 이 대종에서 구릿가루를 몰래 긁어낸 자리라 한다. 이것은 에밀레종이 지닌 예술성이나 구슬픈 전설보다 한결 생생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절실한 생활의 흔적을 눈여겨보게 되는 탓일까.
전시관 난간 아래 뜰에는, 두 아름이 넘는 大壺(대호)의 파편이 놓여 있다. 천년을 묵어 은은한 숯빛으로 탄화된 신라 토기의 한 조각이다. 그 소박한 만듦새와 그 규모 큰 용량이 현대의 구차한 기교와 협량들을 조용히 지적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전시품 중의 압권은, 마당에 즐비하게 정좌한 佛頭(불두)들이다. 고려말의 배불사상에 의해, 목이 잘린 채 몸둥이 따로, 머리 따로 수백년을 땅에 묻혀왔던 돌부처들, 그 머리 없는 군상, 또는 머리만의 행렬을 바라보느라면 언뜻 전율을 느끼게 된다. 몸매가 온전한 어느 불상에서도 느낄 수 없던 생명감을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돌부처는 목이 잘려 오히려 생명성을 얻은 셈이다.
풍화된 돌부처의 표정도 감동적이다. 웃는 듯 우는 듯, 웃음과 울음이 혼연하게 그 현묘한 표정, 묵묵한 항변인 동시에 주장하는 체념, 엄숙한 아량의 모습이다. 돌부처의 얼굴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은 머리 없는 동체에서도 느끼게 된다. 돌부처의 표정이라기보다는 ‘돌의 표정’일는지도 모르겠다.
돌에는 3가지 ‘정’이 있다고 한다. 靜과 情과 精. 돌은 고요하고, 정답고, 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얘기다. 이 세가지 정이 모두 생명성과 이어지는 낱말이라는데 더욱 흥미를 갖게 된다. 잉태를 모르는 비생명체에 느끼게 되는 그 생명감의 여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한정된 목숨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전제로 한 에로스. 사랑의 환희의 절정에서 하염없는 슬픔을 깨닫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하다 괴로워하다 싸우다 죽어가는 인생들이다. 그 무상한 변전 속에, 홀로 변함없는 자세로 세월의 흐름을 가르며 엄존하는……돌. ‘한정된 목숨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영생의 이미지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주의 火成石은 그 개성적인 모양새로 언제나 마음을 끈다.
구멍이 숭숭 많은 검은 빛깔의 돌. 얼기설기 그 돌로 쌓아 올린 밭두렁의 방풍벽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시멘트와 같은 접착제 하나 쓰지 않고도 정연하게 쌓아진 채 허물어지지 않는 역학적인 돌들의 질서가, 보는 이의 마음을 영락없이 사로잡는 것이다.
돌과 돌이 엉성하게 물린 틈 사이로 멀리 허무처럼 비쳐 보이는 남제주의 쪽빛 바다.
무한히 밝으면서도 무한히 어두워 보이는 그 바다 빛은 돌담과 더불어 하나의 상징적인 절경을 이루어 인생을 또는 인간관계를 암시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섬마을 풍경은 더한층 암시적이다. 해변의 눈부신 햇살을 둔하게 반사하는 초가지붕과 이웃하며, 돌담으로 테둘러진 무덤들이 봉긋봉긋 동화처럼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 너머로 밭이 있고, 밭 너머엔 망망한 바다가 있다. 제주에서는 ‘죽음은 항상 생활에 밀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엉뚱한 대비겠지만, 이집트의 국립박물관에서는 이와 반대의 심증을 얻을 수 있었다. ‘항상 죽음에 밀착되어 온 생활’이다. 그곳에 소장된 숱한 미이라가 말하는 생사의 의미. 떠나간 영혼의 회귀와 함께 회생하는 날을 기다리며, 육신이 나날의 돌을 닮아 수천 년을 고스란히 감내해 온 미이라들은, 不氣味하기에 앞서 숙연한 마음을 품게 한다. 미이라는 덧 없는 목숨이 창작해 낸 일대 환상이기 때문이다.
사하라사막에 용립하는 피라밋도 죽음에 밀착되어 온 생활의 거대한 표적이다. 높이 137m, 저변의 길이는 각각 230m, 1m 사방의 돌덩이 230만개를 세모꼴로 쌓아 올렸다는 제왕의 무덤이다.
돌을 나르는데 10년, 지하실 만드는데 10년, 하늘 높이 돌을 쌓아 올리는데 20년. 한 인간의 무덤을 위해, 수천 수만의 인간들이 실로 평생을 다하여 지어낸 이 석산 앞에는, 역시 거대한 스핑크스가 사리고 있다.
인간의 머리와 사자의 몸체를 지닌 이 석상의 표정도 아주 묘하다.
턱을 약간 내민 채 허공을 들이켜는 듯한 모습. 왕자의 권력의 상징으로서 깎아 세운 것이라지만, 먼 훗날인 요즘, 스핑크스의 표정은 차라리 권력 부정적이다. 보기 탓일까. 풍화된 그 스핑크스에게서는 애수어린 인내의 표정을 읽게 된다. 묵묵한 항변, 주장하는 체념, 엄숙한 우아, 경주 박물관의 불두와 어쩌면 신통히도 상통하는 것이 있다.
스핑크스의 어깨 너머, 사막의 화려한 낙조를 본다. 하늘은, 眩暈(현훈)을 느끼도록 고운 장밋빛으로 타오르고, 피라밋과 스핑크스가 길게 그림자를 띄운 모랫벌은 흡사 대양의 이랑처럼 굽이굽이 물결치며 믿을 수 없을만큼 투명한 朱金色으로 번지는 것이다. 그 장엄한 빛깔의 향연 속으로 태양이 진다. 피리밋 만큼이나 큰 불덩어리. 일찍이 그렇게 큰 태양을 본 적이 없다.
소멸이란 실상 이와 같이 화려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영생에의, 또는 영원한 사랑에의 처절한 소망으로 채색된 몸부림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돌 水盤에 꽃을 꽂아 본다. 꽃은 화려할수록 돌에 어울린다. 쏟아질듯 탐스러운 작약이라든가, 아련하고 사연이 많은 안개꽃의 하얀 群花다발이라든가……
아름다운 꽃일수록 수명이 짧다. 불과 수일을 넘기지 못하는 짧고 소담한 목숨이, 불변의 물질이 마련한 좁은 세계 안에서 한껏 고운 계절, 이 초여름에 돌을 생각한다. 생활에 밀착되어 온 죽음과 죽음에 밀착되어 온 생활 속에 다같이 긍정적인 의미를 투여해 온 그 미더운 물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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