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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모래알의 무게 (139)

작성자~조흥제|작성시간26.06.07|조회수15 목록 댓글 0

       (139) 이영희의 모래알의 무게

 

                                                                                              조 흥 제

 

  길목에 앉아 저녁 늦도록 흙장난하는 아이를 위해, 마당 구석에다 모래사장을 만들었다.

한 평도 채 못되는 사장이다. 벽돌 몇 개를 가지런히 쌓아서 시멘트로 다져, 강모래 한 리어카아분을 쏟아 넣어 한나절 동안에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자그마한 모래터에서는, 빨간 비닐 빠께쓰랑 꽃무늬를 박은 빨래 방망이랑 소꼽살림이 종일 즐비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모래 밥’이며 ‘모래 떡’들이 수없이 만들어져 나간다.

어른들도 더러 이 성찬에 초대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병뚜껑으로 눌러 찍은 그 모처럼의 요리는, 덜 엉긴 묵처럼 해글해글 힘없이 풀어지게 마련이다.

砂質에 석영분이 많고 알이 굵은 탓일까. 정갈한 그 강모래엔 뭉치는 힘이 없다. 삼각산 모양 쌓아 올려,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다진 다음 산 허리께를 파내면 쉽사리 뚫을 수 있어야 할 터널이 무너지기만 한다.

끈기를 바란다면 찰흙이 있다. 가장 끈기 없는 사질에게 그것을 바라기란 우스운 일이나, 沙場의 매력은 실상 이 뭉치기 다지기를 테스트해 보는 굴 파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먼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사장에서는 늘 터널 파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산은 높고 클수록 신이 났다. 고산의 이편과 저편에서 살살 파내기 시작하여, 팔꿈치만큼이나 들어간 자리에서 친구의 손을 잡아 보는 야릇한 쾌감.

그것은, 곱고 가늘며 검은 끼 어린 모래알이었다. 지남철을 이 모래 속에 묻어 砂鐵을 흡착시켜 놀기도 했던 것으로 미루어, 금속분이 사질이었던 모양이다. 砂金이란 것도 있으니까, 모래에 그밖의 금속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놀라울 건 없다는 것이 어린대로 드라이한 생각이긴 했으나, 먼지처럼 가볍고 까만 입자를 가려내는 그 장난은, 속임수 없는 요술처럼 마냥 신기했다. 요즈음은 통 볼 수 없으나, 10여 년 전만 해도 거리에 가게를 벌이는 골동품 장수들이 많았다. 아이 업은 아낙네가 허술한 옷차림의 노인들이, 멍석이나 천막 천 한 장을 한길 모퉁이에 깔고는, 항아리 술잔을 비롯하여 鹿皮표지의 古書에 이르기까지 별난 고물, 골동품들을 잔뜩 벌여 팔았던 것이다.

이들의 값에는 엄청나게 비싼 것이 있는가 하면 의아스러울 만큼 싼 것이 있어서, 모래시계를 찾아냈을 때도 그터무니 없는 헐값에, 귀한 물건을 사 들였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장구 모양의 그 말간 유리알 속에는, 지남철로 가려낸 사철처럼 곱고 까만 모래알들이 소복하게 갇혀 있었다. 한쪽 유리알에서 또 하나의 유리알로—모래알들이 그 가녀린 허리께를 지나, 솔솔 쉼 없는 시간을 채우는 것이다.

한쪽 유리알 속으로 남김없이 모래알이 옮겨지기는 정확하게 3분, 달걀 반숙 만들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팔팔 끓어오르는 물에 달걀을 띄우고 나서 모래시계를 엎어 놓는다. 모래알이, 그 빛나는 허리를 질서정연하게 흘러내리는 사이에, 달걀 노른자는 태양같이 익어 간다.

손에 받으면 한 움큼도 못되는 3분간의 몰래알. 이 집요한 연속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어느 해 여름인가 동해안 모래톱에 묻힌 하루를 파내어 본다.

송림 끝에 완만한 굴곡을 이루며 10리나 뻗어 있는 백사장은, 盛夏 속에서 한 마리의 거대한 짐승처럼 숨쉬고 있었다. 그 따가운 체열 가운데, 저녁 해가 기울도록 모래찜질을 했다. 돌돌 만 타월을 베개 삼아 누운 몸을, 가슴, 팔, 다리 할 것 없이 얼굴만 내놓고는 몽땅 모래로 덮어 씌워 버리는 것이다.

깁스에 갇힌 몸뚱어리모양 도무지 꼼짝할 수 없었다.

먼지같이 가벼워 은근한 숨결 하나에도 날아갈 듯한 모래 알에서, 뜻밖에 죄어드는 육중한 무게를 느끼고 홀로 당황했던 일이 생각난다. 모래의 저력을 느끼며 넋없이 누운 채 뭉게구름 쳐다보던 그 한나절은, 썰어간 해조음처럼 멀기만 한데, 그때 그 무게의 기억만은 여태껏 피부에 절실하다.

암석에서 모래알이 되기까지……무척도 오랜 시련의 세월 끝에, 모래는 하나의 극한을 제시하며 그 작은 알갱이마다 저 나름의 시간을 담고 있는 것이다. 모래알의 무게, 시간의 무게. 살에 패이는 압박감의 사연을 스스로 납득하며, 별렀던 바다 구경을 올해도 이룩하지 못한 채 어느 새 가을바람을 맞게 된데 새삼 놀라기도 한다.

시간에 몰려 지나치는 하루 뒤엔, 또 하나의 바쁜 하루가 있다. 유리알에더 또 하나의 유리알로 좁은 허리 사이에 모래가 흐르듯, 하루 또 하루 생활의 최소공약수는 나의 옹색한 내면의 통구를 지나 간단없는 시간을 쌓아 올린다.

어린 것의 놀이옷을 잠옷으로 갈아입히다 보니 사르르 방바닥에 쏟아지는 모래알이 있다. 호주머니 안에 옮겨 앉은 이 사랑스런 무게의 뜻을 홀로 짐작하며, 손으로 쓸어 모은 모래알을 또 다시 작은 사장에다 돌려준다.

마당가엔 지금, 솔바람을 닮은 벌레소리로 넘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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