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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등화를 에워싼 단상 (140)

작성자~조흥제|작성시간26.06.08|조회수15 목록 댓글 0
                                  (140) 이영희의 燈火를 에워싼 斷想


                                                                                                            조 흥 제


  해가 지고 나서 밤이 오기까지의 한 때, 저녁녘은 ‘아름다운 시간’이다. 돌아오는 이를 위하여 집안을 말끔히 정돈하고 식탁에 한 송이 꽃을 꽂고 오지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끓일 무렵.
하늘 빛이 희부옇게 확산되면서 연붉은 놀이 번진다. 그 저녁놀이 숯불처럼 사위어 가면서 어두움은 남빛 날개를 펴고, 집집의 창마다 불이 켜지길 재촉한다.
불은 기대의 시간, 안착의 시간, 사랑의 시간에 켜지며 빛을 뿜는 것이다. 헌칠한 가로등, 다정한 軒燈, 그리고 화사한 커어튼이 드리워진 창문의 불빛은 흐뭇한 明度로 길 가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곤 한다. 밤은, 이들 환한 불빛이 있어 비로소 아늑할 수 있다는 즐거운 역설 속에 존재하는 모양이다.
태초에 불은 ‘인간의 편’이 못 되었다. 끌 길 없는 산불은 인간을, 안식처인 나뭇가지 위나 洞穴에서 추방했고, 용암과 더불어 땅에서 치솟는 불기둥은 ‘신의 노여움’처럼 생명의 씨를 마르게 했다. 영어의 ‘파이어(fire)’엔 ‘시련’, ‘환난’이라는 어의도 곁들여 있다는 사실은 차라리 당연하다.
이 위대하도록 두려운 천적을, 인간의 편에 서게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지혜의 소치라고 한다. 인간의 조상이 네 발걸음을 버리고 두 다리로 대지를 디디게 되면서 두 손과 함께 발달된 지혜, 그 지혜로 인한 응용력이 불을 인간의 편에 서게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조심스럽게 불의 기원을 파헤쳐보면, 인간은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두려운 불을 가까이 한 흔적이 역력하다.
태초에 우리 조상이 직면해야 했던 ‘밤의 공포’는 아마도 우리들의 상상의 영역을 훨씬 넘어도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죽음, 멸망을 암시받는 그 두려움.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암흑에서의 해방을 의도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두움을 밝혀주는 불, 불은 ‘열’로서 존재하기 전에 한 발 먼저 그 ‘빛’으로써 인간의 벗이 되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인간이 등화에서 먼 향수와 같은 그리움을 느끼게 되는 원인인지도 모른다.
‘불은 천상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불의 기원에 관한 설화는 세계 여러나라에 의외로 많다. 그리스에서는, 프로메데우스가 수선화 꽃심에 천상의 불을 당겨 인간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프로메데우스는 인간의 은인이 된 셈이지만 반면에 제우스 大神의 노여움을 사, 코카서스 산 꼭대기 바위에 사슬로 묶이는 옥살이 신세를 치러야 했다. 더군다나 그의 간은 날마다 사나운 독수리의 밥으로 삼아지곤 했다. ‘날마다’라고 한 것은, 독수리에게 뜯긴 간이 밤 사이에 도로 원상 복귀되곤 했기 때문이다.
프로메데우스는 그리이스 신화에 있어 지혜의 상징이다. 지혜가 훔쳐 준 불. ‘훔친다’는 것은 정당치 못한 행위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된 동기가 왜 ‘정당치 못한 행위’로 표현되어 있을까.
낮과 밤을 대자연의 리듬이었다. 광명 뒤에 암흑이 오고 암흑 뒤에 광명이 오는 대자연의 이 섭리의 조화를 교란시키는 별빛. 그것은 천상, 즉 대자연을 다스리는 제우스신에의 항거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움을 밝히는 불을 훔쳐 준 프로메데우스의 간이 어두운 밤 사이에 도로 돋아난다는 얘기도 다분히 암시적이다.
불이 인간의 편에 서게 되자, 제우스는 인간을 보복하기 위해 모든 災惡의 근원인 판도라라는 여인을 보냈다. 질병을 비롯한 갖은 죄악이 이 판도라로 인하여 인간에게 안겨졌다는 것이다. 갖은 재악을 가둔 상자 뚜껑을 판도라가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갖은 죄악은 불나방처럼 상자에서 날아나와 그때부터 계속 인간을 괴롭히기 시작했지만, 맨 마지막에 날아오른 작은 벌레같은 ‘희망’이 있어 인간은 온갖 신고와 시련 속에서도 끝내 절망하는 일 없이 살아나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불로 인한 ‘환난’과 불로 인한 ‘희망’. 흔히 ‘희망의 등불’이라 불러 불을 희망의 상징처럼 여기는데도 까닭이 없지 않은 셈이다.
불을 훔쳐 가진 죄값으로 인간에게 안겨진 여인 판도라. 재난의 상자를 기어이 열어젖히고야 배긴 그 스스럼 없는 욕구……인간 이상으로 더욱 인간적인 그 여인상에서 우리는 불과 여인과의 숙명적인 관계의 먼 실마리를 본다.
여인은 불을 가둔 부엌 속에 갇혀 있다. 여인은 오만한 여왕처럼 불을 부린다. 밥짓기를 명령하고, 국 끓이기, 생선굽기, 채소 데치기를 알맞춰 한 것을 명령하며, 쉼없이 노예를 부리는 약삭빠른 주인처럼 행세한다.
불은 여왕의 영대로 그 붉고 푸른 손길을 부지런히 팔락이며 순순히 봉사한다. 그러나 이 장난꾸러기는 순종하는 체 하다가도 주인이 한눈 팔기가 무섭게 그들의 먼 조상이 지니고 있던 원초의 위용을 모방하여 든다. 밥을 태우고 국을 끓여 넘치게 해서 난로를 눌어붙게 하고 간간히 손끝에 화상도 입히며 불길을 높이 키울 것을 시도하기도 한다. 여왕은 군림하기 위해 오히려 노예에게 매이는 당착의 업보를 감내하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불은 인간을 위해 2원적인 구실을 동시에 맡아 했다. ‘열원’으로서의 구실과 ‘광원’으로서의 구실. 뜨거운 불길은 동시에 밝은 등화이기도 했던 것이다. 인간의 생활사는 실로 불과 더불어 시작했고, 불의 2원적인 구실을 분리시키는 노력에 의해 변천과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횃불의 발명에서 시발한 등화. 불을 부리는 여왕은 이 등화까지도 거침없이 지배한다.
저녁녘이면 집안의 방마다 창마다 불빛을 밝히고, 그 휘황한 밝음 속에서 마치 성주와도 같이 의연히 앉아 나그네처럼 지쳐서 돌아오는 식구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성주는, 그가 성주인 탓으로 하여 고독함을 면할 수 없다. ‘성주’란 성의 주인, 성을 지키는 사람. 지킨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림이란 고독의 하나의 표현, 하나의 자세다.
밥 끓기를 기다리고, 빨래 마르기를 기다리고, 남편 돌아오길 기다리고, 황홀한 오르가슴을 기다리고, 태내에서 어린 생명이 자라기를 기다리고, 봄에 뿌린 꽃씨가 가을 한낮 찬란한 꽃잎의 환상으로 피어나길 기다리며, 여인은 판도라 상자 속의 작디작은 ‘희망’의 벌레처럼 살아간다.
여인의 기다림, 끝없는 그 고독의 심원을 오롯이 밝히며 등불은 오늘도 집집의 창마다 조용히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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