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살고 싶다
조 흥 제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집은 살 집만 있으면 된다. 남의 돈으로 집을 사면 안 된다.”고 한 말에 대통령이 부동산을 보는 눈이 들어 있다. 한 사람이 수십 채의 집을 가지고 값을 올리는 투기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리라.
TV 조선에서 실시하는 ‘미스트롯’이라는 프로가 있다. 거기 나온 출연자가 “나는 문경이 집인데 5위 안에 들어 문경에 안 갔으면 좋겠어요”한 말이 대통령 기자회견에 겹쳐진다. 그 출연자만이 아니라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올라와 살고 싶어 하는 심리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이 뭐가 좋을까? 옛날 왕들이 살던 궁전, 대통령과 한 하늘 아래서 숨을 쉬고, 대통령이 사는 집을 볼 수 있고, 높은 집과 넓은 도로, 신문사, 방송국 등 언론 매체, 수많은 연예인이 사는 서울, 지하철 타고, 출퇴근 하는 서울은 지방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고장이리라.
하지만 서울에서 살려면 집이 있어야 하고 먹고 살 직장이 있어야 한다. 지방 사람이 서울에 와서 살만한 직장에 취직하기란 쉽지 않다. 거기다 몇 천만 원 하는 셋집을 얻기도 어렵다. 그러니 지방에 사는 청소년들은 서울에서 살고 싶어 하지만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아 서울이 가까운 수도권으로 몰려든다. 그래서 경기도 인구가 서울 인구보다 많다.
나도 대전에서 살 때 서울을 그리워하였다. 신문을 통하여 전해져 오는 서울 소식은 꿈 많은 청소년에게 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서울역의 그 둥그스름한 시계탑, 기와집의 남대문, 흰 돌집의 거대한 중앙청, 상춘인파가 몰리는 창경원……,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 와서 도청에서 하룻밤 묵었다. 대통령이 자는 도청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서울에 가신다고 하여 뛸듯이 기뻐하였다. 양주에 사는 이종형이 55년도에 결혼하는데 어머니가 나도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손꼽아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대전역에서 9시에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성냥곽에서 성냥개비를 꺼내 한 정거장 지날 때마다 창틀에 올려 놓았다.
신탄진, 부강, 그 이상은 안 가 봤다. 안양에 오자 서울 냄새가 났다. 집도 크고 사람도 많았다. 한강 다리를 건너자 반원을 그린 인도교가 보였다. 신문에서 본 것들이다. 열차가 서자 기내 방송이 들렸다. “서울역, 서울역~ 여기는 이 열차의 종착역인 서울역입니다.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십시오.” 예쁜 여자 목소리였다. 창틀에 올려놓은 성냥개비를 세어 보니 29개였다. 시간은 5시간이 걸렸다.
역을 빠져 나와 서울역 시계탑을 보았다. 거기에 큰 시계가 있었다. 광장을 보니 사람도 많고 차도 많았다. 버스를 탔다. 대전에는 시내버스가 없는데 서울에는 있다. 파란 옷을 입은 처녀가 돈을 받았다. 몇 정거장 가서 내려 일가 집에 갔다. 퇴계로 대한극장 뒤였다. 이튿날 데리고 갈 사람이 없어서 혼자 서울 구경을 나갔다. 길을 잃으면 큰일이다. 전화도 없고 주소도 모르니. 퇴계로를 따라 신세계 앞까지 왔다. 엄청 큰 집이다. 옆에 돌로 지은 큰 집이 있어 기둥을 껴안아 보니 한 아름이 넘었다. ‘어휴’ 제일은행 본점 건물이다. 길을 건너 가니 조선호텔, 반도 호텔이 나왔다. 모두 신문에서 본 것들이다. 길을 건너 조금 가니 건너편에 조선일보사 간판이 보인다. 내가 보는 신문을 만드는 곳이어서 반가웠다. 얼마쯤 가니 경기도청이 있고 건너편에 희고 큰 건물이 있는데 중앙청 같다. 하지만 행인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촌놈으로 보이면 얻어맞는다’고 친구들이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돌아서서 기억해 두었던대로 친척 댁에 오니 내가 없어졌다고 야단이 났다.
이튿날 전차를 탔다. 버스만한데 길에다 철길을 깔고 그 위로 다닌다. 전차가 서면 차장이 “여기는 ◯◯역입니다”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신설동 시외버스 터미널에 와서 양주행 버스에 올랐다. 신문팔이 애들이 올라와 사라고 한다. 안 산다고 했더니 신문으로 내 머리를 탁탁 때렸다. 촌놈으로 보였던가 보다.
양주에서 3일을 묵고 서울에 오는데 미아리 고개를 넘어 종암 삼거리에 오니 ‘여기서부터 교통이 복잡해집니다.’하는 안내판이 있다. 서울에는 차도 많고 사람도 많고 집도 크고……, 살고 싶지 않다. 어서 대전에 가고 싶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건너편 후암동 산비탈에 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었다. ‘저런데서 어떻게 사나’. ‘부산행 발차~’하는 역무원의 안내방송을 따라 차는 덜커덕 움직였다. 한강을 벗어나 푸른 들판을 보자 막혔던 가슴이 트였다. 내 가슴 속에서는 ‘그렇게 오고 싶어 하던 서울이었는데 갈때는 왜 그 심정을 가지고 가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그때 서울은 인구 150만에 자동차가 7만대였다. 대전에는 인구 30만에 시내 버스도 없었고 거리에 건널목도 없었으니 서울에 뻔찔나게 다니는 차들에 속이 답답했었던가 보다.
63년도에 우리는 아주 서울에 살러 올라 왔다. 영등포 문래동 남의 셋방이었다. 이대입구 대현동, 연희동, 일산, 서대문 동아출판사, 관악구 봉천동, 동작구 상도동 장승배기, 은평구 신사동으로 이사 다니면서 서울에서 살았다. 우리가 서울에 올 때는 인구가 400만, 안양천 건너는 집이 없었고, 무악재 너머에도, 미아리 너머도 집이 없었다. 지금은 서울이 1000만여 명이 사니 호랑이 담배 먹을 때의 이야기다. 전차는 67년도에 자동차에 방해된다고 없어졌다. 길 가운데 철길이 있고 거기로 기우뚱거리면서 천천히 가니 자동차 운전자들에게는 천불이 났을 것이다. 그 때나온 노래가 '은방울 자매가 부른 '마포 종점'이다.
지금은 서울이나 지방이나 교통이 발달되어 큰 차이가 없다. 텔레비전으로 서울은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지방 사람도 서울을 그리워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TV 조선에 나온 14살 먹은 소녀가 “서울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 것을 보니 ‘아직도 지방 사람은 서울에서 살기를 바라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부에서는 지방민의 그런 마음을 알고 정부나 큰 기관을 지방으로 옮기려 한다. 정부의 일부가 충천남도 세종시로 가고, 한국예총이 광주로 가려 하고, 해양수산부가 부산으로 가려한다는 보도다. 또 뭐가 지방으로 갈지 모른다.
이재명 대통령이 ‘사람이 살 집은 하나면 된다. 남의 돈으로 집을 사면 안된다’고 했다. 은행에서 대출 받아서 집 사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집값이 안정되고 지방 사람들도 서울에 많이 와서 살게 되니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