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이창배의 국화 조 흥 제 매년 10월 중순경이면 덕수궁에서 국화 전시회가 열린다. 여러 해 전에 한두 번 가본 일이 있다. 갔을 때의 기억으로 놀라웠던 것은 국화 재배의 기술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발달되어 있는 점이었다. 수백을 헤아리는 화분에 심겨 있는 꽃들이 모두가 모양이 다르고 그 가꾸어 놓은 솜씨가 꽃에 따라 천태만상이어서 같은 종류의 꽃으로도 인공 여하에 따라서는 그렇게 가지각색의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고 혀를 찼던 것이다. 立菊類로서는 그 송이의 종류가 다양함이 볼만하지만 模型菊에 있어서는 인공의 극치를 볼 수 있었다. 줄기 하나에 수십 수백의 꽃을 길러 낸 재간도 놀랍지만 그 꽃송이들을 혹은 버섯 모양으로 혹은 지도모양으로 늘어놓아 한 그루의 꽃이 방안만 한 면적을 덮고 있는 광경은 참 장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꽃가지 하나하나의 장단을 조절하고 꽃과 꽃 사이 전후좌우의 간격을 고려하여 일일이 철사로 떠받쳐서 전체의 조화를 이룬 것을 보면 오랜 시일을 두고 거기에 드린 정성과 교묘한 솜씨에 누구나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모형국보다 한층 멋지고 인공미가 적은 것이 懸崖菊類이다. 수백의 작은 꽃송이들이 혹은 폭포처럼 혹은 벼랑처럼 물결쳐 내려온 것이 참 볼만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도시에서 가을철만 되면 국화는 우리 주변 어디서나 눈에 뜨일 정도로 많이 보급되어 있다. 꽃집에는 물론 노변의 행상들도 그들이 파는 꽃의 대부분이 국화이다. 그러니 자연히 사무실이고 예식장이고 병원이고 식당이고 어디를 가나 하루에 한두 번은 그 꽃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국화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물론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재래종 국화, 소위 들국화나 산국화 따위가 아니고 주로 도시에서 원예사들이 길러내는 개량종의 국화를 말한다. 내가 매년 열리는 국화 전시회에 가지 않는 것도 또한 집안의 화분 중에 국화만은 하나도 없는 것도 모두 내가 국화를 탐탁히 여기지 않는 까닭이다. 내가 국화를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반드시 모형국이어서와 같이 농후한 인공미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다알리아 같은 꽃에서 찾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결점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리고 국화의 미덕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 향기며 그 절개며 담백 순결한 아취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꽃을 싫어하는 까닭을 나는 지금 책상 위에 꽂힌 세 송이 洋菊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정결한 꽃잎들이 적당한 곡선을 그으며 휘어져 花心을 중심으로 소담한 송이를 이루어 소위 ‘개화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는 이 꽃에서 나는 도무지 무슨 결점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때에 문득 생각나는 것은 우리가 갖는 꽃에 대한 취미는 그것이 흡사 여성에 대한 취미와 같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떤 여성을 대할 때에 체격이 均齊하고 피부가 곱고 이목구비가 또렷또렷하여 어디 한군데에도 결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수가 있다. 그뿐 아니라 너무나 완전하고 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반발을 느끼는 수가 흔히 있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 때에는 차라리 머리 한 가닥이 흩어져 있든지 옷자락 어딘가에 구겨진 주름이라도 있었으면 싶은 생각이 든다. 아주 희귀한 경우지만 시에서 이런 기분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영국의 로버트 헤릭이라는 시인이 곱게 흐트러진 옷자락, 비뚤어진 레이스, 아무렇게나 여민 스카프, 허술하게 묶어 맨 리본 등에서 야성적인 우아함을 느낄 수 있고, 옷차림의 부분부분이 지나치게 단정한 것보다 매력이 있다는 짤막한 시를 쓴 일이 있다. 그러니까 대체로 여성에 대한 취미가 좋게 말하면 낭만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병적이고 퇴폐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무나 건강하여 근육이 싱싱하고 안색이 도화같은 여성, 鼻目이 수려하여 막힌 데 없이 훤한 얼굴의 여성을 나는 싫어한다. 내가 국화를 싫어하는 까닭도 결국 그것이 너무 완전하여 거기에서 어떤 개성미같은 것을 찾을 수 없는 내 자신의 다분히 괴벽스런 취미에서이다. 꽃잎 하나하나가 길이와 폭이 너무 고르고 단정하게 자리잡아 있는 것이 싫고, 빛깔마저도 흰 색이건 노랑 색이건 자주 색이건 어쩌면 그렇게 濃淡없이 한결같이 같은 색으로 고르게 물들어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은 그 꽃들이 전체에서 오는 원형의 단조로움이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국화의 종류는 모두 7, 8백종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내가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개괄적으로 말해서 국화는 어떤 것이고 그 모양이 원형이다. 원형은 흔히 원만과 조화의 상징으로 숭상되지만 꽃과 여자의 얼굴에서 원형은 매력이 없다. 또 한가지 국화가 주는 보편적인 인상은 소담하고 유복한 인상인데 그것이 실용의 미덕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미의 카테고리엔 들기 어렵다. 확실히 우리가 꽃이나 여성을 대할 때엔 실용적 표준을 떠나서 순수 미학적인 견지에서 보는 수가 많은데, 완전하고 참된 것이 동시에 미가 될 수 있다는 미학이론이 적어도 꽃과 여성에게는 적용될 수 없을 것 같다. 낭만시인어었던 존키츠가 “아름다움은 참이요, 참은 아름다움”이라고 말했을 때에도 그가 과학적 표준과 미학적 표준을 혼동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상상의 세계에서 미라고 포착된 것은 그것이 동시에 진이 될 수 있다는 다분히 발전된 미 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그저 나도 윤리적인 척도로 꽃을 보고싶지 않기 때문에 완전, 단정, 풍요, 절개같은 윤리적 미덕을 대표하는 국화를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미덕과는 아무 상관없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단정미가 없는 칸나나 글라디울러스 같은 꽃이 내게는 한없는 매력을 준다. 이것은 바단 나뿐만이 아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시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서양에서 국화류의 속하는 데이지를 노래한 수없이 많아도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소담한 국화를 노래한 시인은 한둘에 불과하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고금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국화를 주제로 시를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시심을 사로잡은 국화는 지금 내 책상 위에 꽂힌 이 화려한 양국과는 비교도 안되는 마당 가 울밑에 외롭게 피는 지극히 빈약하고 보잘것 없는 재래종 국화였던 것이다. 나도 그런 국화는 좋아하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꽃들이 그렇게 외롭고 빈약하고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
다음검색